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4화 운명의 메아리는 다시 내 이름을 부르고 (1)
색이란 색은 모두 휘발되고 남은 단 하나의 색.
흰색.
계곡도, 능선도, 봉우리도 그 높낮이만 다를 뿐 모두 똑같은 흰색이다.
세상의 의미란 의미는 모두 지워 버린 무의미 같은 하얀 시공간.
무의미의 풍요로움만 가득한 이 순수한 백색의 공간은 누군가의 불온한 생각만으로도 금세 오염될 것처럼 불안하고 불안하다.
이 순수의 공간에도 누가 살고 있는지 펑펑 쏟아지던 눈이 잠시 그친 사이로 희미하게 찍힌 사람의 발자국이 보인다.
그 발자국은 작은 바람의 살랑임도 견디지 못하고 연신 눈 덩어리를 계곡 아래로 뭉텅뭉텅 쏟아내며 흔들거리는 출렁다리로 끊어진 듯 이어져 있다.
그 출렁다리는 맞은편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간신히 이어져 있었다.
절벽이 움푹 파여 휘도는 뒤편에 마치 눈 같은 흰 대리석 궁전이 자리하고 있다.
출렁다리는 계곡을 건너 그 대리석 궁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대리석 궁전은 눈보다 더 하얀색이어서 얼핏 보면 눈을 켜켜이 쌓아 올려 커다란 검으로 싹둑 잘라 놓은 것 같았다.
하얀 대리석 건물 안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내실.
사십대 중후반의 여인이 설표의 가죽이 멋들어지게 깔린 침대에 반쯤 걸터앉아 있다.
그녀는 피부가 눈처럼 희고 중원인보다 훨씬 조그마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또렷한 미인이다.
특히 그녀의 큰 눈은 마치 구름 하나 없는 푸르디푸른 하늘이 그대로 내려와 고인 듯 맑고 푸르다.
그녀가 눈을 뜨고 감을 때마다 푸른 하늘이 눈보다 더 흰 얼굴에 출렁거리는 것 같다.
그녀는 지금 온통 물기에 젖어 얼룩이 번질 대로 번진 서찰을 섬섬옥수를 떨며 간신히 읽고 있다.
무슨 사연인지 한 번에 다 읽지도 못하고 한 문장을 읽을 때마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다 바닥을 바라보곤 한다.
수시로 깊은 한숨을 내쉰다.
이미 여러 번을 거듭해서 읽었음에도 읽을 때마다 만감이 교차하는 듯했다.
그때마다 그녀의 표정이 설산에 쌓이는 폭설의 기기묘묘한 형상만큼이나 수시로 복잡하게 바뀌곤 한다.
그녀가 내쉬는 한숨은 그 폭설을 천지사방에 흩트려 날리게 하는 설산의 차디찬 바람보다 더 차가운 것 같다.
[나는 그때 이후로 당신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소. 당신만 허락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당신에게 달려가 당신과 같이 남은 인생을 살고 싶소. 이제 당신이 유라궁의 궁주이니 유라궁의 그 이상한 법을 뜯어고칠 수도 있지 않소. 나는 평생 그날만을 기다리고 있소.
—장하천]
그녀가 읽던 편지를 가만히 화장대에 올려놓는다.
그리곤 뭔가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더니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그 젊은 공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왜 그이의 편지를 그가 갖고 있는가. 왜 하필 그이가 떨어진 망혼단애에서 떨어져 그때의 그이처럼 사경을 헤맨단 말인가. 이렇게 공교로울 수도 있는가. 이십 년을 건너뛰어 똑같은 일이 판에 박은 듯 똑같이 반복되다니.”
그녀는 옛 생각에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그 공자가 깨어나야 무슨 일인지 물어보든지 말든지 하지. 도대체 얼마나 지독한 충격을 받았기에 어지간한 상처는 단 며칠이면 다 치료되는 유라궁의 신외지보인 빙혼대에 구십일을 넘게 누워 있어도 의식을 찾지 못한단 말인가.”
아무도 없는 공허한 내실에서 그녀는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백일이 넘어가면 빙혼대의 묘용도 무용지물인데. 그 공자가 빨리 깨어나야 이 궁금증을 알아볼 수 있을 텐데.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다시 한숨을 한 번 길게 내쉰 그녀가 계속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미 석 달이 더 지나 이제 채 열흘도 남지 않았는데. 그가 그때까지 못 깨어나면 그것 또한 운명이겠지. 내 바람이 하늘의 의지를 뒤바꿀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하얀 도자기 같은 그녀의 얼굴에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복잡한 수심이 가득하다.
돌연 자신이 걸터앉은 침대 바로 위에 늘어뜨려져 있는 세 개의 매듭 중에 붉은 매듭을 골라 서너 번 아래로 힘껏 잡아당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밖에서 앳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궁주님, 빙영입니다.”
“들어오너라.”
빙영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내실로 들어오며 가볍게 목례를 하자, 그녀가 빙영의 얼굴을 흘깃 쳐다보며 물었다.
“그래, 그 사람은 깨어났느냐.”
빙영은 그가 아직 깨어나지 못한 것이 마치 자기 잘못 때문이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녀에게 연신 난감해하는 어색한 표정을 짓는다.
빙영은 거의 기어들어가는 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한다.
“저… 아직 그대로입니다. 궁주님.”
궁주는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 몹시 안타깝고 지겨운지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빙영에게 살짝 짜증을 내듯 말했다.
“유리는 지금 어디 있느냐.”
빙영이 아까보다 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분을 지키겠다고 거기 있습니다.”
궁주가 잔뜩 짜증난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또 그 사람에게 갔다고. 내가 무슨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르니 절대로 너무 가까이 가지 말라고 그렇게 일렀거늘, 또 그 사람 곁에 있다니. 누구를 닮아 그렇게 고집이 센지 알다가도 모르겠구나.”
“…….”
“빙혼대는 사람을 치유하는 기능은 탁월하지만 치료가 끝나고 환자가 깨어나는 바로 그 순간만큼은 환자의 혼이 육체를 벗어났다가 막 돌아온 상태이기에 무슨 사태가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는데 왜 자꾸 유리는 거기에 간단 말인가.”
“죄송합니다.”
“알았다. 빙하는 그만 나가보도록 해라. 무슨 일이 있으면 즉시 나에게 알리거라.”
투명한 붉은 색이 감도는 얼음 위에 중요 부위만 간신히 흰 천으로 덮은 한 청년이 나체로 누워 있다.
넓은 이마에 우뚝한 콧날, 끌과 정으로 깎아 놓은 것 같은 단단한 근육질의 상체와 말의 다리처럼 매끈하면서도 잘 단련된 하체.
비록 몸 여기저기 칼날에 베이고 장력에 맞은 상흔이 옥의 티처럼 흉해 보이지만 감고 있는 눈만 번쩍 뜨면 상당히 호감형의 미남일 것 같다.
그는 바로 모용후의 천녀혈수에 직격당해 망혼단애 아래로 떨어진 청운이다.
청운의 옆에는 설표의 털을 뽑아서 만든 것 같은 하얀 백의의 털옷을 입은 이국적인 미모의 아가씨가 앉아 있다.
그녀가 앉아 있는 의지는 백곰의 가죽이 덧씌워져 있다.
그녀는 의자에 감싸지듯 다소곳이 앉아서 반나체 청년의 상태를 유심히 살피고 있다.
이제 갓 스물이나 됐을까 말까 한 그녀의 얼굴은 궁주를 쏙 빼닮았다.
다만 궁주보다 훨씬 더 어려 보였다.
궁주가 중후하고 완숙된 미인의 전형이라면 그녀는 궁주보다 더 깜찍하고 발랄해 보이는 미인이었다.
그녀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청운의 곳곳을 골똘히 바라보고 있다.
청운의 벗은 몸을 그대로 자신의 눈에 넣기라도 할 듯이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남자는 이렇게 생겼구나. 여자처럼 부드럽고 섬세하지는 않지만 무쇠처럼 단단하고 강인해 보이는 몸을 가지고 있구나. 그리고 천에 덮인 저곳은 여자와는 완전히 다르게 생겼…….”
그녀는 간간이 청운의 얼굴을 섬섬옥수로 어루만지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린다.
“어쨌든 빨리 깨어나야 할 텐데. 이제 삼 일만 더 지나면 백일이 되는데. 그러면 빙혼대도 더 이상 이 사람의 혼을 몸에 붙들고 있지 못하는데. 그전에 제발 깨어나야 하는데. 큰일이네.”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녀가 이번에는 백옥같이 흰 섬섬옥수로 그의 가슴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눈을 번쩍 뜬 청운이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우고는 다짜고짜 그녀의 팔을 잡아당기며 그녀를 자신의 가슴에 끌어안았다.
기겁을 한 그녀가 청운을 떼어내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청운의 가슴에 일장을 쳐냈다.
하지만 청운은 아랑곳하지 않고 더 거세게 한쪽 팔로 그녀를 안은 채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옷을 모두 벗겨 버렸다.
한차례의 뜨거운 폭풍이 일었다 가라앉은 얼음 방에서 그녀가 주섬주섬 옷매무새를 고치고 있다.
그녀는 아예 혼이 반쯤 나간 듯 멍한 상태였다.
한동안 정신줄을 놓고 있던 그녀는 서둘러 빙혼대 위에 묻은 자신의 피를 닦아냈다.
그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러 버린 청운은 또다시 의식을 놓아 버린 채 빙혼대 위에 죽은 듯 누워 있었다.
한동안 혼이 나가 있던 그녀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는 청운을 조금 전 상태로 되돌려 눕혔다.
그녀는 조금 전 청운을 덮었던 보료로 청운의 몸을 구석구석 닦은 후 다시 다른 깨끗한 보료를 가져와 덮어 주었다.
그녀는 갑자기 자신의 가슴 한쪽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말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비애를 느꼈다.
그 감정은 자신의 의지와 아무 상관없이 한순간 돌발적인 사태로 잃어버린 여자의 상실감 같은 것이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식으로 잠시 깨어났다가 그녀를 의식하지도 못한 채 다시 의식을 놓아버린 무정한 사내에 대한 원망과 안타까움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는 만감이 뒤섞인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을 빙혼대 위에 떨어뜨리며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혼잣말을 청승맞게 읊조렸다.
“이제 내가 당신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발 깨어나기라도 해야 뭔가 말을 할 텐데. 이렇게 의식을 놓고 있으니 내가 당신을 정녕 어찌해야 한단 말입니까. 나는 나를 또 어찌하고요. 제발, 벌떡 일어나 말씀 좀 해보세요. 아무 말이라도 좋으니, 제발!”
그녀는 도저히 이런 혼란한 마음 상태로는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바로 그때 등 뒤에서 청운의 나직한 신음이 들렸다.
깜짝 놀란 그녀가 다시 청운을 향해 몸을 돌리자 청운이 눈을 뜬 채 상체를 천천히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그녀는 그를 덮고 있는 보료가 더 이상 아래로 흘러내리지 못하게 청운의 허리에 대충 묶어 주고는 청운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소협. 아니, 당신,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구십칠일 만에 마침내 깨어났군요. 당신은 누군가요. 어쩌다가 망혼단애에서 그렇게 떨어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