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화 황 노야와의 하룻밤
“마약과 인신매매는 물론 심지어 무기를 팔아먹기 위해 국가 간의 전쟁도 곧잘 부추깁니다. 한마디로 악의 축이지요. 초면에 너무 재미없는 얘기만 했군요. 자, 식기 전에 차나 듭시다.”
하오문주는 정보기관의 수장답게 여러 방면에 박식했다.
하오문주의 말을 들을수록 청운은 문제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몹시 난감해졌다.
그 문제는 나중에 다시 고민하기로 하고 청운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다른 질문을 했다.
“문주님, 하오문의 분타가 중원 어디에 있는지 좀 알았으면 합니다. 그래야 제가 활동하기에 편할 것 같습니다.”
“사자님, 그 점은 전혀 염려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하오문은 비록 강호를 진동시킬 만한 고수들이 모인 집단은 아니지만 중원 도처에 눈과 귀가 산재해 있는 문파입니다.”
“…….”
“사자님이 어디를 가시든지 원하시기만 하면 언제든지 정보를 접할 수도 있고 연락을 주고받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하오문은 별도로 어떤 특정 장소에 분타를 두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냥 분타주가 옮기는 곳이 바로 분타입니다.”
“네.”
“즉, 사람이 곧 분타이지요. 참, 그리고 미리 말씀을 드립니다만 아무래도 지금부터 사자님이 하시는 일에 위험이 따를 수 있기에 저희들이 곧 사자님의 식구들을 아무도 모르는 안가에 모실 계획입니다.”
하우명 총사는 날카로운 인상만큼이나 일 처리도 꼼꼼한 사람 같았다.
다시 문주가 입가에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청운에게 말을 건넸다.
“오늘은 새로운 호법사자를 맞이한 기쁜 날이라 내당에 조촐한 술상을 봐놨습니다. 자, 나가시지요.”
문주가 먼저 자리에서 살포시 일어나 앞장섰다.
* * *
어느덧 계절은 급속도로 겨울로 치닫고 있었다.
봄에서 가을까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해낸 나무들이 마지막 남은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자신이 애써 키웠던 잎들을 하나하나 제 발아래 떨구고 있었다.
그 스산하고 황량한 모습은 아무것도 없이 오직 맨몸으로 칼 같은 추위에 당당히 맞서기로 한 나무들의 비장한 삶의 의지를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 풍경을 무심히 바라보는 청운의 내면에 아릿한 무상의 비애를 불러일으켰다.
나무들은 그렇게 당당히 맞서 견딘 극한의 시간을 제 몸속에 한 줄 나이테로 꼼꼼하게 그린다.
자신이 어떤 세월을 견디고 여태껏 살아남았는지 단호히 증거하기 위해.
하오문에 머물러 있던 동안, 청운은 매일 문주와 총사를 만나 현재의 무림정세와 앞으로의 무림 판도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하오문주와 총사는 정보를 다루는 단체의 수장들이어서 그런지 정말 강호의 대소사에 대해 아는 게 많았다.
청운은 그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정보각에서 알았던 정보보다 훨씬 더 많은 유익한 정보를 얻었다.
정보각에서 얻은 정보가 말 그대로 이미 지나간, 즉 생명이 거의 사라진 죽은 정보라면.
문주와 총사로부터 얻은 정보는 너무도 생생한, 즉 살아서 펄펄 뛰는 갓 잡아 올린 생선 같은 정보였다.
물론 문주와 총사도 청운의 박식함과 깊이에 감탄한 눈치였다.
청운은 오랜만에 괜찮은 사람들과의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운은 그들에게 자신의 무공 내력을 솔직히 털어놓지는 못했다.
자신도 자신에게 갑작스레 일어난 일을 믿기 어려운데 어떻게 그들보고 그걸 다 믿으라고 한단 말인가.
일전에 독아방주에게 말하듯 그냥 에둘러 말하고 말았다.
물론 그들은 그것조차 안 믿는 눈치였지만 그건 청운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 *
하오문주와의 며칠간의 긴밀한 만남 후에 청운은 하남표국의 제소 건에 관한 궁금증도 있고 해서 무림맹에 다시 한 번 가 보아야겠다고 하후명 총사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는 청운이 이미 天의 천안天眼에 이미 노출되었으니 가는 길을 특히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아직도 天의 실체와 전력이 안개처럼 모호하고, 그 목적도 명명백백 밝혀진 게 없으니 그들의 공격방식 또한 전혀 예상할 수 없다고 총사가 말했다.
그리고 몇 백 리나 되는 험준한 산맥을 넘어야 하는 긴 여정에는 필연적으로 풍찬노숙이 다반사이기에 하 총사는 아랫사람에게 일러 청운의 행로에 불편이 없도록 모든 걸 챙겨 주라고 명령했다.
하 총사의 세심한 배려에 청운이 고마움을 표하자, 총사는 하오문의 호법사자라는 직위는 당연히 그 이상의 배려와 편의를 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앞으로 뭐라도 불편한 게 있으면 중원 곳곳에 있는 하오문을 찾아 패를 보이면 여러 가지 편리가 보장될 거라고 말했다.
청운은 사람이 어떤 단체에 소속된다는 게 참 장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 단체가 아무리 작고 미미할지라도.
총사는 아주 튼튼한 준마까지 챙겨 주었지만 높고 험준한 산맥을 넘는 데는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수 있기에 청운은 말을 그냥 놔두고 하오문을 떠나왔다.
* * *
무림맹으로 가기 위해선 진령산맥을 넘어야 했다.
진령산맥은 정확히 중원을 남북으로 가르고 있었다.
그 산맥을 기준점으로 북쪽은 고도가 높은 산지가 많고 남쪽엔 평지가 많았다.
지형의 특성으로 인해 남쪽과 북쪽은 생산되는 물산이 판이하게 달랐다.
그래서 남과 북은 겨울을 날 서로의 생필품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산맥을 넘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본격적인 겨울이 닥치기 전인 늦가을부터 산맥을 넘는 장사치들이 많았다.
때문에 진령산맥의 초입에는 제법 큰 규모의 객잔과 기루들이 즐비했다.
곧 해가 질 것 같아 청운도 산을 넘기 전에 마지막으로 객점에 들러 하룻밤이라도 편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하지만 요즘 워낙 산을 넘어가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객잔에 여분의 방이 있을지 걱정되었다.
지금이 이 딱 그런 철이다.
청운은 눈앞에 보이는 객잔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진령객잔>이라는 편액이 걸린 곳으로 서둘러 들어갔다.
문 앞에 서 호객을 하던 어린 점소이가 호들갑을 떨며 청운을 맞이했다.
“손님, 일 층에는 이미 자리가 없고 이 층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요.”
“여기서 하룻밤 묵어갈까 하는데 여분의 방이 있는지요.”
청운은 점소이라고 함부로 하대하지 않고 정중히 물었다.
“손님, 방은 이미 다 찼습니다. 요기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점소이는 자신이 무슨 죄라도 지은 양 굽실거리며 미안해했다.
청운은 잠자리야 어떻게 되겠지, 생각하며 일단 허기라도 면할 심산으로 서둘러 이 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층에도 거의 모든 탁자에 이미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마땅한 빈자리가 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청운은 다른 객점에 갈 생각으로 몸을 돌렸다.
그때 점소이 하나가 급하게 다가와 청운에게 다급하게 말을 건넸다.
“저, 손님 지금은 혼자 앉아서 식사할 자리가 마땅치 않습니다. 조금 불편하시더라도 합석을 하시면 안 되겠습니까요.”
점소이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안절부절못했다.
“다른 손님만 괜찮다면 나는 괜찮소. 그렇게 합시다.”
청운은 전혀 개의치 않고 말했다.
점소이가 늙수그레한 허름한 차림의 노인과 소녀가 앉아 있는 오른쪽 가장 구석 탁자로 가서 뭐라고 말을 주고받더니 청운에게 오라고 손짓을 했다.
청운이 다가가자 맞은편에 앉으라고 의자를 당겼다.
청운은 노인에게 깍듯이 인사한 후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어르신, 실례합니다. 자리를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강호의 동도가 다 친군데 전혀 미안해할 것 없네, 젊은 공자. 오히려 내 손녀가 식사에 방해가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네. 여간 수다스럽지 않아서 말일세. 하, 하, 하.”
노인은 호탕하게 껄껄 웃으며 격이 없는 농담을 하듯 말했다.
청운은 자리에 앉으며 점소이에게 볶은 돼지고기와 소홍주 한 병을 시켰다.
자세히 보니 육십 대 중 후반으로 보이는 노인은 비록 흰색 평복의 소탈한 차림이었지만 눈빛이 고요하고 표정에는 삶에 찌들지 않은 여유가 흘러넘쳤다.
탈속한 풍모마저 풍기고 있었다.
열 살 남짓으로 보이는 소녀는 호기심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연신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청운의 눈과 마주치자마자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아저씨, 결혼했어요? 어떤 종류의 여자를 좋아해요? 내가 착하고 예쁜 언니들을 많이 아는데. 아저씨처럼 멋있고 잘생긴 사람을 보면 괜히 소개시켜 주고 싶어요. 아—유, 내가 몇 살만 더 많았더라도…….”
청운은 소녀의 당돌한 질문에 너무 어이가 없어 갑자기 웃다가 하마터면 먹고 있던 음식을 흘릴 뻔했다.
나보다 더 놀란 건 소녀의 할아버지였다.
그는 갑자기 무서운 얼굴로 소녀의 등짝을 찰싹 때리며 손녀를 나무람과 동시에 청운를 민망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요 녀석이 갓난쟁이 때 제 부모가 역병으로 죽는 바람에 내가 너무 오냐오냐 키웠더니 애가 천둥벌거숭이입니다. 게다가 어미젖을 옳게 못 먹어서 그런지 몸이 약해 빠져서 걸핏하면 병치레를 하곤 합니다. 공자께서 너그러이 이해하시지요.”
“아니, 전 괜찮습니다. 오히려 손녀 덕분에 오랜만에 즐겁게 식사를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밥값은 제가 내겠습니다.”
청운은 진심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무슨 천만의 말씀을. 내가 보기에는 이렇게 궁색해 보여도, 사실 사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말은 너무 고맙지만 공자는 나와 손녀에 대해 전혀 마음을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는 손녀가 좋아하는 오리구이를 사 주는 것을 낙으로 삼고 살아가는 늙은이입니다.”
노인도 진심을 다해 청운을 대했다.
그때 또다시 소녀가 툭 내뱉듯 청운에게 황당한 질문을 던지며 어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여자들도 안 좋아하고… 그럼 아저씨는 세상에서 뭐가 가장 재밌어요? 나는 할아버지가 이렇게 객잔에서 맛있는 음식을 사 줄 때가 가장 좋은데.”
손녀는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청운을 바라보며 청운의 대답을 재촉하고 있었다.
청운은 얼른 적당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아 대충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책을 가장 좋아한단다. 나는 책에 대한 관심이 아주 많아, 그것도 어려운 책일수록 더 좋아한단다.”
소녀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우리 집에 책이 엄청 많아. 전부 할아버지 책이야. 옛날에 할아버지가 황궁에서 한림학사를 하셨거든요. 아저씨, 책 구경하러 우리 집에 가자. 내가 맛있는 차도 끓여 줄게. 제발.”
“이 녀석이 또 버릇없게. 너, 자꾸 그러면 다시는 맛있는 고기 안 사 준다.”
노인은 소녀에게 눈을 부라리며 나무랐다.
청운은 소녀가 너무 오랫동안 할아버지와 단 둘이서 살아서 사람이 그리워서 그런 것이라 생각을 하니 갑자기 마음이 아려왔다.
그래서 슬쩍 노인의 속마음을 찔러보았다.
“네가 초대를 해주면 나야 고맙지. 정말, 그래도 돼.”
“아이고, 공자, 이 녀석의 말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애가 워낙 엉뚱해서 여간 골치가 아닙니다.”
노인은 연신 민망해하며 청운에게 미안해했다
“아닙니다. 어르신, 저는 진심입니다. 어르신의 서재를 꼭 한번 구경하고 싶습니다.”
청운은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노인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하시구려. 내 초라한 서재가 흉이나 안 될는지. 이 녀석이 또 사고를 치는군요.”
갑자기 농담이 진담이 되고 말았다.
이쯤 되면 청운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 버렸다.
“어르신, 그런 의미에 오늘 밥값은 제가 내겠습니다. 허락하시지요.”
노인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