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6화 운명의 메아리는 다시 내 이름을 부르고 (3)
오직 사라유리만이 홀로 사내 몇을 눈바닥에 거꾸러뜨리며 분전하고 있었다.
자신의 부하 중 몇몇이 사라유리의 날카로운 공격에 맥없이 당하는 걸 보고 있던 파륵미찰의 얼굴이 분노와 수치로 붉그락푸르락 해졌다.
참다못한 파륵미찰이 장내로 뛰어들며 고함을 질렀다.
“이런 병X 머저리 같은 놈들, 그깟 암고양이 같은 년 하나를 당하지 못해 땅바닥에 나뒹굴어. 그동안 처먹은 밥이 아깝다. 밥이 아까워. 저리 비껴라. 이 밥버러지 같은 종자들.”
파륵미찰이 듣기에도 민망한 지저분한 욕지기를 내지르며 자신의 커다란 기형검을 빼 들고 장내로 뛰어들었다.
곧바로 파륵미찰은 자신이 받은 치욕과 분노를 만회하기라도 하듯 기형검을 사납게 휘두르며 사라유리를 짓쳐 갔다.
파륵미찰의 기형검에서 뿜어져 나온 강맹한 검기가 장내의 허공을 번쩍번쩍 가르며 사라유리의 가냘픈 전신 요혈을 휩쓸어 갔다.
파륵미찰의 난폭한 공세에 대경실색한 사라유리가 다른 사내를 공격하던 검의 방향을 다급히 바꿔 파륵미찰이 쳐낸 검기를 간신히 막아냈다.
퍼—버—퍼—버—엉.
엄청난 폭음이 장내의 공기를 뒤흔들었다.
사라유리는 그 충격에 못 이겨 신형을 비틀거리며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그 폭음의 여파로 주변의 눈들이 눈사태가 일어난 듯 계곡 아래로 뭉텅뭉텅 쏟아져 내렸다.
파륵미찰은 숨 돌릴 틈을 주지 않고 사라유리를 계속 밀어붙였다.
“이년, 대마라검법의 무서움을 이제 조금 알겠느냐. 조금만 기다려라. 몇 초 안에 네년을 무릎 꿇려 마라성으로 끌고 갈 테니까.”
바로 그때였다.
얼음보다 더 차가운 한 여인의 목소리가 장내의 분위기를 압도했다.
“누구 맘대로 내 딸을 마라궁으로 끌고 가. 끌고 가기를. 내 눈에 흙이 들어가지 전에는 절대 그런 일은 없다.”
그 말과 동시에 허공에서 마치 커다란 눈송이가 날리듯 유라궁주가 사뿐하게 장내로 날아들었다.
그녀가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러자 놀라운 광경이 허공에 펼쳐졌다.
그녀가 치켜든 손 주변의 대기가 서서히 투명하게 변하더니 최종에는 그녀의 손마저 반투명하게 변해 버렸다.
손바닥 뒤의 풍경이 언뜻언뜻 내비쳤다.
그때 사내들 무리 뒤에 처져서 장내의 싸움을 강 건너 불구경하던 흑의의 사내 중 하나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칠성의 유라수라. 조금 힘이 들게 생겼군. 하지만 그것도 네년의 내공이 온전할 때 얘기이지. 내가 알기로 네년은 비급도 없이 유라수의 하편을 무리하게 연공하다 주화입마에 빠졌다던데. 이제야 간신히 회복한 모양이구나.”
사내의 빈정거리는 말에 안 그래도 하얀 궁주의 낯빛이 핏기 하나 없는 백납처럼 더 하얗게 표변했다.
“하지만 한 번 주화입마에 빠진 경험이 있는 몸은 그 무공를 대성하기 전까지는 무리하게 내공을 사용하면 다시 내상이 도지게 되어 있지.”
적에게 자신의 내심을 간파 당했다는 생각에 그녀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녀는 아차 싶었는지 금세 본래의 안색을 회복했다.
그녀는 바로 유라궁주였다.
그 집단이 어떤 성격의 집단이든지 간에 한 집단을 이끌어 가는 수장에게는 역시 뭔가 남다른 점이 있었다.
순식간에 자신의 본래 평정심을 되찾은 궁주가 마치 얼음을 갈아 날리는 것 같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내가 이 자리에서 죽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유라궁과 내 딸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다. 먼저 죽고 싶은 놈부터 덤벼라. 내가 순서대로 네놈들 전부를 차례차례 얼음 가루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용기가 있으면 지금 당장 시험해 봐도 좋다.”
사라유리와 유리궁의 궁도들은 궁주의 등등한 기세에 한편으로는 든든함을 내비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궁주님, 절대 유라수를 사용하시면 안 됩니다.”
사라유리의 외침에 맞추어 마치 떼창을 하듯 ‘안 됩니다. 안 됩니다. 안 됩니다.’ 하는 소리가 유라궁 궁도들의 입에서 연이어 쏟아져 나왔다.
“저희가 저들을 막겠습니다. 궁주님은 뒤로 물러나 계십시오. 부디 옥체를 소중히 하십시오.”
사라유리를 비롯한 유라궁 궁도들이 궁주의 앞을 속속 막아서며 전면으로 나섰다.
그때 다시 궁주가 딸과 제자들을 옆으로 밀치며 앞으로 나섰다.
“마라이검. 아니 과거에는 화산이검이었지. 살인과 강간을 저지르고 문파의 징계가 두려운 나머지 이곳 설산까지 도망쳐서는 마라성에 빌붙어 호위호식하며 살고 있는 인간 말종들.”
그녀는 말을 이어 갔다.
“그것도 모자라 화산에서 엄격히 금하는 화산겁법을 제멋대로 변형해 마라검법이라는 요상한 이름을 갖다 붙이고서는 저런 무식한 야인들에게 가르쳤지.”
“…….”
“나는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있었다. 네놈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악독한 놈들인지. 자 여기서 모든 끝장을 보자. 마라이검, 아니 화산이검. 망설이지 말고 들어오너라. 오늘 본 궁주가 화산파 장문인을 대신해 네놈들을 징치하겠다.”
유라궁주로부터 난데없이 한 바가지 욕을 얻어먹은 화산이검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인상을 있는 대로 일그러뜨리며 자신의 검을 빼 들었다.
그들은 궁주를 핍박하듯이 자신의 검으로 궁주의 가슴을 겨누며 궁주에게 다가갔다.
바로 그 순간 분기를 참지 못한 유라궁의 몇몇 궁도가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픽, 하고 비웃음을 내뱉은 왼쪽의 사내가 자신들을 향해 달려드는 몇몇 궁도를 향해서 벼락같이 사나운 일 검을 내질렀다.
그자의 검 끝에서 피어난 무수한 눈꽃 송이가 그대로 자신을 향해 달려들던 궁도들에게 화살처럼 쏘아져 갔다.
화산이검.
아니, 대라이검의 검에서는 일순간 매화 대신에 설산의 눈꽃이 만개했다.
그 무수한 눈꽃송이는 바로 화산이검이 매화검법을 임의로 변형한 것이었다.
“으악.”
“으으악.”
순식간에 유라궁도 두 사람이 화산이검의 검기 아래 즉사를 하고 다른 두 궁도들도 어깨와 옆구리에 심한 중상을 입은 채 눈밭을 나뒹굴었다.
그 참혹한 광경을 목도한 궁주가 얼음이 깨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일성을 내지르며 대라이검을 향해 유라수를 출수했다.
얼음의 영혼처럼 반투명한 손이 당장이라도 대라이검을 짓이길 듯이 그들의 전신 요혈을 덮쳐 갔다.
유라궁주의 갑작스러운 출수에 대경실색한 대라이검은 궁도들을 공격했던 검을 곧바로 회수해 궁주의 유라수를 맞받아쳤다.
궁주의 유라수와 대라이검의 눈꽃 송이가 허공에서 격돌했다.
카—카—까—캉.
두 줄기 은빛 검기와 반투명한 장력이 맞부닥친 허공에는 때 아닌 번갯불이 번쩍번쩍 일었다.
대라이검이 떨쳐낸 무수한 눈꽃 송이가 궁주의 전신 요혈에 쏘아지자, 있는 듯 없는 듯 허공에 떠 있던 궁주의 반투명한 양손에서도 얼음의 차가운 눈빛 같은 장력이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대라이검의 눈꽃 송이들이 꽃잎이 지듯 우수수 땅바닥에 떨어뜨렸다.
차—차—차—창.
마치 금속과 금속이 맹렬하게 부딪치는 새된 소리가 연거푸 장내의 대기에 쩡쩡 울렸다.
곧이어 그 충돌의 엄청난 후폭풍이 장내를 휩쓸었다.
무공이 약한 주변의 사내들과 궁도들은 그 여파에 떠밀려 뒤로 주르르 밀려나며 몸을 가누지 못했다.
천지사방에 눈사태가 일어난 듯 주변의 무수한 눈 덩어리들이 한꺼번에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가 쿵, 쿵, 쿵 끝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허공에 자욱하게 치솟았던 눈과 눈덩어리들이 차츰 가라앉자 세 사람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마라이검, 아니 화산이검은 입가에 가느다란 한줄기 핏줄기를 머금은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화산이검과 마주선 유라궁 궁주는 울컥울컥 피를 토했다.
그녀의 앞가슴은 그녀 자신이 토해 낸 피로 온통 시뻘겋게 젖어 버렸다.
그녀는 한참을 꼼짝하지 않은 채 제자리에 서서 화산이검의 얼굴을 꿰뚫어버릴 듯 노려보았다.
그러다 그 자세 그대로 그녀는 갑자기 제자리에 푹 꼬꾸라지고 말았다.
그동안 내공으로 간신히 억눌러 놓았던 주화입마가 과다한 내력의 사용과 격돌의 충격으로 다시 도진 것 같았다.
“궁주님!”
사라유리와 궁도들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다급하게 바닥에 쓰러진 궁주에게 달려갔다.
사라유리가 빙영과 빙아에게 소리쳤다.
“빨리 궁주님을 빙혼대로 모셔라. 어서 서둘러라. 이제부터 이곳은 내가 책임지겠다.”
사라유리는 자신의 검을 단단히 다시 고쳐 쥐고는 화산이검을 향해 분노의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다른 궁도들이 소리치며 사라유리를 말리고 나섰다.
“소궁주님, 이건 자살행위예요. 침착하세요. 우리 모두 힘을 합쳐야 합니다. 유라합벽진을 펼쳐야 합니다.”
“저들이 아무리 무식하고 덜떨어진 야인들이라고 해도 우리가 진을 온전히 펼치도록 가만히 보고만 있겠느냐. 지금은 이미 때가 늦었다. 내가 저들을 요절낼 테니 너희들은 궁주님의 안위나 잘 살펴라.”
자신이 뱉은 말을 채 다 마치기도 전에 사라유리는 화산이검을 향해 분기에 가득 찬 검기를 발출했다.
바로 그 순간 파륵미찰이 만면에 능글맞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기형검으로 화산이검에게 발출된 사라유리의 검기를 손쉽게 와해시키며 사라유리를 막아섰다.
“네년의 상대는 네년의 남자인 바로 나다. 오늘 이 서방님의 무위가 어느 정도인지 단단히 견식을 시켜주마. 잘 봐둬라. 이것이 바로 장차 네 남편이 될 남자의 검법이다.”
“미친놈! 네놈은 미쳐도 어떻게 그따위로 미치느냐. 그런 미친 개소리는 마라성에 있는 네놈 마누라에게나 해라. 죽기 싫거든 내 검이나 잘 막아라.”
사라유리는 표독스럽게 파륵미찰을 쏘아붙이며 전력으로 검기를 발출했다.
차—차—차—차—앙.
두 사람의 검기가 서로의 요혈 앞에서 마주칠 때마다 날카로운 금속음이 장내에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몇 십 합의 칼부림이 지나자 점차 사라유리가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그때 파륵미찰과의 대결에서 점차 밀리는 사라유리를 도우기 위해 유라궁 궁도들 수십 명이 한꺼번에 둘의 싸움에 끼어들었다.
동시에 마라성의 야인들도 모두 싸움판에 뛰어들었다.
두 무리 간의 싸움은 말 그대로 패싸움처럼 되고 말았다.
장내의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외마디 비명과 신음이 얼음이 깨어지듯 터져 나왔다.
청운은 한참 동안 창밖에서 벌어지는 유라궁과 마라성의 싸움을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무심하게 창문 너머로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험상궂은 사내들이 일방적으로 가녀린 여자들을 몰아붙이는 광경을 바라보던 청운의 얼굴이 급작스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청운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힘센 사람은 약한 사람을 보호해야지 괴롭히면 안 되는데. 그건 정말 나쁜 짓이다.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자들을 당장 여기서 몰아내야 한다.”
청운은 자신의 방 한쪽 구석에 비스듬히 세워 두었던 무영검을 왼손에 움켜쥐고는 나쁜 놈들이 약한 여자들을 괴롭히는 현장으로 다급히 뛰어나갔다.
장내에 도달한 청운은 파륵미찰을 비롯한 마라성의 사내들을 향해 큰 일성를 질렀다.
“나쁜 놈들은 더 이상 약한 여자들을 괴롭히지 말고 빨리 이곳을 떠나라.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내가 크게 혼내주겠다. 나는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나쁜 사람을 싫어한다.”
청운의 느닷없는 등장에 사라유리와 유라궁도들 뿐 아니라 파륵미찰과 마라성의 야인들도 깜짝 놀랐다.
그들이 대경실색한 까닭은 공력이 실린 청운의 목소리가 자신들의 고막을 찢어버릴 듯이 웅후했기 때문이었다.
“오라, 네년이 유라궁에 남자를 숨겨두고 있었구나. 그래서 나를 그렇게 거부했구나. 앙큼한 불여우 같은 년. 못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하더니, 네년이 딱 그짝이구나.”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청운을 바라보던 파륵미찰이 사라유리를 향해 돌아보며 분기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내 오늘 너희 두 연놈을 동시에 제삿날로 만들어 주마. 그동안 나를 이렇게 철저하게 속이다니. 내가 바보였구나. 내가 바보천치였어.”
청운의 등장에 질투로 눈이 뒤집힐 대로 뒤집힌 파륵미찰이 전후 사정도 따져보지 않고 다짜고짜 청운과 사라유리를 공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