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화 붉은 혈안이 시뻘건 눈빛을 이글거리며
혈불인마가 청운을 향해 서서히 돌아섰다.
그리고 청운을 얼음같이 냉혹한 시선으로 노려보고는 천천히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겁대가리 없는 놈. 준비는 되었겠지. 나의 삼장을 받아내면 내가 진 것으로 하겠다. 그리고 네 놈의 한 가지 부탁도 들어주겠다.”
도대체 이 노괴의 무공 수위가 어느 정도이기에 강호에 그런 전설이 회자될 수 있는가.
청운은 의아해하며 바짝 긴장의 끈을 조였다.
한편으로 청운은 자신의 무공 수위가 강호의 절정고수와 비교하여 정확히 어느 정도 위치를 점할 수 있는지 알고 싶기도 했다.
한 치의 방심이 돌이킬 수 없는 불상사를 불러올 수도 있다는 생각에 청운도 신속히 치우천결을 운용해 전신을 보호하면서 서서히 공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노괴가 혈불의 눈이 이글거리는 오른손으로 청운을 향해 일장을 떨쳐냈다.
시뻘건 눈을 치켜뜬 붉디붉은 혈불의 혈안이 청운의 전신요혈을 향해 번개처럼 짓쳐 왔다.
청운도 거의 육성의 치우천결을 끌어올린 진력을 혈안을 향해 쏟아부었다.
청운의 쌍장에서 쏟아진 투명한 자색의 강기가 혈불인마의 혈안을 당장에라도 짓뭉갤 듯이 번쩍하며 쏘아져 갔다.
붉디붉은 혈안과 투명한 자색의 강기이 허공에서 충돌하자 콰—콰—콰—쾅, 하는 엄청난 폭음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절정고수들의 강기와 강기가 맞부딪치며 불러온 사태는 어마어마했다.
근처 주루의 지붕이 통째로 날아가고 그 여파로 허물어진 주면 담벼락의 돌이 사방으로 튀어 올라 사방에 난데없는 돌의 비가 쏟아졌다.
잠시 후, 한바탕 회오리가 어느 정도 가라앉자 장내의 처참한 광경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주변은 마치 엄청난 화약이 터진 듯 반경 십 장 이내에 있던 건물들은 한군데 성한 곳이 없었다.
청운은 한 걸음 반 정도 뒤로 물러나 신형을 휘청거렸다.
반면에 혈분인마는 제자리에 꼿꼿이 선 채 어깨만 조금 들썩일 뿐이었다.
이번 일장의 교환으로 청운이 조금 더 손해를 본 모양새였다.
하지만 더 놀란 쪽은 혈불인마였다.
자신의 오성 공력을 사용한 혈불마장을 이렇게 쉽게 받아낸 인물을 무림에서 처음 본 것이다.
그것도 귀때기가 새파란 젊은 놈이.
혈불인마는 눈앞의 젊은 사내의 무공 수위가 어느 정도인지 한 번 더 시험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공력을 삼성 정도 더 끌어올렸다.
“이놈, 이것도 받아봐라. 이번은 좀 다를 것이다.”
혈불인마는 다시 한 번 팔성의 공력으로 청운을 향해 흉물스러운 혈불마장을 내질렀다.
아까보다 두 배나 더 크고 더 훨씬 붉은 혈안이 시뻘건 눈빛을 이글거리며 당장에라도 청운의 전신을 찢어발길 듯이 맹렬하게 덮쳐 왔다.
청운은 자신의 장기인 검으로 상대하면 좀 더 쉽게 혈안을 막아 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굳이 장력으로 혈불을 상대해 보고 싶어 무영검을 뽑지 않았다.
처음에 청운은 십성의 공력만으로 혈불의 혈안을 상대하려고 했다.
하지만 먹물처럼 짙은 어두운 허공에서 자신의 전신을 노려보던 지옥의 화광이 갑자기 붉은 번갯불처럼 자신을 향해 짓쳐 오자 청운은 돌연 모골이 송년해졌다.
그래서 청운은 치우천결을 최대한 끌어올려 전신을 보호하면서 십이성의 공력으로 쌍장을 내질렀다.
혈불인마의 붉디붉은 혈안과 전신 공력이 실린 청운의 자색 강기가 허공에서 다시 한 번 격돌하자, 아까보다 거의 서너 배나 더 큰 폭음과 굉음이 어둡고 어두운 밤의 대기를 찢어발겼다.
그 충격에 이미 허물어져 땅바닥에 쌓여 있던 온갖 건물의 잔해들과 벗겨진 땅거죽이 또다시 거대한 태풍에 휩쓸린 듯 허공으로 치솟아 올라 소용돌이쳤다.
잠시 후, 한바탕의 거대한 소용돌이가 가라앉자 장내의 풍경이 서서히 드러났다.
폐허도 이런 폐허가 없었다.
혈불인마와 청운의 장력이 스친 곳에 남겨진 것이라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무수한 잔해와 잔해 위에 켜켜이 쌓인 먼지뿐이었다.
어디 한군데 상한 곳 없이 옷이 발기발기 찢어진 청운의 안색은 마치 회칠을 한 것처럼 창백했다.
청운은 거의 대여섯 걸음이나 뒤로 주르륵 물러난 채 입가에 한 줄기 혈흔이 비치고 있었고 혈불인마도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난 채 신형을 휘청거리고 있었다.
청운은 속이 금방이라도 뒤집어질 듯 울렁거리고 거북했다.
비릿한 뭔가가 목울대를 타고 입안으로 넘어오는 것을 억지로 다시 삼키며 혈불인마에게 말했다.
“귀하, 이제 마지막 공격을 하시오.”
청운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던 혈불인마가 가만히 쌍장을 허리춤에 내리며 아무 감정도 실리지 않은 무심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됐다. 이제 그만하자. 너같이 젊은 나이에 내 팔성 공력을 그리 쉽게 받아 내다니. 이것은 내가 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너는 나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된다. 말해라.”
청운은 갑자기 아까 마시다만 술이 다시 땡겼다.
청운은 혈불인마를 멀거니 바라보며 지나가는 농담처럼 말했다.
“아까 마시다만 술이 있는데 마저 마시고 싶소.”
청운의 말을 들은 혈불인마가 갑자기 폭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좋다. 오늘 네 놈이 밤새도록 마시게 해주마. 가자.”
말을 마친 혈불인마는 자신에게 귀 하나씩 잘린 사내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의 이 사태는 모두 네 놈들 때문에 벌어진 것이니 네 놈들이 모두 변상해라. 알아들었느냐.”
혈불인마의 명성과 무위에 놀란 사내들은 거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주섬주섬 자리를 떴다.
청운과 혈불인마는 곧바로 가장 가까이 있는 기루의 밀실에 자리를 잡았다.
청운이 조용하고 소박한 장소를 원했지만, 혈불인마는 오늘 같은 날 돈을 쓰지 않으면 언제 쓰느냐고 하면서 거의 반강제로 주변에서 가장 뻔쩍뻔쩍한 기루로 이끌었다.
술을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옆에 앉은 반나체의 여자가 안주를 집어 입속에 넣어주는 것도 그렇고.
그럴 때마다 의도적으로 기녀가 청운에게 은근히 몸을 밀착시키는 것도 그렇고.
말랑하고 물컹거리는 여체가 주는 이상한 느낌도 그렇고.
게다가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여인의 진한 지분 냄새까지 모든 것이 청운에게는 너무나 어색하고 불편했다.
편하게 한잔하려고 온 술자리가 오히려 불편과 불안을 감내해야 하는 바늘방석 같았다.
청운은 이 어색함과 불편함을 모면하기 위해 연거푸 술잔만을 비웠다.
이건 숫제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이 사람을 마시는 형국이었다.
혈불인마는 안절부절못하는 청운의 그런 모습을 외려 즐기는 것 같았다.
그 광경을 즐길 만큼 즐긴 혈불인마가 마침내 그것도 시들해졌는지, 기녀들을 전부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청운에게 짓궂은 웃음을 연신 빙그레 지으며 농을 했다.
“소형제, 사내가 그래 숫기가 없어 어찌 이 험한 강호를 헤쳐 나가겠나. 그건 그렇고 소형제의 무공이 굉장하던데 도대체 어느 문하에서 자네 같은 고수를 길러냈나.”
“노야, 저는 특별한 문하도 스승도 없습니다.”
“그런가? 삼십 년 이상을 중원을 활보하면서 수많은 고수들과 생사대결을 벌였지만 자네같이 젊은 나이에 그 정도 성취를 이룬 사람은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네. 중원의 모든 무학을 내가 다 아는 건 아니지만 소형제의 무공은 아주 강력하면서도 특이하네.”
“그게… 대파산의 어느 동굴에서 우연히 얻은 무공 이론서를 바탕으로 동이족에 속한 저의 가문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양생법을 이용해 제 나름대로 무공으로 만들어 본 것입니다.”
세상의 어느 누구라도 자신이 겪은 이상한 우연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을 것이기에 청운은 적당히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이제부터 날 그냥 형님이라 부르게. 그리고 동굴에서 보았다는 그 책자는 도대체 어떤 무공서인가?”
“나이 차가 있는데 제가 어찌 감히 노야를 형님으로 부를 수 있겠습니까. 말씀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 무공서는 ‘구무자’라는 사람이 기술한 [구천무록]이란 책이었습니다.”
“…….”
“그 책자에는 내공 심법도 검초도 없었습니다. 다만 무공의 근본에 관해 연구해 놓은 일종의 무공연구서 같았습니다.”
“‘구무자’와 [구천무록]이라.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이름과 책이군. 어쨌든 자네는 대단한 사람이네. 그런 책자를 바탕으로 그런 독특한 무공을 만들어 내다니, 소형제는 나같이 아둔한 자는 감히 엄두도 못 낼 무공의 천재 중의 천재네.”
혈불인마는 청운의 어디가 그리 마음에 들었는지 말을 계속해서 이어 갔다.
“소 형제, 강호에서는 나이 차는 아무 의미가 없다네. 서로 마음과 뜻이 얼마나 맞는가가 중요하지. 하여튼 앞으로 자네는 내 동생이네. 내가 그리하기로 작정했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나 나에게 도움을 구하게. 내 일처럼 최선을 다해 도우겠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른 무림 삼괴에 속하는 장강의 귀수하백과 만수림의 만수귀왕도 내가 책임지고 설득해 자네를 도우도록 하겠네.”
혈불인마는 시시콜콜 자신의 속내를 청운에게 다 내어 보였다.
무림의 공포라는 혈불인마는 알고 보니 너무도 외로운 사람이었다.
청운에 대한 그의 호의와 다변은 실상 자신의 외로움을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토로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혈불인마에게서 그런 외로움을 감지한 청운도 혈불인마의 말에 추임새를 맞추듯 자신의 신상내력과 그동안 자신이 무림에서 겪은 사연을 그에게 대충 요약해 이야기했다.
청운의 말을 한 문장도 놓치지 않고 듣던 혈불인마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더니 현재 무림 정세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대륙표국과 天이라. 드디어 또 무림에 한바탕 거대한 피의 소용돌이가 일겠군. 특히 天이란 곳은 엄청난 풍파를 몰고 올 것 같군.”
“네, 그럴 것입니다.”
“나는 여태껏 무림의 정세나 세력 판도에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지만, 소형제의 일이니 나도 그 둘에 관해 은밀히 조사해 보겠네.”
청운은 한편으로 일부러 무림과 거리를 두고 살아온 혈불인마가 자신 때문에 무림의 일에 관여하겠다는 것이 상당히 부담이 되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청운 자신이 하려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자신도 짐작할 수 없는 일이기에 혹시라도 혈불인마에게 해가 될지나 않을까 생각되어 극구 사양했다.
하지만 혈불인마는 막무가내였다.
결국 나중에는 형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하고 청운은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