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3화 모든 상황이 점점 더 절망적으로 치닫는
청운은 자신의 몸속에 한 줌의 진력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고 느꼈다.
청운은 마치 자신의 몸속이 어떤 독한 벌레에게 다 갉아 먹힌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청운은 자신의 품속에서 몇 개의 약병을 꺼낸 후.
먼저 금창약을 오른손 손가락에 듬뿍 묻혀 그자의 젓가락에 꿰뚫려 서서히 썩어 들어가는 어깨와 허벅지의 상처에 발랐다.
곧바로 청운은 몇 알 남지 않은 내상을 다스리는 약을 병째 입에 틀어넣었다.
내상을 다스리는 마지막 환약이었다.
청운은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치우전륜결을 운용했다.
몇 식경에 걸쳐 몇 번의 대주천을 해도 내상은 쉽게 다스려지지 않았다.
얼마나 악독한 장법인지 치우전륜결을 운용할 때만 조금 차도를 보이던 내상은 치우천륜결의 운용을 중단하자마자 곧바로 다시 또 도졌다.
다른 방도를 찾아야 한다고 청운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새하얀 눈만 가득한 낯설고 낯선 산속이었다.
다른 방안을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눈에 덮여 그 어디에도 약초 한 뿌리 찾을 수조차 없었다.
모든 상황이 점점 더 절망적으로 치닫는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이 눈만 가득한 오지 중의 오지에서 청운이 지금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치우전륜결을 운용한 것밖에 다른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운용을 중단할 때마다 마치 불에 달군 쇠 인두로 지지는 듯한 극심한 통증 때문이라도 청운은 치우전륜결을 계속 운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정말 끝인가 하고 청운은 생각했다.
아는 사람이라고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아니 인적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이름도 모르고, 대체 어딘지도 모르는 이 막막한 눈밖에 없는 산속에서 자신이 생을 진짜로 마쳐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자니.
청운은 고통과 슬픔이 아니라 오히려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청운의 그 헛웃음은 마치 생의 의지를 포기해 버린 체념처럼 한없이 서글프고 신산했다.
‘한 사람의 소중한 인생이 정말 이리 허무하고 헛되이 끝나도 되는가 싶구나.’
청운은 현재 자신이 처한 절박한 상황도 잊은 채 삶에 대한 깊은 회한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근처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우르르 달려오는 사람의 발자국소리였다.
‘그자들이구나.’
청운은 그렇게 생각했다.
정말 지긋지긋하다고 청운은 몸서리를 쳤다.
곧 누군가 소리치는 소리도 들렸다.
“여기 핏자국이 있다. 그놈이 이 근처 바위틈에 숨어 있는 것이 틀림없다. 물 샐 틈 없이 주변을 겹겹이 포위고 불을 지필 기름과 유황을 준비하라.”
청운은 깊고 깊은 절망감을 뼈저리게 느끼고 또 느꼈다.
정말 지독하고도 지긋지긋한 놈들이었다.
언제 어디서 죽으나 똑같은 것, 여기서 죽는다고 더 이상할 것 하나도 없지 않은가 하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주섬주섬 자신의 옷매무새를 고쳐 입었다.
청운은 무영검을 오른손에 꼬나쥐고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족히 백여 명 이상이 되어 보이는 자들이 청운이 은신하고 있던 바위를 몇 겹으로 포위하고 있었다.
그자들은 모두 가죽으로 만든 갑옷 비슷한 옷을 입고 머리에도 투구 비슷한 걸 쓰고 있었다.
그리고 손에는 창도 아니고 칼도 아닌 이상한 기형 무기를 들고 있었다.
‘저런 복장과 무기는 전쟁터에서나 하는 것인데.’
청운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리의 모두가 검은 갑옷을 입고 투구를 썼다.
무리의 앞에 선 자만 붉은 갑옷과 붉은 투구를 쓰고 있었다.
그자가 저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 같았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의 얼굴이 어딘지 낯이 익은 듯했다.
그자가 먼저 청운에게 이죽거리며 말했다.
“결국 원수는 이런 식으로 만나는군. 하필 네놈이 내가 이끌고 있는 교룡조에게 걸리다니. 강청운, 아니 강 서기, 나를 알아보겠나. 어떤 식으로든 한 번은 만날 줄 알았는데 이런 설산에서 맞닥뜨리다니.”
‘어디서 봤더라.’
“내가 운이 아주 좋은 것인지 아니면 네놈이 지독히도 운이 없는 것인지. 어떤 기연을 만나 그 짧은 기간에 그렇게 고수가 되었는지는 몰라도 오늘이 네놈의 행운이 끝나는 날이다. 그건 틀림없다. 내가 그렇게 한다.”
“…….”
“그날의 수모를 이렇게라도 갚을 수 있어 천만다행이로군. 그래 여기서 우리의 악연을 끝내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겠군. 천지사방 아무도 없는 이런 설산에서의 죽음이 오히려 낭만적이기도 하겠지. 네놈은 복도 많군.”
그자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자네의 시체는 이 눈 때문에 섞지도 않고 그대로 영원히 보존되겠군. 네놈이 죽으면 그 도도한 남궁영봉도 분명 한 풀 기가 꺽이겠지. 네놈만 죽으면 내가 그년을 차지할 기회가 틀림없이 올 것이다. 자, 이만 가거라. 애들아! 쳐라!”
아!
무리의 우두머리는 바로 모용후였다.
남궁세가에서 자신이 먼저 시비를 걸어 사람을 핍박해 놓고도 그는 자신이 수모를 당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청운은 저자와의 악연이 참 모질고 질기다고 생각했다.
근데 왜 저자가 여기에 있는 것일까.
그래도 모용세가는 무림에서 알아주는 명문세가인데.
‘이게 도대체 무슨 경우란 말인가.’
청운이 잠시 생각하는 찰나에 검은 갑옷을 입은 사내들이 착—착—착—착 열과 대오를 맞추어 청운을 조곤조곤 압박해 왔다.
평소 같았으면 저들은 청운의 한주먹거리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파황군이라 불리는 자의 천녀혈수에 적중되어 거의 내공이 고갈된 지금의 청운에게는 저런 자들조차 너무 힘들고 버거웠다.
청운은 흑의의 갑옷을 입은 자들의 몇 번에 걸친 공격을 젖 먹던 힘까지 짜내며 간신히 막아냈다.
그러나 그자들의 체계적인 공격에 청운은 계속해서 신형을 휘청거리며 뒤로 주춤주춤 밀려났다.
그런데 그들의 갑옷이 대체 무슨 재질로 만들어졌는지 청운의 제법 강한 검기에도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지금 청운의 기력이 아무리 간당거릴지라도 청운의 검기는 여전히 어지간한 바위를 두부처럼 잘라 버릴 수 있는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자들은 바로 자신이 입고 있는 그 갑옷을 단단히 믿고 있는지 아예 수비를 도외시한 채 청운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청운은 그들의 체계적이고 절제된 공격에 점점 더 까마득한 벼랑 쪽으로 밀려났다.
저들은 한 조가 한참을 공격하고 나면 뒤에서 대기하던 다른 조가 다시 앞으로 나서며 청운을 공격했다.
세 갈래의 창끝이 제각각 다른 방향으로 휘어진 그들의 무기 또한 너무도 특이해서 청운은 그자들의 다음 공격을 전혀 가늠할 수 없었다.
그자들의 공격은 마치 창법을 이용한 차륜전 같았다.
그자들의 집요한 공세에 청운은 점점 자신의 기력이 소진되는 걸 느꼈다.
그리고 이미 여러 군데 심각한 자상도 입었다.
게다가 간신이 금창약을 발라 지혈해 놓았던 어깨와 허벅지의 상처가 다시 터져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청운이 발을 내디디는 곳마다 새하얀 눈 위에 때 아닌 혈화가 무수히 피어났다.
또한 청운이 거의 바닥이 난 내공을 계속해서 무리하게 끌어올리자 안 그래도 심각했던 내상이 다시 또 도졌다.
아니, 청운의 내상은 그냥 단순히 도진 것이 아니라 그전의 상태보다 훨씬 더 악화되며 도졌다.
청운은 가쁜 숨을 헉헉거리며 간신히 교룡조의 공세를 버티고 있었다.
그것은 버티는 것이라기보다는 차마 그냥은 자신의 생목숨을 그자들에게 내놓을 수가 없어서 마지막 발악을 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마치 아무 의미 없는 놀이를 그냥 계속하는 아이처럼 청운은 검이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기에 그냥 강박적으로 상대를 향해 휘두를 뿐이었다.
그때 청운의 등 뒤에서 모용후의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다.
“비껴라, 에이, 이 시원찮은 놈들. 그깟 죽기 직전의 병X 놈을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도 못해서 그리 빌빌거리느냐. 에—이, 밥버러지 같은 놈들. 총단에 복귀하는 순간부터 내가 네놈들을 아예 쥐 잡듯이 굴려주마. 단단히 기대해라.”
모용후의 명령에 흑의의 갑옷을 입은 사내들이 질서정연하게 모요후의 등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모용후가 성큼 앞으로 나섰다.
청운과 일대일로 맞서자마자 모용후는 천천히 청운을 향해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장심에서 아까 그 파황군이라는 자에게서 본 피 흘리는 나체의 귀녀가 나타났다.
붉은 나체의 여인은 모두 셋이었다.
그 시체 얼굴을 한 자에게서 본 것과는 크기도 훨씬 작고 숫자도 적고 색깔도 희멀건 하지만 모용후의 오른손에 현현한 것은 분명 그 악마의 장공이었다.
“천녀혈수! 네 놈이 어떻게 그 저주의 마공을…….”
청운은 자신도 모르게 놀라서 소리치며 뒤로 한 발 주춤 물러섰다.
모용후가 안면 가득 음산하고 사이한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나는 모용세가의 둘째 아들이기도 하지만 아까 그분의 양아들이기도 하지. 자 알고 싶은 것 다 알았으면 이제 그만 가거라.”
모용후가 손을 허공에 떨치자 나체의 붉은 귀녀가 고—오—오—오, 하는 귀곡성을 내며 청운의 가슴을 향해 달려들었다.
청운이 젖 먹던 힘까지 짜내며 검으로 모용후의 천녀혈수로 막아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부상을 당하지 않은 상태의 청운이었다면 몰라도 지금의 청운은 도저히 막아낼 수 없는 무서운 장력이었다.
청운은 모용후의 장력에 그대로 가슴이 강타당했다.
그는 이름 모를 설산의 차가운 얼음 같은 비명을 지르며 실 끊어진 연처럼 끝을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만장의 설산 계곡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인간의 육안으로는 도저히 그 끝을 짐작할 수 없는 까마득한 절벽 아래도 떨어지는 청운의 추락을 지켜보던 모용후가 한껏 짜증 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이런 낭패가. 이 일을 어찌 한단 말인가. 아버님이 반드시 저놈의 시체를 확인하라고 했는데. 일이 묘하게 꼬이네. 왜 나와 저놈이 엮인 일은 항상 이렇게 찜찜한 구석을 남기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네. 그대로 보고하는 수밖에. 자, 그만 철수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