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화 불에 달군 인두로 지지는 것 같은
힘이 동반되지 않는 정의는 무력한 도발일 뿐이다.
정의는 충분한 힘을 가진 후 얼마든지 다시 세울 수 있다.
청운은 그자가 다시 천녀혈수를 발출하자 청운은 전력을 기울여 멸환—초식을 펼치며 맞받아치는 척 상대를 속인 후 곧장 몸을 돌려 계곡 쪽으로 섬광처럼 내달렸다.
청운은 묘묘보허의 신법을 최대한 전개했다.
하지만 한쪽 어깨와 허벅지의 부상으로 몸의 균형이 완벽하게 잡히지 않아 청운은 묘묘보허의 묘용을 완벽하게 발휘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그자의 천녀혈수에 중한 내상을 입어 청운의 묘묘보허는 평소의 반도 속도를 내지 못했다.
가장 나쁜 것은 몸을 돌려 달아나는 청운의 등에 그자가 다급히 발출한 또 다른 장력이 그대로 강타한 것이었다.
다행히 그자와의 거리가 좀 있어서 망정이었지, 아니었다면 청운은 즉사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등을 불에 달군 인두로 지지는 것 같은 고통을 청운은 느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 청운은 연신 피를 울컥 토하면서도 묘묘보허 신법을 최대한 전개했다.
달아나는 청운의 등 뒤에서 그자의 분기에 찬 외침이 들렸다.
“쫓아라. 그놈은 내 천녀혈수에 정통으로 맞아 금세 기력이 소진될 것이다. 심한 내상을 입어 피를 철철 흘리고 있으니 천라지망을 펼쳐 쥐 잡듯이 몰아라.”
“네!”
“가능하면 포획해라. 하지만 정 안 되면 사로잡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반드시 주살해야 한다. 그 시체까지 틀림없이 확인해서 보고하라.”
청운은 자신을 죽이라는 그자의 말을 등 뒤로 들으며 무조건 그자가 서 있는 반대 방향을 향해 달아났다.
수백 명의 사내들이 기민하게 휘파람과 폭죽으로 신호를 주고받으며 청운을 추격해 왔다.
그 휘파람 소리와 폭죽은 그들끼리 미리 약속된 어떤 신호 같았다.
부상을 당하지 않은 평소의 청운이었다면 저들의 숫자가 수백 명이라도 전혀 겁을 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부상이 워낙 엄중해 저들 다섯도 정면으로 상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청운이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무조건 달아나는 것뿐이었다.
그것도 가능하면 이곳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으로.
그래야 조금이라도 자신이 살 확률이 높아진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마치 도주에 중독된 사람처럼 계속 그들과 반대 방향으로 달아났다.
청운은 묘묘보허를 최대한 펼치며 달리고 또 달렸다.
지금 청운은 자신이 어디를 얼마만큼 가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이곳에서 가장 먼 곳만이 가장 안전한 곳이라는 생각이 청운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다행히 심한 상처와 내상을 입었음에도 청운의 신법은 청운을 뒤쫓는 자들보다는 조금 더 빨랐다.
그만큼 청운의 탈주는 절박하고도 절실했다.
하지만 청운은 자신의 달리는 속도가 계속 이 정도로 유지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깨와 허벅지의 외상과 그자의 천녀혈수에 당한 내상이 신법의 속도를 점점 더 더디게 하고 있음을 자신도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청운은 그 사실조차 생각할 겨를 없이 더 이상 달릴 수 없을 때까지 달리고 또 달렸다.
* * *
얼마나 달렸을까.
도망치면서 뒤돌아보니 추적자들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청운은 서둘러 주변을 탐색했다.
우선 잠시라도 은신할 곳을 찾아 임시방편으로라도 심각한 내, 외상에 대한 응급조치를 해야만 했다.
마침 삼십여 장 왼편에 집채만큼 커다란 바위 몇 개가 서로 어슷하게 포개지고, 주변에는 몇 그루 고사목이 있는 곳을 청운이 발견했다.
또한 가장 큰 고사목의 밑동에는 한 사람이 충분히 들어가고도 남을 만한 뻥 뚫린 구멍이 있었다.
청운은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그 고사목을 향해 달려갔다.
청운은 고사목 주변의 널브러진 넝쿨과 넌출로 구멍을 꼼꼼히 가린 후 서둘러 어두컴컴한 구멍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청운은 자신의 품속에 있는 약병이란 약병은 다 바닥에 꺼내 놓았다.
하오문의 비고에서 챙겨 온 내상을 다스리는 환약을 반병이나 입속에 틀어넣었다.
청운은 다급하게 환약을 마른침과 함께 대충 씹어서 꿀꺽 삼켰다.
순간적으로 목구멍이 컥컥 막혔지만 살기 위해서는 그것보다 부상의 치료가 훨씬 더 다급했기에 그 정도 불편은 불편도 아니었다.
청운은 금창약을 꺼내 어깨와 허벅지에 듬뿍 발랐다.
그리고 즉시 치우전륜결을 운용해 내상과 외상을 다스렸다.
하지만 평소와 다르게 청운의 몸을 감싸는 자황색의 성운이 색깔도 옅었고 두께도 얇았다.
단 한 번의 짧은 운공으로도 청운은 조금 살 것 같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자의 장력에 어떤 지독한 사기가 잠복해 있는지 청운이 치우전륜결을 아무리 운용해도 내상이 좀처럼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자의 장력에 깃든 사기와 청운의 내공이 상극인 것 같았다.
청운이 치우전륜결을 운용해 혈맥에 침투한 그자의 음공을 몰아내려고 할 때마다 혈과 맥이 송곳에 찔린 듯 아팠다.
그렇다고 이대로 내상을 방치할 수는 없었다.
그것을 방치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죽음과 직결되는 것이기에 청운은 고통을 무릅쓰고 계속 치우전륜결을 운용하는데 전심전력을 다했다.
그렇게 몇 다 경이 지났을까.
근처에서 수십 명의 인영이 움직이는 부산한 발자국소리가 청운의 귀에 들려왔다.
자신을 추적하는 자들이 틀림없었다.
청운은 치우전륜결의 운행을 중단하고 청력을 최대한 돋우었다.
‘벌써 이곳까지 왔구나.’
청운은 바짝 긴장했다.
그때, 무리 중에서 누군가가 크게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파황군님의 영리한 백서가 그놈의 피 냄새를 이곳에서 맡은 모양이다. 백서가 계속 코를 킁킁거린다. 자, 다른 조에게 이곳의 위치를 알리는 폭죽을 쏘아라.”
“네!”
“아무래도 놈이 저 노송이 있는 바위 근처에 은신한 것 같다. 주변에 기름을 퍼붓고 불을 질러라. 죽기 싫으면 튀어나오겠지. 자 서둘러라. 그리고 놈의 마지막 발악을 조심해라.”
잠시 후 진한 기름 냄새가 청운의 코를 자극했다.
기름 냄새와 함께 유황 냄새도 풍겼다.
‘기름에다 유황까지 섞은 모양이군.’
청운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만 보아도 저 자들이 얼마나 악독하고 잔인한 자들인지 알 것 같다고 청운은 분노했다.
청운은 저들이 이곳 주변에 불을 지피기 전에 저들을 기습적으로 처치하고 내빼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생각을 마치자마자 청운은 묘묘보허로 연기처럼 고목의 구멍을 빠져나왔다.
청운은 벼락이 대지를 내리치듯 앞에서 무리를 지휘하던 몇 놈을 그대로 도륙했다.
“으으악, 으악.”
“악.”
선두에서 무리를 이끌던 대여섯 명의 장한이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목과 팔다리가 잘린 채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청운은 서너 번 더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자들을 더 난자하고는 재빨리 몸을 돌려 다시 무작정 달아나기 시작했다.
청운은 자신의 등 뒤에서 연신 호각을 부는 소리, 밤하늘에 폭죽과 불화살을 쏘아 올리는 소리를 들으며 더 높고 깊은 산속으로 계속 도망쳤다.
달아나는 청운의 눈앞에는 산과 밤 그리고 자신의 얼굴에 부닥치는 차가운 바람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 * *
숨 돌릴 틈 없이 계속 이어지는 추적을 당하는 와중에도 청운은 잠시의 짬이라도 날 때마다 몸을 숨기기에 적당한 은신처를 찾아 내상과 외상을 치료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추적자들은 그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청운이 도망치면 그자들이 찾아내고, 다시 도망치면 다시 그자들이 청운을 찾아내는 그런 숨바꼭질 같은 날들이 벌써 몇 날 며칠 이어지고 있었다.
청운이 은신한 곳을 그자들이 찾아내면 청운은 다시 그들 중 재수 없는 몇을 죽이고 또 달아났다.
도망치고 찾아내는 일이 청운과 그들 사이에 반드시 수행해야만 하는 어떤 정해진 의무처럼 반복되었다.
청운과 그들 사이에 다람쥐 쳇바퀴 같은 나날이 돌고 또 돌았다.
그동안 물도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한 청운의 기력은 극도로 쇠약해져 갔다.
그럴수록 청운의 내면에서 삶에 대한 의지도 더 강하게 불타올랐다.
무엇보다 가장 안 좋은 것은 그자의 천녀혈수에 당한 심각한 내상이었다.
강호에 발을 내디딘 후 여태껏 어지간한 내상은 치우전륜결로 거의가 다 다스려졌는데.
‘대체 그자의 장력에는 어떤 악독한 사기가 깃들어 있기에…….’
청운은 아무리 치우전륜결을 운용해도 내상은 차도를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악화되는 느낌이 들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악화라기보다는 치우전륜결을 운용할 때만 내상이 조금 나아지는 듯하다가도 치우천륜공의 운용을 중단하면 금세 내상이 다시 도졌다.
그렇다고 적들에게 시시각각 쫓기는 처지에 마음 놓고 치우천륜결만 운용하고 있을 수만은 더더욱 없었다.
그리고 청운은 그자들이 어떻게 자신이 은신한 곳을 그렇게 쉽게 찾아내는지도 의아했다.
추적자들은 청운이 숨은 곳을 매번 정확히 찾아냈다.
그것은 아마도 파황군이 애지중지 기르는 흰 쥐새끼, 백서 때문이라고 청운은 짐작했다.
참으로 끈질기고 집요한 놈들이었다.
이제는 정말 지긋지긋하다고 청운은 진절머리를 쳤다.
그렇다고 도망치는 것 외에 청운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 말고 할 수 있는 다른 것이 있었다면 청운은 벌써 수백 번도 더 시도했을 것이다.
청운은 자신이 이미 천산의 수십 개의 봉우리를 더 넘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도 자주 그리고 멀리 달아나다 보니 청운은 자신이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전혀 몰랐다.
유일하게 청운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지금 있는 곳이 오직 하얀 눈밖에 보이지 않는 오지의 산속이라는 것이었다.
청운은 이곳이 아직도 천산인지 아닌지조차 헷갈렸다.
이미 천산을 벗어난 것 같기도 하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이곳이 어디인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아직도 더 달아나야 한다는 생각만이 청운의 머릿속을 온통 지배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사방을 둘러봐도 온 세상천지가 새하얀 눈만 가득해서 달아날 방향조차 제대로 잡기에 난망하다고 청운은 느꼈다.
어둑한 하늘을 뚫고 우뚝 솟은 무수한 봉우리들과 첩첩이 겹쳐진 채 늘어선 능선들이 그 끝을 상상할 수 없는 망망대해처럼 하얗게 청운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청운은 지금 자신의 처지가 쫓기는 상황만 아니라면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은 정말 인세 보기 드문 일대 장관이라 생각했다.
청운은 사람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이상한 생명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한 이 중차대한 순간에도 아름다운 것이 눈에 들어오다니.
청운은 자책을 하며 헛웃음을 지었다.
청운이 뒤를 돌아보니 더 이상 자신을 쫓아오는 자가 없는 것 같았다.
청운은 어딘가 잠시 숨 돌릴 만한 곳이 없을까 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눈앞에는 끝을 짐작할 수 없는 눈 덮인 허연 절벽이 마치 지옥의 아가리처럼 시커먼 밤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등 뒤에는 어지간한 야산 크기의 바위들이 서로 어슷하게 포개어져 있었다.
그 바위들은 살랑거리는 바람에도 금방 눈과 함께 절벽 속으로 쏟아질 듯 위태롭게 서 있었다.
청운이 안력을 돋우어 자세히 살펴보니 바위와 바위가 비스듬히 기울어진 곳에 사람이 들어가 쉴 만한 틈이 여러 곳 보였다.
그 틈에는 쌓인 눈도 없었다.
오랜만에 보는 맨땅이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그런대로 잠시 몸을 숨길만 하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즉시 가장 아늑해 보이는 바위틈으로 들어갔다.
그자의 젓가락에 당한 어깨와 허벅지의 상처도 심각했지만.
무엇보다도 그자의 괴이한 장력인 천녀혈수에 당한 내상이 큰 문제였다.
그자의 장력 속에 도대체 어떤 사이한 힘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자의 사악한 음공은 청운의 기력을 급격하게 고갈시켰다.
물론 청운이 죽으라고 도망만 치느라 옳게 먹지도 쉬지도 못해서 내상을 더 악화시킨 측면도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그 모든 걸 다 고려하더라도 그자의 장력은 정말 악독하고 지독한 것이었다.
서둘러 어떤 조치를 취해야만 한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물론 조치라고 해봤자 이제 몇 알 남지도 않은 내상약을 먹고 치우전륜결을 운용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청운은 깊은 한숨을 연신 내뱉었다.
청운은 이제 더 이상 달아날 기력도 자신을 지겹도록 추적하는 그자들에 맞서 반격할 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