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비검무-37화 (37/184)

037화 어차피 시작한 일이고

“그리고 자네가 대파산에서 본 그 적곤은 천년이 되어도 대붕이 되지 못한다면 세상에 엄청난 화를 끼칠 것이네. 가능하면 제거해야 하네. 하지만 적곤에 대항할 만한 무공을 지닌 자기 과연 세상에 있기나 할는지 모르겠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적곤의 내단은 대단한 공능이 있지. 하지만 적곤의 내단은 수백 년 넘는 세월의 분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에 그냥 섭취하면 그 순간 분노의 화염에 온몸이 타서 재가 되고 만다네. 유일한 방법은 유라궁에 있다는 <빙하기>라는 심법으로 다스리는 것뿐이라는 전설이 있네.”

‘빙하기…….’

“자네가 한 번 도전해 보게.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잘은 몰라도 자네의 무위가 한순간에 현경의 경지를 넘어 진경의 경지를 이룰 수 있을 것이네.”

청운은 그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듣고는 너무나 가슴이 아려왔다.

만약 기회가 닿아 설산에 간다면 유리궁을 꼭 한 번 찾아보리라 결심했다.

* * *

천산은 말 그대로 중원의 어떤 산과도 그 차원이 달랐다.

아예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산정의 높이와 산세의 폭 그리고 헤아릴 수조차 없는 무수한 봉우리와 천장만장 아찔하게 깎아지른 절벽.

그리고 그 깊이를 측정할 수 없는 계곡들이 마치 인간의 접근을 불허하는 신의 거처 같았다.

청운은 귀수하백과 이틀 동안 취생몽사의 상태로 지내다가 장강의 최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장사꾼들의 배를 얻어 탔다.

그리고 청해성에서 내려 육로로 천산 근처에 당도했다.

그동안 단 한 번도 자객이나 살수들의 습격이나 기습이 없었다.

너무나 편한 길이어서 오히려 조금 지겨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청운은 곧 자객이나 살수가 아니라 너무나 광대한 이 천산에서 어떻게 천도봉을 찾을 것인가 하는 문제로 고민에 빠졌다.

사막을 가로지르는 데만 거의 달포가 걸렸다.

사막의 날씨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변화무쌍했다.

낮에는 살을 태울 듯이 덥다가도, 밤이 되면 이빨이 덜덜 떨릴 정도로 추웠다.

게다가 수시로 불어닥치는 사막폭풍과 용권풍은 눈을 뜰 수가 없을 정도로 시야를 가렸다.

무엇보다 힘든 것은 천으로 얼굴을 가렸음에도 불구하고 시도 때도 없이 눈과 입, 코로 틈입하는 모래였다.

숨을 쉴 때마다 입 속에서 모래가 버석버석 씹혔다.

다행히 청운은 사막의 지리와 날씨 변화를 귀신처럼 잘 아는 경험 많은 안내인을 만나 별 탈 없이 사막을 건넜다.

예정보다 닷새는 더 빨리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다.

청운은 그 안내인에게 약속보다 두 배나 더 많은 수고비를 지불했다.

그 돈은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그 안내인 덕분에 청운은 사막을 건너는 자는 반드시 만난다는, 대막의 도살자라고 불리는 <사혈풍>을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물론 직접 그들과 마주친다고 해도 전혀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사막의 지랄 맞은 기후와 싸우는 것도 힘든데 굳이 그들과 싸워 힘을 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 모든 귀찮은 걸 피할 수 있었던 까닭은 전적으로 그 안내인 덕분이었다.

* * *

대륙표국의 비고에서 알아낸 천도봉의 회합일인 그믐까지는 아직 보름 이상이나 남아 있었다.

그날까지는 충분히 여유가 있어서 청운은 천도봉을 찾는 일을 잠시 접어두고 천산 아래에 있는 번화가를 천천히 돌아다니며 구경을 했다.

그곳도 중원의 여느 도성만큼이나 번잡했고 사람이 사는데 필요한 모든 기반 시설도 다 있었다.

주루며 객점, 서점과 포목점 심지어 기루까지 있었다.

기루에는 중원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서역의 미인들도 있었다.

그녀들은 중원의 여자와는 외모가 사뭇 달랐다.

우선 피부가 백옥같이 희었으며 몸매의 굴곡도 중원의 여인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차이가 났다.

중원의 여인보다 신장도 훨씬 크고 살집도 풍만했다.

무엇보다 두드러지게 차이 나는 것은 바로 눈이었다.

그녀들의 눈동자는 태어날 때 하늘이 눈에 바로 내려온 듯 파란색이었다.

그리고 그 파란 눈동자가 반짝이는 눈은 우물처럼 깊었다.

청운은 다 같은 사람인데 어찌 저렇게 다를 수가 있지, 라며 의아해했다.

청운은 이십여 장 정도 떨어져 있는 서점을 향해 곧장 걸어갔다.

청운은 어린 시절부터 다른 무엇보다 서책을 좋아했다.

그래서 청운은 어디 낯선 곳을 여행할 때면 우선 그 지역의 서점부터 쭉 둘러보는 것이 몸에 익은 습관이었다.

이곳 서점에서는 도대체 어떤 책을 팔고 있는지 청운은 몹시 궁금했다.

청운이 삐걱대는 서점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러자 기름먹인 헝겊을 뭉쳐 책장의 먼지를 닦고 있던 주인이 막 문을 밀며 들어오는 청운을 고개를 돌려 뒤돌아봤다.

청운의 행색을 유심히 살펴보던 서점 주인이 뜬금없이 말을 했다.

“암전은 서점 지하에 있소.”

“아, 그런가요.”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혹하는 암전.

주인은 청운이 무기를 사러 온 무인인 줄 착각한 모양이었다.

청운은 조금 당황해 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청운은 우선 책을 먼저 구경하고 싶다고 주인장에게 말했다.

청운은 악기와 관련된 서적들이 어디에 꽂혀 있는지를 주인에게 물었다.

주인은 왼쪽의 가장 구석진 책장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청운은 이참에 산막의 노인이 알려 준 동굴에서 얻은 삼적(三笛) 피리에 관한 것을 한 번 알아볼 참이었다.

책장에 있는 책들은 대부분 칠적(七笛) 피리에 관한 것들뿐이었다.

삼적(三笛) 피리에 대한 책은 아예 없었다.

청운은 책도 한 권 사지 않으면서 이 책 저 책 빼 본 것이 미안해서 주인에게 암전으로 안내해 달라고 말했다.

그제야 주인의 얼굴에 빙그레 미소가 돌았다.

주인이 오른쪽 맨 구석의 책장을 돌리자 암전이 있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주인이 먼저 앞장서 내려가고 청운이 뒤를 따랐다.

먼저 들어간 주인이 벽면 곳곳에 걸려 있는 기름등잔에 불을 밝히자마자 청운은 깜짝 놀랐다.

주인이 청운의 얼굴을 보더니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암전의 규모가 서점의 몇 배나 되었다.

검과 창, 비도를 비롯한 별의별 무기들이 다 진열되어 있었다.

중원에서는 아예 찾아볼 수조차 없는 날이 이상하게 휜 기형검들도 있었다.

청운은 천천히 둘러보았다.

이것저것 다 봐둬서 나쁠 게 없다고 생각했다.

청운은 여러 가지 무기를 둘러보는 것도 하나의 공부라고 생각했다.

언제 어디서든 저런 이상한 무기를 사용하는 자들과 맞닥뜨릴 수 있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천천히 무기를 둘러보던 청운의 눈에 날선 비도가 촘촘히 꽂혀 있는 가죽 띠가 들어왔다.

청운은 비도 한 자루를 슬쩍 뽑아 보았다.

가볍고 날이 잘 서 있었다.

가죽 띠에는 모두 아홉 자루의 비도가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청운은 비도가 꽂힌 가죽 띠를 왼쪽 팔뚝에 차 보았다.

구멍에 맞춰 끈을 조정하니 전혀 무게감도 느껴지지 않고 딱 맞았다.

주인에게 얼마인지를 묻자, 주인은 공자의 안목이 대단하다고 칭찬하더니 은자 백오십 냥을 불렀다.

청운이 은자 백 냥이면 사겠다고 하자, 주인은 잠시 고민하는 듯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는 금세 그렇게 하자고 했다.

생긴 것과는 다르게 주인은 성격이 시원시원한 사람이었다.

청운은 밖으로 나가려고 몸을 돌리다가 우연히 아주 낡아 녹이 켜켜이 묻어나는 철함 하나를 발견했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청운이 손만 대도 녹이 줄줄 흘러내릴 것 같은 철함을 들어 올려 자세히 살펴보았다.

철함에는 무슨 글자가 음각되어 있었다.

하지만 하도 녹이 심해 도저히 무슨 글자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언뜻 보기에는 고대 범어 같아 보였다.

뚜껑을 열어 보려고 청운이 손에 살짝 힘을 줘 보았다.

손바닥에 녹만 잔뜩 묻어날 뿐 뚜껑은 전혀 열리지 않았다.

철함은 하도 오랜 시간 동안 아무도 열어 보지 않아서 녹이 슬면서 아예 뚜껑과 본체가 달라 붙어버린 것 같았다.

옆에서 청운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주인이 돈을 받지 않을 테니 그냥 가져가라고 했다.

주인은 그 철함이 뭔지는 자신도 모른다고 했다.

한 번도 열어 보지 않았다고 했다.

지금은 이미 죽고 없는 전 주인으로부터 자신이 서점과 암전을 인수할 때부터 있었던 물건이라고 했다.

주인은 녹슨 철함을 기름종이에 사더니 못 쓰는 물건을 내다 버리듯 청운에게 건넸다.

청운은 철함을 품속에 집어넣고는 곧장 밖으로 나왔다.

막막했다.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한단 말인가.

암전의 주인은 평생을 천산 근처에 살았지만 천산에 천도봉이 있다는 소리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고 했다.

심지어 암전의 주인이 소개해 준, 평생 천산에 생계를 기대어 살아온 약초꾼들과 사냥꾼들에게서조차 천도봉이 어딘지를 모른다고 했다.

천산에 그런 봉우리가 있다는 소리를 평생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섣달그믐까지는 아직 날짜 상으로는 여유가 있다고 생각한 청운은 천도봉을 찾는 일은 천천히 알아보기로 했다.

그리고는 일단 너무 오랜 여행으로 쌓인 여독을 먼저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행 내내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했던 건량과 육포는 이젠 지긋지긋했다.

당장은 제대로 된 음식과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싶었다.

청운은 서점과 마주보고 있는 잡화점에 들러 녹을 제거는 약을 하나 샀다.

그것을 품에 집어넣고는 곧바로 주변에서 가장 번듯해 보이는 객점의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겨울이고 여행객이 드물어서 그런지 객점은 예상보다도 더 한산했다.

상당히 넓은 객점에 손님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청운은 구운 오리 한 마리와 황주 한 병을 시켰다.

청운이 게 눈 감추듯 게걸스럽게 음식을 전부 먹어 치웠고.

점소이에게 목욕을 하고 며칠 묵고 갈 것이니 따뜻한 물을 준비해 달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점소이에게 은자 한 냥을 쥐어 주고는 이 층으로 곧장 올라가려고 했다.

어린 점소이가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고는 청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청운이 의아해서 점소이에게 물었다.

“왜 돈이 모자랍니까?”

점소이가 당황해하며 대답했다.

“아니, 너무 많아서 그렇습니다. 손님.”

“거스름돈은 필요 없습니다. 나머지는 다 가지셔도 됩니다. 대신 목욕물이나 잘 준비해 주세요.”

청운은 곧바로 이 층으로 올라갔다.

구운 오리고기와 술로 배부르게 포식하고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니 세상에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이 뭐 있을까.

오랜만에 사는 맛이 나는 것 같았다.

청운은 물속에서 지그시 눈을 감고는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하나하나 그려보았다.

앞으로 자신이 풀어나가야 할 일들이 너무나 난망하고 막막했다.

하지만 청운은 어차피 시작한 일이고 이미 자신은 싫든 좋든 그 일의 한가운데에 발을 들여놓았기에 무조건 헤쳐 나가야만 한다고 생각을 하다 설핏 잠이 들었다.

꿈결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청운은 목간 옆에 세워 두었던 검을 잽싸게 잡고는 나직하지만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요.”

“공자님, 접니다요. 다름이 아니라 혹시 목욕을 도울 시녀는 필요 없으신지요.”

목소리를 들으니 아까 그 점소이였다.

아무래도 점소이가 너무 많은 돈을 받은 나머지 제 딴에는 청운에게 답례라도 할 모양으로 문을 두드린 것 같았다.

긴장이 확 풀어졌다.

청운은 검을 도로 제자리에 두고는 대답했다.

“필요 없소. 그리고 다시는 내가 부를 때까지 내 방문을 두드리지 마시오.”

청운의 말이 끝나자 점소이가 되돌아 계단을 내려가는 발자국소리가 들렸다.

돌연 청운은 혹시나 하여 점소이를 다시 불렀다.

“잠깐만 내 방으로 좀 들어오시겠소. 내가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습니다.”

점소이가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잽싸게 다시 돌아와 방안으로 들어섰다.

“예, 무사님. 무엇이든 물어보십시오.”

“혹시 말입니다. 요 근자에 무림인들이 이곳에 들리지 않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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