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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비검무-28화 (28/184)

028화 당신은 나를 말리지 말았어야 했어요.

청운은 이번 공격으로 싸움을 끝낼 심산이었다.

흑백쌍마는 갑자기 돌변한 청운의 공세에 깜짝 놀랐다.

그들은 자신들이 발출한 장력과 청운이 뿜어낸 검기가 직접 부닥치기 전에 피해보려고 했지만 이미 때가 늦어버렸다.

퍼—퍼—펑—콰—콰—쾅.

청운의 검기와 흑백쌍마의 장력이 맞부딪치자 우레 같은 폭음이 터지며 주변의 건물들이 통째로 날아가고 허공에 그 잔해가 난무했다.

그 충격에 하오문의 분타로 쓰이던 가건물이 흔적도 없이 날아갔다.

심지어 싸움판에서 서너 장이나 떨어져 있던 흑오파와 하오문의 무리들까지 비틀거리며 뒤로 나자빠지거나 입에 실낱같은 피를 흘리며 담벼락에 처박혔다.

섭평과 짜귀는 그래도 무리들 중에서 나름 고수인지라 뒤로 주르륵 미끄러졌기는 했다.

그러나 심한 내상을 입지는 않았는지, 금세 자세를 고쳐 잡고는 청운과 흑백쌍마의 결과에 관심을 집중했다.

번갯불의 눈 같은 검의 강기와 밤의 독무 같던 장력의 힘에 한바탕 요동쳤던 주변의 대기가 잠잠하게 가라앉았다.

그러자 누가 승자이고 패자인지 명확히 판가름 났다.

청운은 입고 있던 옷만 군데군데 찢어진 채 자신의 검을 가슴 앞에 비슷하게 세우고 형형한 눈빛으로 장내를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반면에 흑마는 왼팔이 몸과 분리된 채 피를 철철 흘리며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백마는 가슴과 오른쪽 허벅지가 쩍 갈라진 채 땅바닥에 주저앉아 연신 피를 토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한 번 쓱 둘러본 청운은 나지막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흑백쌍마, 그나마 당신들의 목숨을 당장 거두지 않은 건 내가 베푸는 마지막 호의다. 앞으로는 당신들의 죄를 뉘우치며 평생 참회하는 삶을 살아라. 죽기 싫으면 지금 당장 이들을 데리고 여기서 꺼져라.”

우르르 앞으로 몰려나온 흑오파의 무리들이 흑백쌍마를 대충 지혈시켜 업은 후 앞서거니 뒤서거니 자리를 도망쳤다.

그때 청운은 다시는 흑오파가 하오문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따끔한 징계를 내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청운은 막 자리를 뜨려는 짜귀를 돌려세운 후, 검을 한 번 살짝 허공에 긋는 시늉을 했다.

삼장 가까이나 떨어져 있던 짜귀가 갑자기 돼지 멱따는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오른손을 오른쪽 귀에 갔다 댔다.

오른쪽 귀가 떨어져 나간 자리를 감싸 쥔 짜귀의 오른손에서 피가 철철 흘러내리고 있었다.

혼비백산한 짜귀의 무리들이 그를 부축한 채 너나없이 줄행랑을 놓았다.

달아나는 그들 무리 속에서 누군가가 저주처럼 내지르는 소리가 밤바람을 타고 공허하게 주변을 맴돌았다.

—내 죽지 않는다면 반드시 이 원한을 몇 배로 갚아 주리라.

하오문의 섬서분타를 떠난 청운은 곧바로 장안으로 향했다.

대륙표국의 총단이 바로 장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참에 청운은 대륙표국을 직접 한번 털어볼 참이었다.

청운은 무림맹이나 하오문의 정보조직을 최대한 가동해도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없다면, 직접 정보를 구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청운은 대륙표국에 오기 전 낙양의 하오문분타에 잠시 들러 나름의 준비를 했다.

그리고 하오문도들이 조사해 온 대륙표국의 지형과 건물 구조를 철저히 익혔다.

물론 한계는 분명 있었다.

밖에 드러난 큰 전각들의 구조는 충분히 숙지했지만, 어떤 집단이든지 비밀은 보이지 않는 은밀한 곳에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머지는 자신이 직접 잠입해 알아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대륙표국은 사해표국, 중원표국과 더불어 중원의 상권을 크게 삼등분하고 있었다.

그들 표국의 총단에는 짐꾼을 제외한 표사들만 해도 거의 수백이나 상주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 중에 수석표사들 대부분이 무림에서 일류 고수에 속하고, 특히 화산파의 속가제자인 총표두 태청검 방천호의 무공수위는 거의 절정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 외에도 청운이 모르는 고수들이 수두룩했다.

대륙표국은 용담호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청운은 아무리 위험해도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조심해야 할 것은 자칫 벌집을 잘못 건드려 오히려 모든 걸 망쳐버리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청운은 단번에 자신이 원하는 걸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었다.

여러 번의 목숨을 건 격전을 치르면서 청운은 자신의 검에 대한 자부심과 믿음이 부쩍 깊어졌다.

특히 최근에 우연히 얻은 [묘묘보허]를 통해 익힌 신법 또한 이제 거의 경지에 올랐다고 자신했다.

대륙표국의 규모는 하남표국과는 아예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입을 딱 벌어지게 할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 고루거각이 즐비했다.

어두운 밤에 대충 보아도 이렇게 엄청난데 대낮에 본다면 그 규모가 틀림없이 더욱 웅장할 것이다.

대륙표국은 규모가 큰 만큼 표국의 주변을 경계하는 경비병의 숫자도 많았다.

워낙 촘촘하게 번을 서고 있어서 내부로 침투하기에 만만치 않았다.

여러 가지 궁리를 하던 청운은 지나가던 길고양이 한 마리를 사로잡아 정문 가까이에 있는 담장 너머로 일부러 시끄러운 소리가 나게 던졌다.

그러자 무사들이 누구냐, 소리치며 우르르 소리가 난 쪽으로 몰려갔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청운은 묘묘보허를 전개해 마치 연기가 굴뚝을 빠져나가듯 순찰자의 눈을 피해 담벼락을 넘었다.

그리고 곧장 건물의 지붕과 지붕을 가로질러 한 마리 야조처럼 날아갔다.

이어 곧장 불빛이 새어 나오는 전각의 지붕에 도달했다.

지붕의 한가운데 엎드린 청운은 귀를 기와에 댄 후 청력을 최대한 돋우었다.

여자의 깊은 한숨 소리가 얼핏 들렸다.

‘이 깊은 한밤중에 세상이 꺼질 것 같은 여자의 한숨 소리라니.’

청운은 자신이 이곳에 잠입한 목적을 잠시 망각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청운은 자신이 엎드린 곳의 기왓장을 소리 없이 들어냈다.

기와를 이기 위해 싸리나무를 엮은 산자를 수도로 살며시 도려내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은은한 사향 냄새가 감도는 강한 지분 냄새가 청운의 코끝을 감미롭게 자극했다.

그곳은 여인의 규방이었다.

하늘거리는 연분홍빛 비단 잠옷을 걸친 여인이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전신이 다 비치는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청운은 젊디젊은 외간 사내가 농염한 여인의 규방을 훔쳐보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 잠시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하지만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에 청운은 도대체 무슨 일인지 조금만 더 지켜보기로 했다.

몸매의 굴곡이 거의 다 비치는 하늘하늘한 연분홍빛 잠옷을 입고 거울 앞에선 농염한 미부의 자태를 훔쳐보던 청운은 자신이 지금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라는 생각에 얼굴이 확확 달아올랐다.

청운은 서둘러 자리를 떠야 한다고 머릿속으로는 골백번을 더 결심했다.

하지만 결심은 계속 결심으로만 끝나고 말았다.

아무리 배움이 많고 학식이 깊어도 마음과 다른 젊디젊은 사내의 몸은 매번 마음을 배반할 뿐이었다.

마음은 청춘의 끓는 피를 이기지 못할 때가 언제나 더 많은 법이다.

아무도 그걸 함부로 나무랄 수는 없다.

청운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좀처럼 자리를 뜰 줄 몰랐다.

이십 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여인은 어디 한군데 빠진 곳이 없는 아름다운 얼굴과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거울을 통해 보이는 여인의 미모는 마치 물속에 잠긴 연꽃을 보듯 직접 대하는 것보다 더 신비스럽고 아름답게 보였다.

여인은 현실이 아니라 마치 거울 속에 붙잡혀 있는 듯 한동안 미세한 움직임조차 없었다.

그러다가 여인은 갑자기 어떤 생각을 떨쳐내듯 머리를 몇 번 세차게 가로젓더니 방바닥이 꺼질 듯이 깊고 깊은 한숨을 연달아 내쉬었다.

그리고는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거울 속의 자신에게 혼잣말을 읊조렸다.

“이제는 더 이상 사는 의미가 없어. 내가 왜 더 살아야만 하는지 내가 나를 설득할 수가 없다. 이제 모든 걸 끝내자. 더 이상 미련도 아쉬움도 없다.”

여인이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거울 속에는 여인 자신뿐 아니라 그 여인이 애용하는 색색의 화장품과 그것들을 무람하게 떠받치고 있는 화장대도 들어 있었다.

화장대 위에는 놀랍게도 반쯤 뽑다 만 비수의 시퍼런 칼날도 함께 들어 있었다.

그걸 본 청운은 갑자기 손에 진땀이 배어났다.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말리자니 오늘 이곳에 침투한 일이 헛수고가 되는 것은 물론, 자신의 행적이 발각되어 한바탕 소동이 일 것 같았다.

하지만 말리지 않자니 앞날이 구만리 같은 저렇게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것을 눈앞에서 빤히 보고도 못 본 척 눈을 감아야만 한다.

청운에게 둘 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말리자니 자신이 오늘 의도한 일을 실패할 것이 불 보듯 뻔하고.

그냥 두 눈을 질끈 감자니 이 세상에서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 사람의 생명이라고 그동안 자신이 일생을 견지해 왔던 가치관이 송두리째 무너질 판국이었다.

청운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판단의 갈등과 고민에 잠시 빠져있던 순간.

갑자기 여인이 비수를 뽑아 주저 없이 자신의 목을 찔러 갔다.

절체절명의 순간 청운의 머리가 아니라 청운의 몸이 먼저 반응하고 말았다.

다급하게 발출한 청운의 지풍에 몇 군데 혈이 점혈 당한 여인은 비수로 자신의 목을 찔러가던 그 자세 그대로 돌처럼 굳어 버렸다.

소리 없는 그림자처럼 방 한가운데 내려선 청운이 여인에게서 비수를 빼앗고는 점혈을 풀어주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여인이 간신히 말을 더듬거렸다.

“다, 다… 당… 신은 대체 누구지요. 어떻게 내 방에 들어왔어요. 나… 날… 어떻게 하려는 거지요. 원하는 대로 하세요. 어차피 죽을 목숨. 이깟 몸뚱이가 나에게 무슨 가치가 있겠어요.”

청운은 급한 마음에 여인의 규방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모든 것이 난감했다.

자신이 저 여인이라고 생각해도 이 상황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 청운은 여인을 진정시키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아… 아닙니다.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이곳에 볼일이 있어 잠시 왔다가 상황이 너무 급박해서 이런 무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다만 제 눈앞에서 낭자가 자결을…….”

여인이 청운의 말을 중간에 끊으며 차갑게 응수했다.

“저는 낭자가 아니어요. 국주의 세 번째 첩이에요. 부모님이 빚을 못 갚아 이 년 전 이곳에 팔려 왔어요. 국주는 남편이면서 원수이기도 하지요. 당신은 나를 말리지 말았어야 했어요. 나는 이미 오래전에 삶의 의미를 잃은 사람입니다.”

“…….”

“그동안은 집에 돈을 부쳐야 했기에 더러워도 참고 살았지만 얼마 전 전쟁 통에 부모님과 남동생마저 잃었어요. 이제 이런 세상에 아무 미련이 없어요. 지금 당장은 당신이 나를 살렸는지 모르지만 결국 답은 정해져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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