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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비검무-21화 (21/184)

021화 마객의 초대를 받다.

노야의 집은 주변의 마을과 조금 떨어진 외딴곳에 있었다.

노야의 말대로 그의 집은 그 규모가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외부는 수령을 가늠키 어려운 두 그루의 회화나무가 집의 운치를 더하고 있었다.

내부는 자긍심이 있으면서도 오만하지 않은 그의 성품과 인품을 반영하듯 수수하지만 깔끔한 정원 그리고 두 개의 석등으로 고풍스럽게 단장되어 있었다.

노야의 이름은 황윤이었고 손녀의 이름은 황연연이었다.

노야는 평생을 관직에 있다가 몇 년 전 자식 내외가 역병으로 죽자 손녀를 돌보기 위해 관직에서 물러나 산수 좋은 이곳에 정착했다고 했다.

한림학사까지 지낸 그의 학식과 인품에 청운은 연신 감복했다.

황윤 또한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깊이를 갖춘 청운의 학문과 예술적 감식안에 연거푸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리고 그는 청운 같은 인재가 관직에 출사했으면 나라를 위해 정말 큰일을 많이 했을 것이라 하면서 아깝다, 정말 아깝다, 를 연발했다.

황윤은 청운과 같은 인재를 몰라보는 이런 조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쇠락할 것이라고 저주했다.

* * *

황연연은 걸어오느라 피곤했는지 어른들의 대화에 몇 번 엉뚱한 참견을 하더니 그새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녀는 노야의 무릎을 베고 쌕쌕거렸다.

황윤이 잠든 손녀를 다른 방에 눕혀 놓고 오더니 청운에게 별채에 있는 서재를 구경시켜 주었다.

청운은 깜짝 놀랐다.

그의 서재는 거의 서점 수준이었다.

도가, 주역, 불경에 이르기까지 별의별 책들이 다 있었다.

심지어 기관토목과 병법서도 있었다.

태반은 청운도 읽은 것들이긴 했지만 노야의 서재에서 다시 대하니 모든 게 새삼스러웠다.

청운은 호기심에 책을 닥치는 대로 빼보고는 다시 제자리에 집어넣기를 반복했다.

청운은 선천적으로 자신이 모르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주로 경전 쪽의 책들을 유심히 보았다.

그러다 청운은 이상한 책 한 권을 발견했다.

[다라]이라는 글씨가 표지에 적혀 있었다.

앞의 두 글자는 간신히 읽을 수 있었는데 뒤의 두 글자는 도무지 무슨 글자인지 읽을 수조차 없었다.

초기 범어로 된 것 같았다.

청운도 범어를 조금 알지만, 초기 범어에 대해서는 거의 문외한이었다.

그래서 책의 제목도 간신히 읽을 수 있었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양피지로 된 표지가 닳고 닳아 거의 헤져 있었다.

더더욱 이상한 것은 책의 뒤쪽 반은 아무 글자도 없었다.

청운은 별 이상한 책도 다 있구나, 하고 속으로 생각하고는 대충 살펴본 후 다시 꼽으려고 했다.

그때 차를 마시다 말고 황노야가 청운에게 말했다.

“그 책, 참 이상하지 않나. 그 책은 황궁에서 몇 년에 한 번씩 새 책이 대량으로 들어오면 더 이상 필요 없는 책을 버릴 때 섞여 나온 것들 중 하나인데, 그 당시 내가 범어에 조금 관심이 있어 버리지 않고 집으로 가져온 것이네.”

“그렇습니까.”

“범어로 써진 것 같은데 어찌 보면 범어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불경 같기도 한데 꼭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무슨 책이 또 절반이나 글자도 없이 텅 비어 있기도 하고…….”

“…….”

“나도 몇 번이나 해독하려고 하다가 그만 포기했네. 도통 재미도 없고 읽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기도 해서. 관심이 있으면 자네가 가지게.”

“아닙니다, 노야. 제가 어찌 노야의 귀한 서책을…….”

청운은 진심을 담아 거절했다.

“아닐세, 나에게는 정말로 필요 없는 책이네. 나는 이제 손녀만 돌보기도 피곤한 나이네. 이것도 인연인데, 자네를 만난 기념으로 내가 선물함세. 그리고 사양하지 말고 다른 책들도 얼마든지 가지게.”

황윤도 진심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청운은 자신이 너무 거절하면 황윤이 겸연쩍어 할 것 같아 고대의 토목기관학과 진법 그리고 엉뚱하게도 인체의 근육을 내공으로 바꾸어 용모를 변하게 만드는 용형술이 함께 수록되어 있는 [만역만변]이라는 제목의 책을 한 권 더 고른 후 황윤에게 고맙다고 정중히 감사의 인사를 했다.

황윤이 입가에 흐뭇한 웃음기를 띤 얼굴로 말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보지는 않았구먼. 그래도 욕심이 그리 없어 이 험난한 세상을 어찌 해쳐나갈지, 자, 이리 와서 남은 차나 마저 들게. 그리고 체통 없는 부탁이지만 다음에 이 길을 지날 때면 나와 연연이를 잊지 말고 한 번 들러주시게.”

“어찌 잊겠습니까.”

“하하, 혹시라도 그때 내가 죽고 없으면 내 손녀도 좀 보살펴주시고. 어이구, 내가 또 대책 없이 낯선 사람에게 괜한 주책을 부렸나 보네. 괘념치 마시게.”

그의 말에서 마치 인생을 다 산 사람의 회한 같은 씁쓸함이 묻어나 청운은 가슴이 아려왔다.

“노야, 내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약조하겠습니다.”

* * *

그새 정든 연연이 깨어나면 아무래도 한바탕 울고불고 할 것 같아 청운은 이른 새벽에 초대에 고맙다는 편지를 탁자에 남겨두고는 황윤의 집을 떠나왔다.

묘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새벽달이 회화나무에 반쯤 걸려 있었다.

그길로 곧바로 청운은 진령산맥으로 내달렸다.

산길에 사람이 없을 때는 경신술을 전개하고 사람이 있을 때는 그냥 걸었다.

거의 한나절을 그런 식으로 몇 개의 산봉우리를 넘었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노숙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청운은 찬 이슬이라도 피할 수 있는 적당한 장소를 찾기 위해 주변을 탐색했다.

그때쯤이었다.

참으로 이상한 광경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인적이 끊기고 석양이 스멀스멀 내려앉는 외진 산길 한가운데에 흑의에 죽립을 쓴 사내가 석양을 등진 채 술상을 차려놓고 독작을 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탁자와 의자는 바로 옆에 있는 고목을 베어 만든 것 같았다.

그런데 너무나 이상한 것은 사람은 혼자인데 술잔은 두 개였다.

청운은 속으로 세상에 참 별난 사람도 다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냥 스쳐 지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그 죽립의 흑의인이 돌연 청운에게 말을 걸었다.

낮은 저음의 묘한 울림이 있는 목소리였다.

“공자, 아무리 갈 길이 바빠도 내 술 한 잔 받고 가시게. 인생 뭐 별것 있다고 그리 걸음이 바쁘신가.”

청운은 설마 자신에게 한 말이 아니겠지, 하면서 그냥 가던 길을 재촉하려했다.

그러다가 혹시나 해서 흑의인에게 되물었다.

“설마 나에게 한 말씀은 아니지요.”

죽립인이 예의 그 낮고 묘한 저음으로 대답했다.

“지금 이곳에 공자 말고 다른 누가 있습니까. 하남의 강청운 공자 맞지요? 이리로 올 것이란 연락을 받았지요. 자, 어서 이리 와서 한 잔 받으시오. 이 술에는 그 어떤 독도 없소. 그냥 술술 넘어가는 술이오.”

청운은 속으로 깜짝 놀랐지만 애써 태연한 척 좀 더 그에게 다가가 다시 물었다.

“도대체 누가 날 안단 말이오. 그리고 내가 이 길을 지난다는 걸 또 어찌 알았소.”

“이 술잔을 받으면 모든 걸 대답하리라.”

흑의의 사내는 다짜고짜 술을 한 잔 따른 후 술잔을 청운의 코밑에 들이밀었다.

청운은 설마 자신에게 무슨 짓이야 하겠냐며 속는 셈치고 사내가 주는 술을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그 순간 사내는 크게 한바탕 웃더니 바로 머리 위에 있는 고목의 가지를 향해 손을 한번 휘젓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그의 신법이 어찌나 표홀한지 청운은 마치 대낮에 유령을 본 것 같았다.

청운은 뭐 이런 싱거운 사람이 다 있을까, 생각하며 발길을 옮기려 했다.

바로 그 순간 희한한 광경이 청운의 눈앞에 펼쳐졌다.

흑의인이 손짓을 했던 고목에서 흰 비단에 마치 방금 뽑은 피로 쓴 듯한 붉은 색의 글자가 적힌 두 장의 두루마리가 청운의 눈앞에 주르르 흘러내렸다.

[天을 엿본 죄, 오직 죽음뿐이다. 어둠이 내려 숲과 바위가 숨을 멈추면 밤을 부유하던 악령이 너를 찾으리라.]

새하얀 비단에 피를 토한 것 같은 붉은 저주.

청운은 생전 처음 접하는 사이하고 요사한 광경에 온몸에 소름이 돋고 등골이 오싹해졌다.

하지만 청운은 강호란 원래 일반인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황당하고 괴이한 기사가 많은 곳이라 생각하며 하룻밤 잠자리가 될 만한 적당한 곳을 다시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 청운은 소나무 몇 그루가 앞을 가려주고 있고 큼직한 바위가 서로 맞대어 있는 적당한 곳을 발견했다.

주변의 풀들을 베어 대충 깔고는 습기를 막기 위해 준비한 기름먹인 보료를 그 위에 깔고는 벌러덩 드러누웠다.

나중에 닥칠 일을 미리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다음에 벌어질 일은 미리 대비할 수도 없고, 해봤자 그 일이 자신의 예상대로 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다 청운은 잠을 청했다.

종일 산길을 달린 피로 탓에 금세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얼마나 잤을까.

청운은 코를 심하게 자극하는 역한 냄새에 잠을 깼다.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주섬주섬 옷매무새를 챙긴 청운이 밖을 내다봤다.

밤보다 더 시커먼 안개가 주변에 가득했다.

자신이 밤 속의 밤에 빠진 것 같았다.

마치 시체를 태우는 것 같은 역겨운 냄새는 그 안개와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청운은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청운은 자신이 벗어날 방향을 가늠하기 위해 주변에서 가장 높아 보이는 고목의 우듬지로 훌쩍 올라섰다.

하지만 나무 위의 상황도 땅과 마찬가지였다.

난감했다.

어디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당황하고 있을 때, 아득히 먼 곳에서 마치 쇳조각으로 철판을 긁어대는 것 같은 기분 나쁜 소리가 점점 청운이 있는 곳을 향해 육박해 들어오고 있었다.

그 소리는 이상한 요령을 흔드는 소리 같기도 하고 소고를 치는 소리 같기도 했다.

기분 나쁘게 사람의 청각을 울리고 두드리는 그 소리는 끝을 알 수 없는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호곡성 같기도 했다.

도대체 이게 뭔 사단이지, 하며 난감해하는 사이.

그 소리는 이미 청운의 지척에서 들려왔다.

아연 긴장한 청운이 청력을 최대한 끌어올리며 그 소리의 근원을 찾았다.

하지만 그 괴이한 소리는 어느 특정한 방향이 아니라 사방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더 기분 나쁜 것은 그 사이하고 음산한 소리가 마치 자신을 포위해 조여 오듯 점점 자신을 중심점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순간 청운은 하오문의 비고에서 본 [무림편람]의 한 귀퉁이에 기록되어 있던 아주 오래된 어떤 무림의 일화 하나를 간신히 떠올렸다.

‘마객’과 ‘귀혼진.’

그랬다.

불그스름한 석양이 내려앉던 산길에서 청운에게 다짜고짜 술을 권한 자는 자신이 점찍은 자를 죽음으로 초대하는 ‘마객’이었다.

그 마객이 권하는 술은 죽음의 굿판에 초대하는 초대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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