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4화 마치 강물에 중독이라도 된 듯.
몇 번의 대주천을 거듭하자 완전히 사그라질 듯했던 청운의 기력이 조금씩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다시 몇 다경이 흐르자 한 뭉텅이로 엉겨 붙어 있던 사물들이 다시 분리되어 제자리를 찾아 되돌아가고 있었다.
동굴 입구는 앞쪽으로, 천장은 머리 위로, 바닥은 아래쪽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청운의 표정과 안색도 서서히 본래의 모습을 찾고 있었다.
반대로 청운의 등에 장심을 대고 가부좌를 틀고 있는 삼호의 안색은 점점 창백해져 갔다.
심지어 온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경련을 일으키기 직전이었다.
이제는 청운이 아니라 오히려 삼호가 위험한 상태에 빠진 것 같았다.
청운은 더 이상 삼호의 내공이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그러자 장심을 청운의 등 뒤에서 뗀 삼호가 뒤로 벌렁 나자빠지며 혼절하고 말았다.
청운은 마지막으로 몸속에 있던 독을 왼손의 검지에 몰아넣고는 치우천결로 완전히 태워 버렸다.
청운은 않은 채로 뒤돌아 쓰러진 삼호를 서둘러 품에 안았다.
그리고 가슴에 손을 대고 자신의 진기를 불어넣으려다 흠칫 놀랐다.
뭔가 물컹한 것이 자신의 장심에 닿는 것 같았다.
역시 삼호는 자신의 예상대로 여자였다.
청운은 할 수 없이 삼호를 억지로 돌려 앉힌 후 삼호의 등으로 진기를 밀어 넣었다.
* * *
일 다경 정도가 흐르자 삼호가 훅, 하는 큰 숨을 내쉬더니 서서히 의식을 회복했다.
청운은 삼호의 등에서 손을 떼고는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잠시 후 삼호가 돌아앉았다.
삼호는 정신을 차리자마지 청운에게 예부터 갖췄다.
“삼호가 사자님을 뵙습니다. 큰일 날 뻔하셨습니다. 다행히 단혼산은 지독한 독이기는 해도 그리 특별한 독이 아니기에 하오문의 장안분타에서 해독약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강건한 모습을 되찾으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여전히 누군가의 예를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청운은 민망한 표정으로 손사래를 치며 삼호에게 예를 거두라는 손짓을 했다.
오히려 청운이 삼호 덕분에 또다시 목숨을 구했다며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삼호는 그게 제 임무라며 청운의 인사를 극구 사양했다.
삼호는 자신이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급한 볼일이 있어서 너무 늦게 청운의 신호를 들었다고 연신 죄송해했다.
그리고 어쩌다 청운이 그런 곤경에 처하게 되었는지 물었다.
청운은 자신이 무림맹에 들렀다 대륙표국의 비고에 잠입했던 사실과 혈불인마를 만난 손을 섞은 일.
그리고 두 번에 걸친 살수들의 기습을 받은 정황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삼호에게 사실 그대로 이야기했다.
하지만 대륙표국에서 임소와와 있었던 일은 말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삼호는 청운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삼호는 청운의 무모함과 대범함에 적지 않게 놀란 눈치였다.
그리고 청운이 연속적으로 자객의 공격을 받은 이유가 아마도 청운의 행적이 노출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틀림없이 대륙표국의 비고에 어떤 특수한 물질을 묻혀 놓아 그곳에 드나드는 누구든지 그 물질에 노출되어 추적이 따라붙은 것 같다고 말했다.
삼호는 마침 자신에게 그런 물질을 지우는 약물이 있으니 지금 즉시 계곡으로 내려가서 머리에서 발끝까지 약물로 씻어내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 입고 있는 옷도 당장 태워 버리고 다른 옷으로 갈아입으라고 했다.
청운은 삼호가 건네주는 옷을 받아들고 곧바로 계곡으로 내려갔다.
청운은 삼호가 시키는 대로 온몸을 몇 번이나 깨끗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청운이 동굴로 돌아오자 삼호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대신 동굴 바닥에 쪽지가 한 장 놓여 있었다.
삼호는 다른 일 때문에 급히 떠났다고 했다.
그리고 청운이 지금부터 가려고 하는 천산행에는 자신이 동행할 수 없을 것 같으니 부디 몸조심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청운은 쪽지를 다 읽은 후, 태워 버렸다.
* * *
물.
흐르는 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낮은 곳에서 더 낮은 곳으로, 오직 낮은 곳으로만 흐르는 물.
물은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흐르며 주변에서 흘러드는 작은 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아 점점 더 깊고 넓은 자신의 길을 만든다.
물은 그렇게 강을 만들어 자신의 고향인 바다로 간다.
바다에 도착한 물은 이미 한 번 산 굴곡의 생을 미련 없이 풀어 놓고는 또다시 다른 몸으로 태어나기 위해 몸을 바꿔 하늘로 오른다.
또한 물은 세상을 지나가면서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물은 자신이 지나는 모든 곳을 수면에 되비추며 출렁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유장하게 흐르는 물길을 바라보며 자신의 지난 생을 반추하며 되짚어본다.
커다란 물일수록 그 수면이 더 넓고 잔잔한 거울 같다.
그렇기에 큰물을 마주한 사람들은 그 물의 도도한 흐름에 몽롱한 시선을 던진 채, 세월의 무상함을 되새김하며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아련한 기억을 문득문득 떠올리기도 한다.
역사상 탁월한 시인 묵객들이 흐르는 물을 보며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른 이유도 바로 그 때문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대륙을 서에서 동으로 가로지르는 길고도 긴 장대한 장강은 수천 년 세월 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의 구구절절한 희로애락이 도저하게 굽이치며 흐른 유구한 생의 물줄기이기도 하다.
기골이 제법 단단하고 그 눈빛이 장강의 강심보다 더 깊은 한 흑의의 청년이 말뚝처럼 갑판위에 서서 자기 눈앞을 지나는 거대한 장강의 물살을 유심히 내려다보고 있다.
대체 흑의의 청년은 무슨 생각이 그리 깊은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줄곧 자신의 발 앞까지 흘러왔다가 무심히 자신의 등 뒤로 흘러가는 강물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그 청년은 자신의 주변을 누가 서성거리든 아무 관심도 없이 오직 자신의 눈앞을 흐르는 짙푸른 강물만 지루하게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 있다.
그 흑의의 청년은 바로 청운이다.
삼호와 헤어진 청운은 천산으로 가기 위해 가장 빠른 길인 장강의 수로를 선택했다.
삼호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하자, 삼호는 몹시 걱정하면서도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장강의 포구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청운은 포구에 도착해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는 포구에 접안되어 있던 여러 척의 배들 중에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배에 바로 승선했다.
그리고는 그때부터 내내 선상에 말뚝처럼 박혀 장강의 넘실거리는 물결을 바라보고 있었다.
청운은 물만 바라보고 있어도 전혀 지겹지 않았다.
오히려 평생 물만 바라보며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배가 포구를 벗어난 지 거의 반나절이나 되어 갔다.
아침을 너무 간단하게 먹어서 그런지 이내 허기가 졌다.
청운은 포구에서 산 술 한 병과 육포를 꺼냈다.
술을 마시며 강을 바라보니 오직 흐른다는 목적 하나만 가지고 다른 어떤 목적도 없이 무심하게 제 갈 길 가는 물이 더 좋아졌다.
그 모든 도도한 흐름을 오직 혼자서 즐기니 술맛도 더 좋았다.
그 어떤 갈등이나 마찰도 없이 쉬지도 않고, 멈추지도 않고 바다로 흘러가는 강물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청운은 자신의 삶도 저 짙푸른 장강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마치 강물에 중독이라도 된 듯 얼마나 그렇게 푸른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청운은 한순간 강 한쪽의 색깔이 조금 이상해졌다고 직감적으로 느꼈다.
우연히 눈길이 가닿은 먼 강심 일부가 거뭇거뭇하게 출렁거렸다.
처음에는 장강의 커다란 잉어 떼가 강물을 거슬러 올라오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움직임이 조금 이상했다.
잉어 떼의 움직임이라고 보기에는 유연하지도 매끄럽지도 못했고 그 속도 또한 잉어 떼에 비하면 느리기 그지없었다.
청운은 안력을 돋워 좀 더 자세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 무리는 잉어 떼가 아니었다.
그것은 시커먼 수피를 입은 백여 명의 인형들이 마치 물고기 떼처럼 유영하는 것이었다.
그 시커먼 무리는 청운이 탄 배를 향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의 대오는 天이라는 글자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청운은 바짝 긴장하며 금방이라도 출수할 준비를 했다.
그들의 한쪽 손에는 창도 아니고 작살도 아닌 기다란 무기를 거머쥐고 있었다.
청운은 또 시작이구나 생각했다.
지겹고 지겹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낭패라고도 생각했다.
이 배에 타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은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먼 북쪽으로 장사를 떠나는 순박한 상인들이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주로 나는 차와 비단 그리고 생필품을 추운 지방에 가지고 가서 팔아 그 지방에서 주로 나는 약초나 짐승의 가죽을 구매거나 혹은 맞교환해서 먹고사는 사람들이다.
무엇보다 저들은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무구한 사람들이다.
나 때문에 저들이 죽거나 다쳐선 절대 안 된다.
저들이 죽거나 다치면 저들의 가정도 미래도 장강의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청운은 저들이 죽거나 상하지 않는 방법을 서둘러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청운은 난데없이 수면에 떠오른 天이라는 시커먼 글자를 송곳처럼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 글자를 서서히 뒤따르며 자신이 탄 배를 향해 다가오는 배후의 시커먼 배도 노려보았다.
그 배의 돛대에는 쌍도끼와 해골이 그려진 검은 깃발이 강풍에 펄럭이고 있었다.
남해바다의 공포라는 <해루사>였다.
바다의 살귀들이 무슨 일로 이 장강까지 왔단 말인가.
설마 나 하나를 잡으려고 天이 바다의 살귀들까지 동원했단 말인가.
이 배에 탄 무고한 사람이 다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이 이 배에서 내리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청운은 가능하면 적의 배에 올라타 싸우는 것이 최선이라고 재빨리 판단했다.
청운은 다급하게 자신의 주변을 둘러보았다.
갑판 한쪽 끝에 항해 중에 혹시라도 배가 파손되면 급하게 보수하기 위해 준비해 둔 나무판자들이 청운의 눈에 들어왔다.
청운은 곧바로 그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청운은 자신의 몸집보다 조금 더 길고 널찍한 판자를 하나 집어 들어 잽싸게 강물에 던졌다.
그리고는 곧장 배에서 뛰어내려 판자 위에 올라섰다.
청운은 물결처럼 출렁이는 판자에에 자신의 몸을 실었다.
그 순간 청운 자신이 타고 있던 배에서 사람들이 다급한 비명을 질러대는 것을 들렸다.
순식간에 배의 난간으로 몰려든 사람 중 누군가 사람이 강물에 빠졌다고 빨리 건져 내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배 위에서 가만히 바라보던 강물과 판자 위에서 직접 몸으로 느끼는 강물은 천양지차였다.
잔잔하게만 보이던 강물은 절대 잔잔하지 않았다.
한참이나 물살에 시달리고 나서야 청운은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는데 성공했다.
최초의 균형을 잡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그다음부터는 차츰 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