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9화 나를 팔겠소, 나는 어떻소?
청운은 속이 탔다.
그리고 다시 하오문 본단에 온다는 보장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곳까지 온 이상 지푸라기 같은 단서라도 건져내야만 했다.
청운은 또다시 억지를 부렸다.
“나를 팔겠소, 나는 어떻소? 나는 학식도 제법 있고, 무공도 제법 강하오.”
한동안 아무 말도 들리지 않다가, 다시 그 여인이 말했다.
“공자, 잠시 기다리시지요. 이건 제가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위에 보고해야 할 사항입니다.”
일다경 정도가 흘렀을까 다시 그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님, 지금 앉은 자리에서 정면에 보이는 문을 열고 나가 왼쪽으로 돌아 세 번째 방으로 들어가세요.”
청운은 시키는 대로 했다.
방의 내부는 특별한 장식도 꾸밈도 없이 단순하고 소박했다.
정면에는 녹색의 주렴이 바닥까지 늘어뜨려져 있었다.
청운이 방에 들어서자 아까의 그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공자님, 잠시만 기다리세요.”
잠시 후, 주렴 너머에서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중년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자. 어릴 적 안휘현의 천재 소리를 들으며 자라나, 몇 번의 과거에 떨어진 후 우연히 하남표국의 국주와 인연이 닿아 서기로 일하다 첫 표행인 대파산맥에서 실종되었던 강청운 공자가 맞습니까.”
“…….”
“그리고 연원을 알 수 없는 기연을 얻어 일류고수가 되어 혜성처럼 강호에 나타나 단독으로 독아방의 불법을 징계한 그분이 맞지요.”
중년인의 목소리는 건조하면서도 중후했다.
청운은 깜짝 놀랐다.
하오문이 정보를 팔아 먹고산다더니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면 하오문의 정보력을 믿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공자가 원하는 정보는 특급입니다. 어지간한 금액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공자는 그 돈 대신에 자신을 팔겠다는 제의를 했습니다. 나는 공자의 살아온 이력이 믿을 만하다고 판단했어요.”
“그렇소.”
“즉 공자가 지금까지 세상에 보여준 모든 행적에서 나는 공자의 사람 됨됨이가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공자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습니다. 공자, 하오문의 호법사자가 되어 주시오.”
‘호법사자?’
“호법사자는 문주의 지시만 받으면 되고, 문주의 신상에 관한 것 말고는 어떤 정보에도 접근할 수 있으며, 활동에 필요한 자금도 마음대로 쓸 수 있습니다. 비록 명문정파에는 비할 수 없지만 하오문의 무공도 마음대로 익힐 수 있습니다. 계약기간은 삼 년입니다.”
“…….”
“그 기간이 끝나고도 계속할지 말지는 전적으로 공자의 의향에 달렸습니다. 공자의 주된 임무는 하오문이 위기에 처했을 때 하오문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어떠십니까. 이만하면 그리 나쁘지 않은 조건이 아닙니까. 공자, 이 조건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중년인의 제안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청운은 수락했다.
청운은 현재 당장 소속된 곳도 없고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으니 썩 괜찮은 조건이라 생각했다.
“좋소. 수락하겠소.”
청운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흔쾌히 수락을 하자 다시 그 중년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에 만족감이 가득 서려 있었다.
“외당주는 들으시오. 강청운 공자에게, 아니 호법사자에게 하오문의 옥패를 내어드리고 비고로 안내해 원하는 정보를 열람케 해주시오. 공자, 중원의 하오문 어디에서라도 그 패를 내어 보이면 공자가 원하는 정보와 자금을 쓸 수 있소.”
“알겠소.”
“하오문의 호법사자가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나머지는 외당주에게 안내를 받으시오. 나는 하오문의 총사요. 곧 문주님도 뵙게 될 것입니다.”
중년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십대 중반의 검은 무복을 입은 사내가 방안으로 들어섰다.
큰 얼굴에 강한 인상의 사내였다.
내외공이 만만찮은지 체격도 탄탄하고 눈빛도 형형했다.
“외당주 풍천호라 합니다. 사자님 이것을 받으시고 저를 따라오십시오.”
풍천호는 청운에게 투명한 주황빛이 감도는 옥패를 건네주고는 문을 열고 앞서 방을 나갔다.
옥패에는 날개를 활짝 편 제비가 멋들어지게 음각되어 있었다.
청운은 옥패를 품속에 집어넣고 외당주을 따라 방을 나섰다.
하오문의 비고는 두 곳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 곳은 정보를 보관하고 관리하는 정보각이고 다른 한 곳은 무서들을 보관하는 무고였다.
청운은 먼저 정보 보관실로 향했다.
정보에 관한 문서들은 오래된 것일수록 뒤쪽의 책장에 가지런히 꼽힌 채 보관되어 있었고, 최근의 것일수록 앞쪽 책장에 꽂혀 있었다.
그리고 고급 정보는 왼쪽에, 일반 정보는 오른쪽에 배치되어 있었다.
가장 최근의 정보는 아직 완전히 정리, 분류되지 않은 채 중앙 탁자의 바구니 안에 두서없이 들어 있었다.
청운은 바로 그 탁자로 향했다.
청운은 바구니 속을 뒤지며 하남표국과 관련된 정보를 찾았다.
하남표국 관련 정보는 산서표국, 산동표국, 하북표국의 정보들과 같은 바구니에 들어 있었다.
네 표국들은 비슷한 시기에 외부의 공격을 받고 궤멸되었다.
멸문한 표국들의 공통점은 대륙표국의 속국이 되라는 제의를 단호히 거절하고 독자적 길을 가겠다고 선언한 것과 대륙표국의 업무방해에 대해 무림맹에 제소를 한 것이었다.
문서에 그 사건은 현재 대륙표국과 중원표국 그리고 사해표국 등이 중원의 상권을 거의 삼등분하고 있으며, 서로가 더 많은 상권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암투를 벌이고 있는 것과 무관치 않다는 정도의 추측이 기록되어 있었다.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무림맹의 외감찰단 두 개 조가 지금 조사를 벌이고 있다고 적시하고 있었다.
그리도 하남표국의 공격에 앞장섰던 음산삼귀와 노산이흉의 행방은 그 사건 이후 오리무중이라고 적혀 있었다.
정보각을 나온 청운은 곧장 무고로 향했다.
무고는 정보각과 지하통로로 이어져 있었다.
정보각 가장 안쪽의 책장을 돌리자 무고로 가는 지하통로가 나타났다.
십여 장을 걸어가자 황동으로 만들어진 제법 큰 철문이 나타났다.
그곳 문 앞에는 무고를 지키는 젊은 무사가 서 있었다.
청운이 다가가 패를 보이자 무사는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군말 없이 철문을 열었다.
그리고 청운에게 공손히 말을 건넸다.
“사자님, 무고 안에는 간단한 건량과 물, 그리고 잠자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곳에 삼 일 정도 머무실 거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자님께서 별도의 연락이 있을 때까지는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불상사를 대비해 문을 걸어 잠그겠습니다.”
“알겠소.”
“그동안에라도 특별히 연락을 원하실 경우가 있으시면 침대 왼쪽 벽에 있는 붉는 줄을 잡아당기면 됩니다. 그 줄은 여기 문 위에 있는 종과 바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청운은 알겠다는 대답을 한 후 곧장 무고로 들어갔다.
청운은 개봉에 간 문주가 돌아올 기간 동안 무고와 정보각에 머물 예정이었다.
강호 정세도 파악하고, 하오문에 수집되어 있는 잡다한 무공들을 통해 앞으로 자신의 강호 활동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무공도 보충할 계획이었다.
하오문의 무고에는 대단한 신공 같은 건 없었다.
처음부터 그런 건 기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청운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잡다한 무학이 다 있었다.
한 마디로 세상의 온갖 무공들이 집대성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투도술, 은잠술, 점혈법, 고문술, 기초적인 전음술, 용독술, 기관토목, 진법에 관련된 것까지 없는 게 없었다.
심지어 미약과 최음제를 다루는 방법과 방중술까지 있었다.
원래 모르는 것에 대한 호기심이 충만한 청운은 태어나 난생처음으로 대하는 잡술에 푹 빠져 며칠을 보냈다.
청운은 모든 것이 언젠가는 유용하게 쓰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닥치는 대로 보고 외워 버렸다.
무고에서 자신이 얻을 만한 것을 대충 얻은 청운은 다시 정보각으로 갔다.
청운은 현재 무림의 세력 판도와 주요 인물 그리고 무림의 역사와 기사에 대한 자료들도 챙겨 보았다.
무림이란 곳은 형식적으로는 크게 정파와 사파로 나뉘어 있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정체가 불분명한 방파들도 수두룩했다.
인물들도 마찬가지였다.
표면상으로는 명문 정파에 소속되어 정파의 인물로 구분되더라도 행적과 활동은 사파보다 더 잔인한 자가 수두룩했고, 반대로 사파에 속해 있으면서도 정파에 속한 그 누구보다도 더 정의로운 고수도 즐비했다.
그리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움직이는 기인이사들도 부지기수였다.
크게 보면 무림에서 정파와 사파의 구분은 큰 의미가 없어 보였다.
무림은 결국 자신이 가진 무력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밥그릇 싸움의 전쟁터였다.
무공을 모르는 민초들이 땀과 노력과 성실로 자신의 밥벌이를 한다면, 무림인은 자신이 가진 무공의 수위로 세력을 만들고 밥그릇을 챙기는 곳이었다.
청운이 정보각에서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있을 때 조용히 시비 하나가 들어와 청운에게 말을 건넸다.
“사자님, 문주님이 뵙기를 청하십니다.”
청운은 개봉에 갔던 문주가 드디어 돌아온 모양이구나, 하고 속으로 중얼거린 후 서둘러 정보각을 빠져나가 문주의 처소로 향했다.
“호법사자가 문주를 뵙습니다.”
청운은 공손하게 자신이 왔음을 알리고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뜻밖에도 문주의 처소는 여인의 규방처럼 꾸며져 있었다.
탁자며 문갑이 전형적인 여인의 취향을 반영한 것이었고, 화려한 화장대와 그 위에는 윤이 반질반질한 커다란 청동 거울도 있었다.
청운은 내심 상당히 놀랐다.
하오문이 비록 강호의 판도를 좌지우지할 대단한 고수가 즐비한 강력한 세력을 가진 방파도 아니고, 하급의 정보를 팔아서 먹고 사는 보잘 것 없는 방파지만.
그래도 중원 곳곳에 기루와 전장을 운용하고 있으며 문도의 숫자도 상당한데, 그 수장이 여자라니 의외였다.
청운이 들어서자 정면에 늘어뜨려져 있던 주렴이 스르륵 올라갔다.
녹의 경장을 입은 사십 대 중후반의 미부인이 제법 화려한 태사의에 않아 얼굴에 가벼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 옆에는 각진 얼굴형에 구레나룻을 기른 쉽게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눈빛이 형형한 중년인이 서 있었다.
중년의 미부인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청운에게 말을 건넸다.
그녀의 목소리는 나이에 비해 훨씬 청아하고도 차졌다.
청운은 그녀가 지금도 상당한 미인이지만 젊었을 때는 보기 드문 미인이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제가 하오문의 문주 서소지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총사 하우명입니다. 서로 인사하시지요.”
“강청운이라 합니다. 막중한 직책을 맡아 책무를 잘 수행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오문을 위해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청운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뭔 겸양의 말씀을. 저희는 공자에게 호법사자 자리를 제안하기 전에 이미 공자의 출중한 학식과 능력에 대해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공자 같은 분을 하오문에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사자께서 관심이 지대한 하남표국에 관한 정보는 현재 전 무림의 관심사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무림맹, 개방, 쾌활림, 소림사를 비롯한 구대문파 그리고 오대세가, 심지어 동창까지 암암리에 조사에 들어간 상태에 있습니다.”
“그렇군요.”
“문제는 이번 표국의 참사 사건은 단순히 표국들 간의 이권 다툼 때문에 발발한 사건이 아니라는 점에 있습니다. 우리가 파악한 바로는 그들 뒤에 무림의 판도를 뒤흔들 만한 세력들과 고수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칡넝쿨처럼 뒤죽박죽 뒤얽혀 있습니다.”
“네.”
“사자가 얼마 전 한 번 맞닥뜨린 天이 바로 풍파의 핵이긴 한데, 그 집단의 성격이 아주 특이합니다. 기존의 문파와 방파들이 한 곳에 본산이나 총단을 두고, 그 수장을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결집된 단일한 체제의 집단이라면, 天은 기존의 문파나 방파들의 형태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집단입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가령, 무림맹도 중에서도 누군가 天에 속한 사람일 수가 있고, 소림문도 중에도 누군가 天의 하수인일 수가 있고, 황궁에도 天의 끄나풀이 있을 수 있지요. 天은 단지 그들을 상징적으로 통칭해 부르는 명칭일 뿐 그들 자체가 아닙니다.”
“…….”
“그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그물망처럼 얼기설기 얽힌 집단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天의 인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天은 한 마디로 성격을 그 성격을 규명하기가 매우 힘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天이 아니라 天網天(천망천)이라고 불러야 마땅하지요.”
“네.”
“그들은 자신들의 잇속에 따라 어떤 순간은 적이 되어 서로 죽일 듯이 다투다가도, 또 어떤 순간에는 마치 피를 나눈 형제처럼 한편이 되어 협력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틀림없는 사실 중 하나는 그들을 금전적으로 지원하는 집단이 <흑상>이 아닌가 합니다.”
“<흑상>이요?”
“네, <흑상>은 아직 그 실체가 모호하지만 중원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표국이나 전장과도 연결된 연합체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흑상>은 한 마디로 돈에 환장한 집단이지요. 그들은 돈만 벌 수 있으면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고 저지릅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청운은 알 수 없는 분노감이 마음속에 자리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