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9화 백야에 치는 번갯불 같은
청운은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그 틈새로 날아 들어갔다.
그곳은 일반인이라면 아예 엄두도 못 낼 정도로 미끄럽고 위험천만한 곳이었지만 무공을 회복한 청운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청운은 묘묘보허를 전개해 마치 한 마리의 나비처럼 그 틈새를 훨훨 날아다녔다.
얼마를 그렇게 갔을까.
청운은 갑자기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아! 하고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것은 마치 이 세상 최고의 장인이 얼음을 깎아 만든 정원 같았다.
사방이 얼음으로 깎아 세운 것 같은 둥근 벽이 투명한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가운데에 직경이 거의 백여 장에 달하는 연못이 있었다.
연못에서는 마치 아지랑이처럼 희미한 김이 연신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그 광경은 몽환적이기까지 했다.
연못의 한복판에는 마치 거짓말처럼, 그 둘레가 십여 장 정도 되는 작은 섬이 연못이 꾸는 꿈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그 꿈속의 꿈처럼 줄기와 잎이 모두 하얀 사람의 키보다 조금 작은 나무가 한그루 자라고 있었다.
그 나무의 가지에는 투명하면서도 옅은 붉은 색의 열매 세 개가 달려 있었다.
청운은 자신도 모르게 저것은 천빙열화과! 하고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하지만 천빙열화과는 아직 채 익지 않아서 이제 겨우 작은 야명주만 했다.
아직 한참 덜 익은 것 같았다.
청운은 천빙열화과가 완전히 익을 때까지 며칠마다 한 번씩 와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는 연못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청운이 서 있는 곳에서 좌측으로 이십여 장 떨어진 곳에 작은 동굴이 하나가 보였다.
청운은 묘묘보허로 단숨에 그곳으로 날아들었다.
삼십여 장쯤 안으로 더 들어가자 얼음벽이 끝나고 바위 동굴이 나타났다.
다시 이십여 장을 더 들어가자 바닥이 평평한 제법 널찍한 공간이 나타났다.
공간은 십여 명이 한꺼번에 쉬고도 남을 정도로 넉넉했다.
주변을 자세히 둘러보던 청운은 너무 놀라서 거의 기절할 뻔했다.
어두컴컴한 동굴의 가장 안쪽에 머리카락이 조금 세었지만 설표의 털을 뽑아 만든 하얀 백의를 입은 절세 미부의 중년 여인이 깊은 상념에 잠긴 듯 가만히 눈을 감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녀의 피부는 눈처럼 희었으며 반백의 머리카락은 무릎까지 늘어뜨려져 있었다.
그녀의 무릎 위에는 보통의 검보다 폭이 반 치정도 작은 검 한 자루와 책자 두 권이 놓여 있었다.
청운은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리고 깍듯하고 공손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선배님, 저는 안휘현 출신의 강청운이라 합니다. 이렇게 선배님의 거처에 무단으로 침범해 송구합니다. 저도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이렇게 된 것이니 부디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묵묵부답이었다.
청운이 몇 번이나 인사를 건넸지만, 그 중년의 미부인은 청운의 말에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심지어 감고 있는 눈도 뜨지 않았다.
청운은 아무리 남의 거처에 허락 없이 함부로 침범했다 하더라도 자신이 그 정도로 예의를 차렸으면 상대방도 어느 정도는 그에 상응하는 반응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전히 눈을 감고 자신을 무시하는 상대의 태도에 조금 부아가 치밀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더 큰 목소리로 선배님! 하고 불렀다.
그래도 그녀는 전혀 미동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청운은 무례를 감수하면서 중년의 미부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청운이 그녀의 소매 깃을 살짝 잡아 흔들며 다시 선배님! 하고 불러보았다.
그런데 청운이 그녀의 소매 깃을 살짝 흔들었을 뿐인데 놀랍게도 중년 미부는 옆으로 픽 쓰러지고 말았다.
청운은 너무 놀라 자신도 모르게 뒤로 서너 발짝 물러나고 말았다.
그녀는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시체였다.
다만 이 빙곡의 냉기로 인해 그녀의 사체는 생전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청운은 그녀의 시체를 동굴 한쪽을 파서 안장하고 두 번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무릎에 놓여 있던 책자를 살펴보았다.
한 권의 표지에는 [유라수]라고 쓰여 있었고, 다른 한 권에는 [빙혼검결]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빙혼검결의 책자 속에서 피를 뽑아서 쓴 것 같은 서찰 한 통이 나왔다.
[혹시라도 나를 발견한 후인에게 전한다.
이 모든 사태는 내 지나친 욕망 때문이었다.
나는 유라궁의 이십칠 대 궁주 사라연빙이다.]
[나는 유라궁의 이대 절기인 ‘유라수’와 ‘빙혼칠검’을 대성하기 위해 세상에서 가장 음기가 강한 장소를 무리하게 찾아 헤매다 그만 실족하여 이곳 한빙열천으로 떨어져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나는 이곳에 천빙열화과가 있다는 걸 알고 뛸 듯이 기뻤으나 그건 나와는 인연이 없다는 걸 알고는 크게 절망했다.
천빙열화과는 백 년에 한 번 딱 세 알만 열리는 설산의 귀물로 무림인이 복용하면 단번에 일 갑자 이상의 내공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천빙열화과가 비록 천고의 보물이기는 하나 지금으로부터 오십 년 후에나 열매를 맺을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천빙열화과는 음기와 양기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음양과라서 나에게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오히려 나는 천빙열화과보다는 수백 년 이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 백무기의 내단이 더 탐이 났다.
백무기의 내단은 세상 음기의 결정체로서 복용하기만 하면 빙하기를 바탕으로 한 ‘유라수’와 ‘빙혼검‘을 대성하는데 최고의 보물이다.]
[천빙열화과를 얻으려면 부디 조심해야만 한다.
거의 십성의 ‘유라수’와 ‘빙혼검’을 익힌 내가 제대로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번번이 그 백무기에게 패퇴하고 말았다.]
[머리에 살짝 뿔이 돋은 걸로 봐서 천빙열화과를 수호하는 그 백무기는 이미 오백 년은 더 묵은 것 같다.
그 정도의 세월을 산 백무기의 몸에 있는 것은 모든 것이 천고의 보물이다.]
[그놈의 내단은 말할 필요도 없는 천고의 보물이고, 그 껍질로 옷을 해 입으면 어지간한 도검으로는 상처조차 나지 않으며, 그놈의 하얀 혀로 채찍을 만들면 휘두를 때마다 절대 냉기가 발출되는 천하에 둘도 없는 훌륭한 무기가 된다.]
[그놈의 유일한 약점은 턱에서 석 자 정도 아래에 있는 푸르스름한 역린이다.
그곳이 그놈의 유일한 조문이다.
하지만 충분한 자신감이 없으면 아예 시도조차 하지 마라.]
[그래도 꼭 백무기의 내단을 얻겠다면, 싸울 때 그놈의 꼬리와 혀를 특히 조심해야 한다.
괴물의 꼬리는 집체만한 얼음덩이를 단번에 가루로 박살내고, 혀는 어지간한 명검보다 더 예리해 살짝 스치기만 해도 팔다리가 그대로 잘려 나간다.]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이곳을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마지막 연못인 세 번째 연못에서 물이 빠져나가는 구멍을 통해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것뿐인 것 같다.
하지만 그 높이를 측정조차 할 수 없다.]
[그래서 함부로 그곳에서 뛰어내리라고 차마 권할 수가 없다.
나로서도 엄두가 나지 않아 감히 감행하지 못한 것을 어떻게 후인에게 함부로 시도하라고 할 수 있겠는가.]
[후인이여, 만약 천행으로 이곳을 벗어나게 된다면 부디 설산의 유라궁에 둘러 내 소식을 내 딸에게 전해 주길 바란다.
그리고 빙혼검과 유라수 그리고 빙혼검결도 전해 주기를 갈망한다.
혹시라도 노파심에서 하는 소리지만 여인이라면 모를까 남자라면 절대로 유라수와 빙혼검결을 익히지 마라.
두 무공이 비록 절세적인 절기이기는 하지만 남자가 익히면 남성성을 상실하고 만다.]
[다만 빙하기는 익혀두면 꽤 효용이 있을 것이다.
무공초식으로서는 빙하기를 사용할 수는 없지만, 양강의 무공에 의해 입은 내상을 치료하는 데는 탁월한 효용이 있다.
후인이여 명심하라.
그리고 나의 유훈이라고 전하면 유라궁에서 후인의 한 가지 소원을 반드시 들어줄 것이다.
―유라궁 제 이십칠 대 궁주 사라영빙―]
청운은 [유라수]와 [빙혼검결]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과연 그것은 절세의 신공이었지만 그녀의 말대로 남자가 익히면 덕보다 오히려 실이 많은 무공이었다.
굳이 익히려면 먼저 자기 남성부터 제거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대성할 수 있었다.
다만 빙혼칠검의 초식은 참고할 가치가 있었다.
그 초식들 모두가 극도로 섬세하면서도 변화무쌍해서 힘을 바탕으로 한 자신의 검초을 보완하는 데는 다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청운은 옆에 놓여 있던 빙혼검을 집어 들고는 한 번 쓱 뽑아 보았다.
검은 뽑히자마자 대단히 날카로운 예기를 사방에 뿜어댔다.
검날은 도대체 무슨 재질로 만들어졌는지 거의 우윳빛에 가까웠다.
빙혼검은 보통의 검보다 검폭이 조금 더 좁고 검날도 조금 더 얇았다.
하지만 그 예기는 훨씬 더 예리하고 날카로웠다.
손톱으로 검날을 툭 퉁기자 마치 얼후의 현을 튕기는 듯한 청아한 검명이 사방에 메아리쳤다.
청운은 유라수의 서두에 적힌 ‘빙하기’만을 암기하고는 비급과 빙혼검을 내려놓았다.
청운은 벌떡 일어나 천빙열화과와 백무기가 도사리고 있는 연못으로 향했다.
저곳에 백무기가 똬리를 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연못의 하얀 색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 백색은 순수의 흰색이 아니라 사이하고 요사한 공포의 색으로 보였다.
청운은 안력을 최대한 돋우어 연못의 바닥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있었다.
틀림없었다.
깊숙한 백색의 바닥에 바닥보다 더 하얀 물체가 마치 죽은 듯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 몸체의 윤곽이 하얀 물색과 거의 경계 없이 섞여들어 보이다가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다가 보이기도 했다.
아무 생각 없이 천빙열화과에만 눈이 팔려 무작정 연못에 들어갔다가는 자칫 저 괴물의 밥이 될 뻔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자 청운은 갑자기 모골이 송연해지고 오금이 저려 왔다.
청운은 주먹의 서너 배 정도 크기의 얼음을 하나 집어 들었다.
청운은 놈이 도사리고 있는 곳을 향해 얼음을 힘껏 던졌다.
얼음이 채 물에 닿기도 전에 연못의 수면이 소용돌이치더니.
마치 현 세계에 갑자기 이계의 풍경이 틈입하듯 놈의 허연 대가리가 물 밖으로 솟구쳐 올랐다.
머리 길이만도 거의 일 장 정도에 달했다.
붉은 눈은 백야에 치는 번갯불 같았다.
쉭쉭거리며 두 갈래로 날름거리는 하얀 혀는 저승의 안개로 만든 채찍 같았다.
혀의 길이가 이삼 장은 족히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