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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비검무-51화 (51/184)

051화 한 줄기 별빛과 같은 자각이

단전에서 올라온 뜨거운 기운이 백회열을 거처 용천혈까지, 다시 용천혈에서 백회열까지 몇 주천을 돌고 돌았다.

진기가 한 바퀴씩 더 돌 때마다 청운의 머리 위에서는 투명한 자황색의 환이 마치 꽃잎이 피어나듯 겹겹이 피어나고 있었다.

무한화서(無限花序)였다.

꽃이 아래에서 위로, 가장자리에서 가운데로 계속 피면서 맨 꼭대기에서 계속 자라났다.

그 순간 청운은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도, 자신이 지금껏 마음에 품고 있었던 검도 공(公)의 무상 속에 놓아 버렸다.

청운은 자신도 잊고 검도 잊어버렸다.

그러자 자신의 마음과 몸이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편해졌다.

자신이 그동안 아무리 깨우치려 노력해도 깨우치지 못했던 한 줄기 별빛과 같은 자각이 영혼의 심연에서 뇌전을 치듯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청운은 비로소 깨달았다.

그동안 자신이 창안해 놓고도 터득하지 못했던 여덟 번째 초식인 ‘멸환’을 단번에 깨우쳤다.

[내가 완전한 검이 되면, 검은 하늘에도 있고 땅에도 있고 바람 속에도 있고 내가 원하는 모든 곳에 있다. 내가 검을 찾지 않아도 검이 나를 찾는다. 시간도 공간도 내 검에 의해 존재하고 내 검이 존재하지 않으면 시간도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멸환―]

청운이 하늘을 향해 자신의 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밤의 심장을 향해 깊숙이 찔러 넣었다.

그러자 청운을 둘러싼 모든 공간이 마치 성운을 헤치며 유성우가 떨어져 내리듯 찬연한 자황색의 빛에 휩싸였다.

청운은 그 자황색의 빛 속에서 한바탕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 춤사위는 그냥 춤이 아니었다.

끊어질 듯 이어지고, 이어질 듯 끊어지는 유려한 청운의 동작은 마치 비처럼 쏟아지는 유성우 사이를 성운을 타고 유영하는 것 같았다.

존재와 공간의 경계마저 허물어진 차원에 청운의 춤사위가 펼쳐지고 있었다.

하나의 초식은 단순한 하나의 초식으로 끝나지 않았다.

쾌―초식이 타―초식과 이어져 또 다른 새로운 초식이 만들어지고, 타―초식이 절―초식과 어울리면 또 하나의 새로운 초식이 생성되었다.

초식과 초식이 서로 연환될 때마다 무수한 새로운 초식이 꽃잎이 피어나듯 계속 피어났다.

무한화서.

그것은 끝도 시작도 없는 무한화서였다.

자신의 영과 육에 있던 모든 힘을 쏟아낸 청운은 의식을 잃고 나풀거리는 꽃잎처럼 그 자리에 떨어져 잠시 의식을 놓고 말았다.

채 일다경도 지나지 않아 청운이 눈을 번쩍 떴다.

깊은 연못의 심연 같은 청운의 눈에 은은한 서기가 내비치고 있었다.

청운은 입가에 한 줄기 은은한 미소를 베어 물었다.

이제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누구한테도 질 것 같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멸환겁’은 몰라도 ‘멸환’은 마음대로 펼칠 수 있을 것 같았다.

희색이 만면했던 청운의 표정이 갑자기 빙벽처럼 침울해졌다.

아무리 무공이 새로운 차원에 진입한들 이곳에서 뭘 한단 말인가.

이곳을 벗어날 길이 전혀 없는데…….

다시 무겁디무거운 갈등과 고민이 청운의 가슴을 천근만근 짓눌렀다.

이 절지를 어떻게 벗어난단 말인가?

과연 이곳을 벗어날 길이 있기는 한 것인가?

근심과 고민이 청운의 영혼에 천근석을 올려놓은 것 같았다.

그래도 오늘은 기분이 좋았다.

청운은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한순간은 눈보라 치는 겨울처럼 침울했다가 다른 한순간엔 미풍이 살랑거리는 봄날처럼 얼굴 가득 미소 짓기를 수십 차례나 반복했다.

그러다 마침내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은 나중의 문제이고 일단은 이곳의 일을 마무리하자.’

청운은 연못 이곳저곳에 떨어져 있는 비도를 주어 왼팔에 차고 삼적피리를 회수에 품속에 넣었다.

청운은 연못 한 귀퉁이에 반쯤 걸친 채 죽어 있는 백무기의 사체를 얼음 위로 끄집어 올렸다.

숨이 멎은 백무기는 그냥 한 마리 거대한 괴수일 뿐이었다.

저승의 안개 같았던 백무기의 허연 혀는 입에서 반쯤 삐져나온 채 굵은 밧줄처럼 힘없이 축 처지고는 얼음 위에 늘어뜨려져 있었다.

그토록 사이하고 요사한 빛을 내뿜어 사람을 홀릴 것 같은 붉은 혼령 같은 눈도 멍청하게 반쯤 감긴 채 빙벽을 마주보고 있었다.

청운은 백무기의 배를 갈라 주먹만 한 내단을 먼저 꺼내 품속에 갈무리했다.

그리고 백무기의 가죽을 조심스럽게 벗긴 후 넓게 펴서 말렸다.

백무기의 살은 그대로 일용할 양식이 되었다.

청운은 백무기의 살을 매일 밥 삼아 먹어 치웠다.

청운은 이곳을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를 생각할 때마다 골머리가 아팠다.

정말 유일한 출구는 사라영빙 노 선배가 말한 그 절벽의 얼음 구멍밖에 없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 방법은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도박이었다.

청운은 너무나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나머지, 수중동굴에서 자신을 벗어나게 해준 대붕을 생각하며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고함을 지르는 듯한 목소리로 끼르륵, 끼끼르륵 거리며 대붕의 흉내를 냈다.

수없이 대붕의 흉내를 내도 대붕은 한 번도 청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탈출구가 정말 그곳밖에 없다면 어쩔 수가 없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마음을 단단히 고쳐먹어야 한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이지만 이 절지에서 이대로 얼어 죽을 수는 없다고 청운은 결심했다.

죽어 시체가 되더라도 바깥세상의 시체가 여기의 시체보다 더 낫다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청운은 죽기를 각오하고 탈출을 시도해 보기로 작정했다.

생사는 재천이다.

이런 곳에서 몇 년 더 살고 덜 살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그동안 뜯어서 말린 빙화초를 백무기의 껍질 안에 두툼하게 깔았다.

그리고 백무기의 가죽을 몸에 몇 겹이나 둘렀다.

마지막으로 백무기의 혀를 뽑아 말린 밧줄로 온몸을 친친 감았다.

빙화초를 속에 덧대고 백무기의 가죽을 두른 청운의 몸은 원래 자신의 몸보다 서너 배나 더 굵어져 있었다.

몸이 조금 불편하기는 했으나 청운은 개의치 않았다.

청운은 사라영빙 노 선배가 말한 세 번째 연못을 결연하게 걸어갔다.

세 번째 연못 가장자리에는 커다란 얼음 구멍이 지옥의 무저갱처럼 아래로 뚫려 있었다.

따뜻한 열수가 수십만 년 흘러나가며 만든 구멍이었다.

까마득한 구멍 속은 컴컴한 어둠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안력을 돋우어도 구멍 속에서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짙은 어둠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청운은 그 시커먼 구멍을 내려다보며 몇 번이고 마음을 모질게 다잡았다.

치우전륜공을 최대한 끌어 올린 청운은 생사를 하늘에 내맡긴 채 칠흑 같은 까마득한 구멍 속으로 자신을 던졌다.

청운은 순간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청운은 치우전륜공을 최대한 운용해 낙하 속도를 최대한 늦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가 마치 귓바퀴에 대고 바람의 신이 고함을 치는 듯이 시끄러웠다.

* * *

얼마나 그렇게 떨어졌을까.

아직도 어둠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참 더 떨어지고 나서야 희미한 빛이 청운의 눈에 들어왔다.

청운은 드디어 얼음 구멍을 다 통과했구나, 하고 생각했다.

얼음 구멍을 통과한 청운의 몸은 얼음 절벽에서 떨어진 얼음덩어리처럼 아래로 아래로만 계속 낙하하고 있었다.

높아도 너무 높은 절벽이었다.

바닥에 떨어지는 즉시 절명하고 말 것이라는 불길한 불안이 청운의 마음을 무거운 쇠공처럼 찍어 눌렀다.

공력으로 추락의 속도를 늦추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천빙열화과까지 복용한 청운의 내공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후해졌지만 그래도 한계는 분명 있었다.

무공이 아무리 높아도 인간은 절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마침내 그렇게도 까마득했던 바닥이 청운의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보고 싶었던 바닥이 눈에 보이자, 기쁨보다 갑자기 견딜 수 없는 공포감이 청운의 영혼을 엄습해 왔다.

그 두려운 공포감은 청운 자신의 내공 또한 곧 바닥을 드러내고 말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어차피 죽기를 각오하고 시작한 일, 청운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아예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목소리로 대붕의 흉내를 냈다.

끼―르―륵, 끼―끼―르―륵, 끼륵.

바로 그 순간 청운은 뭔가가 자기의 몸을 확 낚아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청운이 눈을 번쩍 뜨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청운은 자기 몸이 커다란 새의 발톱에 붙잡혀 있는 것을 보았다.

새의 발톱 하나가 거의 일장이 넘었다.

청운이 발톱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쳐 보았지만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청운은 자신의 온몸을 백무기의 가죽으로 칭칭 감싸고 있어서 운신이 더 부자연스러웠다.

귀신을 피해서 도망치다 염라대왕을 만난 격이었다.

커다란 괴조가 아마 자신을 먹이로 알고 낚아챈 것이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어차피 목숨을 하늘에 맡기고 절벽에서 뛰어내렸는데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아예 자신의 생사를 포기해 버렸다.

그런데 괴조는 청운을 해칠 마음이 전혀 없는 것처럼 부드럽게 날아가기만 했다.

청운은 혹시 대붕, 하는 생각으로 다시 한번 괴조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아! 거대한 괴조는 대파산 수중동굴에서 본 바로 그 대붕이었다.

대붕은 나를 살리려고 절벽에서 떨어지는 나를 발톱으로 붙잡은 것 같았다.

청운은 한시라도 빨리 땅에 닿고 싶었다.

그는 대붕의 발을 부드럽게 아래로 끌어당겼다.

대붕은 속도를 천천히 줄이며 하강했다.

거의 땅에 발이 닿을 정도의 높이에서 대붕은 슬며시 청운을 붙잡고 있던 발톱을 풀었다.

청운이 땅으로 풀쩍 뛰어내리자 대붕도 땅에 착지하여 날개를 가만히 접었다.

청운이 부드럽게 날개를 쓰다듬자 대붕이 목을 길게 빼고는 끼르륵, 끼르륵 울며 청운을 아는 척했다.

청운이 대붕과 반가운 해후를 하고 있을 때 하늘 저 먼 곳에서 끼르륵 거리는 다른 대붕의 소리가 들렸다.

청운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자 또 한 마리의 대붕이 있었다.

그 대붕은 서서히 하늘을 선회하더니 청운이 있는 곳을 향해 곧바로 하강했다.

그 대붕의 크기는 청운의 바로 옆에 있는 대붕의 반도 채 안 되었다.

그래도 일반 새의 크기에 비하면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청운은 번뜩 머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면 저 작은 대붕은 그때 대파산에서 알을 깨고 나온 새끼이구나 하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작은 대붕이 땅에 내려앉자마자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날개를 마구 쓰다듬었다.

작은 대붕도 반가운지 길게 쭉 뺀 목으로 청운의 몸을 비벼댔다.

청운은 왼손으로 어린 대붕의 깃털을 쓰다듬으며 오른손으로 먼 산의 봉우리를 가리키며 태워달라는 몸짓을 했다.

대붕은 청운의 속마음을 알았다는 듯이 타라고 몸을 낮추었다.

아무리 어려도 대붕은 대붕이었다.

영물이었다.

청운은 큰 대붕을 한번 슬쩍 쳐다보고는 어린 대붕의 등에 훌쩍 올라탔다.

청운이 등에 오르자 작은 대붕은 곧바로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지상은 온통 눈의 천지였다.

흰색 말고는 다른 어떤 색도 보이지 않았다.

작은 대붕은 순식간에 몇 개의 삼을 넘었다.

유심히 지상을 내려다보던 청운의 눈에 얼핏 눈의 하얀색과는 조금 다른 흰색이 들어왔다.

착각인가 싶어 더 자세히 보아도 분명 눈과는 다른 색이었다.

청운은 대붕의 깃털을 살며시 아래로 잡아당겼다.

대붕이 알아들었다는 듯 서서히 하강했다.

좀 더 가까이서 보니 그 흰색은 얼음을 깎아 만든 것처럼 아름다운 대리석 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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