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비검무-30화 (30/184)

030화 강호의 삶이란 감당할 수 없는 것만을 감당해야 한다.

갈증이 났다.

하지만 이건 물을 마신다고 해결되는 그런 갈증이 아니었다.

청운은 자신이 강호에 나온 이후 겪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차근차근 되짚어 보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무수한 위기와 뜻하지 않은 몇 번의 기연 그리고 목숨을 건 혈투.

모든 사건의 시작과 발발은 자신의 의지와 계획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사건의 진행과 결과 또한 자신의 예상과 짐작을 훨씬 뛰어넘는 것들이었다.

그 모든 사건 중에서도 임소아와의 하룻밤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비록 그 일이 자신이 음약에 중독된 상태에서 벌어진 불가항력적인 사건이라 하더라도 어쨌든 의지로 이겨 냈어야만 했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마치 한 마리 짐승처럼 이성을 상실한 그날의 자신을 생각할 때마다 청운은 막막한 죄책감에 휩싸였다.

강호의 삶이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을 감당해야만 자신의 존재를 간신히 지킬 수 있는 도산검림이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혹독하고 지독한 경험을 해야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모두 끝날지…….

청운은 복수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한적하고 고즈넉한 곳에 칩거한 채 남은 평생을 책이나 읽으며 조용히 살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자신이 시작한 일 때문에 그건 더욱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지금 당장 자신의 가슴속에서 뜨겁게 소용돌이치는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열기를 식히고 싶었다.

청운은 자신의 눈앞에 가장 가까이 보이는 주루로 뛰다시피 들어갔다.

청운은 왁자한 일층을 피해 이층 구석 조용한 자리에 앉자마자, 삶은 돼지고기와 독한 죽엽주 한 병을 시켰다.

연거푸 서너 잔을 들이켜자 가슴 속 열기가 조금 식는 것 같기도 했다.

삶은 고기를 몇 점 우적우적 씹어 삼키고는 다시 연거푸 서너 잔을 더 마셨다.

목구멍이 확확 거리는 독주였지만 청운은 거의 맹물을 마시듯 입속으로 연신 독주를 털어 넣었다.

자책감에 빠진 청운이 술로서 자신을 학대하고 있을 때 등 뒤에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누군가가 다른 이에게 온갖 욕지기를 퍼부으며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청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시던 술만 계속 마셨다.

“이런, 미친 영감탱이를 봤나. 왜 하필 우리가 예약한 자리에 퍼질러 앉아 술을 처마시지. 당장 비켜라. 곧 공자님이 당도하신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어떤 젊은 사내가 누군지 모르는 늙수그레한 노인에게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예약한 자리를 확보해 놓지 않은 점소이를 불러 철썩철썩 귀때기를 올려붙이는 소리도 들렸다.

“미친 건 내가 아니라 네 놈들이다. 감히 누구에게 그 따위 욕을…….”

노인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마치 깊은 우물에서 올라오는 바람 소리처럼 으스스한 한기가 배어 있었다.

목소리의 기운만으로 대단한 고수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무슨 사단이 곧 터질 것 같았다.

청운은 짜증이 날 대로 났다.

하필 자신도 알 수 없는, 속에서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불길을 좀 식혀 보려고 들어온 주루였다.

그런데 마치 자신이 오기를 날 받아놓고 기다리기나 한 듯,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이런 성가신 일이 벌어진단 말인가.

‘하긴 무림에선 그 누구에게도 조용한 밤은 없는 법이지.’

청운이 혼잣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시 술잔을 들어 입으로 가지고 가는 찰나.

등 뒤에서 와—장—창, 하며 창호지문이 박살나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누군가 비명을 지르며 창밖으로 철퍼덕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곧바로 박살난 창호지문의 부서진 파편이 청운이 독작하고 있던 탁자까지 날아와 박혔다.

청운은 도저히 더 이상 술을 마실 수가 없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청운이 밖으로 나가기 위해 자신 앞에 나뒹구는 탁자를 한쪽으로 밀어젖혔을 때.

깡마른 얼굴에 염소수염을 기른 오십 대 중반의 노인이 다짜고짜 네 놈도 한패지 하며 청운에게 일장을 날렸다.

엄청난 장력이 청운의 가슴을 짓이길 듯이 덮쳐 왔다.

청운은 급하게 공력을 끌어올려 노인의 장력을 맞받아치며 분통을 터트렸다.

청운이 급작스레 공격을 당한 측면도 있었지만, 노인의 공력이 얼마나 심후한지 청운은 뒤로 주르르 밀려나며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청운은 노인의 장력을 맞받아친 양팔에 묵직한 통증과 함께 가슴에도 둔중한 아픔을 느꼈다.

속이 몹시 울렁거리더니 목구멍을 타고 올라온 비릿한 뭔가가 입안을 적셨다.

단 한 수의 교환으로 청운은 적잖은 내상을 입은 것이다.

청운은 너무나 화가 난 나머지 노인을 향해 막말을 쏟아냈다.

“노인장, 당신은 눈도 없고 머리도 없소. 저들과 아무 관련도 없는 나에게 이게 무슨 짓이오.”

재차 청운에게 공세를 취하려던 노인이 청운의 말에 잠시 멈칫하더니 창밖으로 신형을 날리며 한 마디 했다.

“그건 나중에 계산하자. 지금은 저놈들을 징치해야 하니까.”

청운도 노인을 뒤따라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장내에는 열댓 명의 장한들이 검을 빼들고 노인을 반원형으로 에워싸고 있었다.

구경 중에 불구경과 싸움 구경이 최고라고 하더니 주루 앞 대로에는 벌써 수십 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은근히 기대하며 주변에서 웅성거리며 서 있었다.

야밤인데도 불구하고 화려한 용무늬가 수놓아진 섭선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아직 앳되어 보이는 청년 하나가 무리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비단 장삼을 걸친 모습이 척 보기에도 세도가의 귀공자 같았다.

바로 그때 그 청년 옆에 시립하고 있던 장한 하나가 살벌하게 검을 허공에 크게 한 번 휘저으며 소리를 질렀다.

“이 겁대가리 없는 영감탱이, 이 공자분이 감히 누구신지 알고나 나대느냐. 이분으로 말씀드리자면 현 병부시랑님의 둘째 자제분이시자 무당 청허자님의 속가제자 되시는 분이시다. 영감, 이제야 당신이 뭘 잘못했는지 확실히 깨달았겠지.”

“흐—흐—흐. 미쳐도 한참 미친 놈 같으니. 청허자가 직접 와도 내 앞에서 그런 불손한 태도를 취하지는 못한다.”

장한의 말이 같잖다는 듯, 으스스한 목소리로 이죽거리던 노인이 장한을 향해 허공에 손을 한 번 그었다.

그러자 갑자기 장한이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어느새 검을 들고 있던 그의 오른팔이 어깨 부근에서 잘려져 장한의 발아래 나뒹굴고 있었다.

팔이 잘려 나간 부위에선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며 금세 장한의 주변을 피바다로 만들었다.

다급하게 지혈을 한 장한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나면서 아까와는 전혀 다른 공손하면서도 겁먹은 태도로 더듬더듬 노인에게 물었다.

“노인장은 도대체 누구요. 우리에게 이런 짓을 저지르고도 무사할 것 같소.”

마치 살과 뼈를 발골하고도 남을 것 같은 살벌한 눈빛으로 무리를 노려보던 노인이 장한의 말을 무시하듯 툭 한마디를 내뱉었다.

“내가 누구냐고. 네 놈은 알 자격이 없다. 네 놈들은 모두 오늘 이곳에서 목숨을 내놓으면 된다. 그러면 더 이상 궁금할 것도 없을 것이다. 흐—흐—흐.”

자신이 내뱉은 말이 채 끝마치기도 전에 노인이 오른손을 허공에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노인이 공력을 끌어올리자 직접 눈앞에서 보고 있으면서도 눈을 의심할 정도의 기괴한 광경이 벌어졌다.

놀랍게도 허공에 치켜든 노인의 장심에서 핏빛보다 더 붉은 혈불의 형상이 거짓말처럼 현현했다.

점차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혈불의 모습이 점점 또렷해지고 색도 점점 더 붉게 짙어졌다.

급기야 혈불이 핏빛의 혈안을 번쩍 떴다.

그 광경은 주변의 사람들에게 오싹한 소름과 함께 끝 모를 공포심을 자아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그 광경에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을 떡 벌리고는 행여 무슨 사태가 벌어질지 몰라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때 무리 중의 누군가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혈불인마의 혈불마장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인가.

‘혈불인마’는 물로서 이기지 못할 것이 없다는 장강의 ‘귀수하백’ 그리고 세상의 모든 짐승을 종주라는 만수림의 ‘만수귀왕’과 더불어 무림의 삼대 괴인으로 불린다.

무림삼괴는 비록 강대한 세력이 없이 독자적으로 움직이지만.

구대문파는 물론 사파연합체인 <사련>과 <마련>에서도 한 수 접어주는 인물들이었다.

무림삼괴는 무공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뿐 아니라 성격도 워낙 괴팍해서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는 문파 전체가 낭패를 보기 십상이기 때문이었다.

혈불인마는 무림삼괴 중 첫째였다.

혈불인마는 대막의 살수 용병 집단인 <흑사풍>에 의해 쑥대밭이 된 마을을 지나던 서장 천룡사의 천을선사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어 갓난아이 때부터 사미승으로 천룡사에서 자랐다.

그는 어릴 적부터 무공에 천재적인 소질을 보여 스승인 천을선사로부터 많은 가르침과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너무 지나침은 다소 모자란 것보다 못한 것.

혈불인마는 무공에 대한 관심이 너무 많아 열대여섯 살쯤 그 위력과 수법이 너무 악독하고 지독해 천룡사의 금역에 봉인해 놓았던 ‘혈불마장’을 지하 동굴에서 우연히 찾아내 익히고 말았다.

마성에 빠진 혈불인마는 그 길로 <흑사풍>의 본거지로 쳐들어가 단신으로 <흑사풍>을 몰살시켜 버렸다.

다행히 흑사풍이 대막에서 워낙 많은 악행을 저질러 온 집단이기에 그가 천룡사에서 파문되는 것으로 사태는 대충 마무리되었다.

그 후 삼십여 년 간 혈불인마의 행방이 묘연했던 그가 이곳 중원에 처음으로 본모습을 드러낸 것이니 어찌 사람들이 놀라지 않겠는가.

그가 바로 ‘혈불이 눈을 뜨면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피가 흐르고 살이 터져 죽는다.’ 라는 전설의 주인공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청운은 천상 자신이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나서지 않으면 자칫 심마에 빠진 혈불인마가 오늘 밤 이곳을 피바다로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운이 불쑥 앞으로 나서며 노인에게 공손하게 말했다.

“노야, 그만 노여움을 푸시지요. 저들이 모르고 노야에게 무례를 저지른 것이니 가벼운 징계로 마무리하시지요.”

“네 놈은 또 누군데 겁대가리 없이 감히 내 일에 나서는 게냐. 나서길… 네 놈도 저들과 한패냐, 아니면 썩 꺼져라.”

분기탱천한 혈불인마가 청운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귀찮다는 듯 말했다.

청운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장내로 성큼 뛰어들었다.

그리고 혈불인마를 똑바로 쳐다보며 아까보다 더 공손하지만 더 단호하게 좀 전에 했던 말을 또 했다.

“노야의 기분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지금 저들도 충분히 후회하고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 이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모두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그만 노여움을 푸시지요,”

청운의 말을 들은 혈불인마가 청운을 쏘아보며 일갈했다.

“정 그렇다면 좋다. 저들의 귀 하나를 자르는 것으로 마무리하겠다. 대신 네 놈이 나의 삼장을 받아내야만 한다. 나와 시비가 얽힌 자는 누구든지 예외는 없이 그래야 한다. 그것이 내 규칙이다. 그것이 싫으면 지금이라도 꼬리를 말고 사라져라.”

“그게 귀하의 규칙이라면 그렇게 하겠소. 대신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청운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혈불인마는 한 손을 허공에 들어 올려 자신과 대치하고 있던 사내들을 향해 가볍게 내저었다.

그러자 장내 여기저기서 윽, 악, 크윽 하는 신음과 비명이 일시에 터져 나왔다.

혈불인마는 단 한 번의 가벼운 손짓으로 자신을 에워싼 사내들의 한쪽 귀를 모조리 잘라 버린 것이다.

등골이 오싹하고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장면이었다.

졸지에 자신의 한쪽 귀를 잃어버린 사내들이 공포에 질린 채 꼬리를 만 똥개처럼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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