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비검무-14화 (14/184)

014화 아니다, 이건 아니다, 이럴 수는 없다.

변두리 포목점에 들러 누가 미리 맞춰 놓은 자색 장삼과 신발을 사정사정해서 웃돈을 주고 사 입은 청운은 그길로 곧장 성도에서 제일 큰 객잔에 들어가 목욕을 하고 머리를 깔끔하게 빗은 후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에는 자신이 보아도 훤칠한 호남형의 청년이 깊은 눈빛으로 자신을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대파산 선하령 계곡의 사건 이전보다는 다소 얼굴색이 검게 탔으나 청년의 전체적인 근골은 훨씬 더 튼실해 보였다.

가죽 허리띠에 동굴에서 얻은 검을 찬 청운은 객잔으로 내려와 삶은 고기와 술 한 병을 시켜 마신 후 곧장 밖으로 나왔다.

집에는 나중에 들리기로 하고 전장에 들러 은자 이백 냥을 전표로 교환해 집으로 부쳤다.

이 정도면 당분간 생활비 걱정은 안 해도 될 듯싶었다.

곧이어 청운은 마방에 들러 말 한 필을 사, 그길로 곧바로 하남표국으로 향했다.

* * *

아니다.

이건 아니다.

이럴 수는 없다.

처참해도 너무 처참했다.

전각이라는 전각은 다 허물어지고 불탈 것은 다 불타고 남은 것이라곤 재뿐이었다.

한때 자신의 젊음과 삶을 의탁했던 하남표국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국주님과 총서기님의 생사도 아직 모르는데 불행이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허 총표두님과 사모님 그리고 자신이 글을 가르치던 운겸과 선화는 어찌 되었을까?

아! 누가 무슨 원한으로 이곳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폐허의 잿더미를 바라보고 있는 청운의 눈에는 알 수 없는 적을 향한 분노가 활활 타올랐다.

이건 도저히 용납할 수도,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이런 짓을 저지른 자들이 누구이든 간에 절대로 그냥 둘 수 없다고 청운은 이빨을 깨물었다.

그들은 이 표국에 자기 삶을 의탁해 열심히 살아가던 수많은 사람의 생의 터전을 짓밟았으며, 그 사람들의 전부인 그들의 목숨마저 빼앗았다.

순간적으로 청운의 머리 위에 자색의 둥근 기운이 뭉쳤다 흩어졌다.

청운은 표국의 사건에 대한 소문이라도 알아볼 요량으로 성도로 향했다.

성도는 여느 때처럼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청운은 밥도 먹을 겸해서 성도에서 가장 큰 <천일루>라는 객잔에 들어갔다.

일 층에는 거의 자리가 없어 이 층으로 올라갔다.

대로가 훤히 내다보이는 한쪽 창가에 자리 잡은 청운은 점소이에게 홍아주 한 병과 구운 오리 한 마리를 시켰다.

그리고 무심하게 창밖의 거리를 보는 척하면서 청력을 돋우어 주변 사람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수중동굴에서의 각성이 없었다면 어림도 없는 일을 청운은 지금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었다.

그만큼 청운의 무공이 깊어지고 감각이 예민해진 것이다.

왁자한 잡담들 속에서 청운은 왼쪽 구석 두 번째 식탁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의 감각을 집중했다.

흘깃 보니 황의와 흑의를 입은 삼십 대 초반의 평범한 얼굴의 사내들이었다.

“자네, 소문 들었나. 이번 하남표국 참사에 노산이흉이 개입했다네.”

“그 마두들이 하남표국과 무슨 철천지 원한이라도 있는가. 알다가도 모를 일일세. 그건 그렇다 치고 들이는 소문에 의하면 하남표국뿐 아니라 산서표국, 산동표국, 하북표국도 멸문의 화를 당했다 하더군. 그동안 잠잠하던 무림에 한바탕 피바람이 불게 생겼군.”

그들의 대화에서 더 이상 자세한 내막은 들을 수는 없었다.

무림맹에 조사를 의뢰한 네 개 표국이 동시에 화를 당하다니, 음산삼귀와 노산이흉이라.

우선 그들의 행적부터 추적해 봐야겠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사건의 배후에 어떤 거대한 음모가 있음이 틀림없다.

생각을 정리한 청운은 그날의 사정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그날 참사에 혹시라도 살아남은 사람이 있는지 수소문해 보기로 했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그들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지 난망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오문과 개방 말고는 적당한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오문과 개방은 정보를 팔아 운영비를 충당하는 방파로 전 중원에 지부를 두고 있으니 우선 그곳부터 가 봐야겠다고 생각한 청운은 마지막 잔을 비운 후 객잔을 서둘러 나왔다.

* * *

객잔과 반점들이 즐비한 유흥가를 걷던 청운.

청운은 그곳에 있는 <용호전장>이라는, 전장이라기보다는 밀희투전장에 가까운 전장 앞에 섰다.

청운은 또래들과 비교해 불량기가 다분하고, 발랑 까진 어린 녀석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연신 호객행위를 하는 것을 눈여겨보았다.

녀석은 갓 십 대 됨직한, 하지만 일찍부터 세상을 굴러먹어서 눈치 빠르고 입심도 걸었다.

표국에서 일할 때 저런 녀석들은 십중팔구 하오문과 줄이 닿아 있다는 소리를 청운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었다.

청운이 다가가자 아니나 다를까 녀석이 청운의 앞을 가로막고 나서더니 살살 웃으면서 청운을 유혹했다.

“공자님, 제가 사주와 관상을 좀 볼 줄 아는데 오늘 공자님에게 대길의 운이 보입니다. 제 말을 믿고 들어오셔서 운을 한번 시험해 보시지요.”

“난, 투전에는 관심 없네. 대신 나를 하오문으로 안내하면 이건 자네 것이네.”

청운은 은전을 하나 꺼내 녀석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간사하게 실실 웃으며 사람을 호객하던 녀석의 눈에 한순간 탐욕의 빛이 번들거렸다.

청운은 속으로 됐다 싶어 얼굴에 진지한 표정을 지은 채 속으로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니나 다를까 녀석은 호객행위를 내팽개친 채 자신보고 따라오라고 손짓을 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허세와 능청을 부리며 큰소리를 쳤다.

“공자님은 정말 안목이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단번에 제가 하오문도임을 눈치 채셨습니까. 이곳 하남에선 저를 통하지 않고는 하오문에 아무도 접선할 수가 없습니다.”

“…….”

“공자님은 정말 운이 좋으신 겁니다. 이제부터 아무 걱정 말고 저만 따라 오시면 됩니다. 제가 모든 걸 알아서 모시겠습니다.”

몇 발짝 앞서가던 녀석이 슬금슬금 뒤로 처지더니 청운의 옆에 바짝 붙었다.

청운은 요놈이 무슨 속셈을 부리는가 싶어 애써 모르는 척하며 좀 전과 같은 보폭과 속도로 그냥 걸었다.

바로 그 순간 녀석의 오른손이 잽싸게 청운의 품속으로 파고드는 게 느껴졌다.

예전의 청운의 감각이었으면 절대 못 느꼈을 느낌이었다.

녀석의 솜씨는 소매치기의 문외한인 청운이 생각해도 대단한 솜씨였다.

청운은 이참에 확실히 해두지 않으면 녀석이 무슨 다른 장난을 칠지 모르겠다 싶어 단호하게 대응하기로 결심했다.

“당장 치워라. 그 손이 한 치만 더 내 품속을 파고들면 그 손은 너의 팔에 붙어 있지 않을 것이다.”

말과 동시에 청운은 녀석의 손목을 낚아채 꺾어버렸다.

그리고는 칼날의 끝을 녀석의 목에 들이댔다.

녀석은 이런 일을 한두 번 경험한 게 아닌 듯 그 와중에도 과장되게 비명을 지르며 연기를 했다.

“공자님, 제발 이 손 좀. 팔목이 끊어질 것 같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을 테니 이 손 좀 놔 주십시오.”

“한 번만 더 허튼 짓거리를 하면 하오문이고 지랄이고 당장 너부터 요절을 낼 것이다. 빨리 앞장서라. 너 설마 하오문도 모르고 나한테 사기를 친 건 아니지.”

청운은 다시 한 번 녀석에게 따끔하게 겁을 주었다.

청운은 녀석의 팔을 놔줄 때 거의 녀석을 던지다 시피 앞으로 밀어버렸다.

녀석이 저만치 쿵 하고 나가떨어졌다.

“공자님, 사실대로 말하면 제가 아직 나이가 너무 어려 정식으로 하오문도가 아니지만 이삼 년 후에는 하오문에 들어가기로 이미 이야기가 다 되어 있습니다. 하오문까지 정확히 안내하겠습니다. 그리고 약조하신 은자는 반드시 주셔야 합니다.”

“네가 안내만 똑바로 하면 아까 본 은자는 곧 네 것이 틀림없다. 그건 염려 말고 엉뚱한 짓이나 하지 마라.”

* * *

몇 개의 골목을 돌고 돌아 사오 마장쯤 왔을까 제법 그럴싸한 누각 앞에서 녀석이 멈춰 섰다.

<화화루>라고 간판을 단 주루였다.

청운은 겉으로는 느긋한 척 여유를 부렸지만 한시라도 빨리 사건의 내막을 알고 싶어서 속이 타들어 갔다.

그래서 녀석을 심하게 다그쳤다.

“뭘 하느냐. 빨리 가서 손님이 왔다고 고하지 않고.”

“알겠습니다. 공자님, 저를 따라오시지요.”

녀석이 종종걸음으로 앞장서 걸었다.

청운이 막 기루의 문턱을 넘어설 때였다.

제법 태양혈이 툭 불거지고 나름 무공께나 익힌 것 같은 이십 대 중반의 장정 둘이 청운의 앞을 막아섰다.

“이놈, 칼새야. 여기가 어디라고 아무나 데리고 오느냐. 네놈도 이곳이 어떤 곳인줄 잘 알지 않느냐. 당장 저자를 데리고 썩 꺼져라.”

문 앞에 선 흑의를 입은 장한이 인상을 잔뜩 구기며 짜증을 부리듯 칼새를 나무랐다.

청운은 이럴수록 강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걸 그동안의 강호 경험으로 알기에 일부러 흑의의 장한에게 하대를 했다.

“아니, 손님이 왔으면 빨랑빨랑 윗선에 보고나 할 것이지 문지기 주제에 무슨 유세를 그리 부리느냐. 당장 튀어가서 냉큼 윗사람 나오라고 해라.”

“이놈이 실성을 했나.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설치긴 설쳐. 단단히 맛을 보여주지.”

두 장한이 동시에 청운에게 주먹질을 했다.

청운이 그들의 주먹을 슬쩍 피한 후 손으로 귀때기를 올려붙였다.

두 장한이 동시에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칼새의 면전에서 망신을 당한 장한들이 칼을 빼들고 청운에게 달려들었다.

청운은 이럴 때일수록 확실히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에 수중동굴에서 자신이 창안한 <쾌—> 초식을 전개해 장한들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앞가슴을 베어 버렸다.

청운은 곧바로 정원 한쪽에 있는 석등을 향해 <절—> 초식을 출수한 후 곧바로 다시 검을 검집에 납입했다.

“이놈아! 대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한…….”

오른쪽에 선 장한이 말을 하다 말고 자기 발 앞에 수북하게 떨어진 머리카락과 앞가슴을 내려다보고는 너무나 놀라서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두 장한의 앞가슴엔 언제 그랬는지 불에 덴 것 같은 칼자국이 사선으로 길게 나 있었다.

청운이 마음을 나쁘게 먹었다면 이미 그들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바로 그 찰나에 뒤에서 쿠~웅 하는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본 장한들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의 등 뒤에 방금까지 멀쩡했던 서 있던 석등이 정확히 세로로 정확히 갈라지며 쓰러지고 있었다.

그 광경을 누군가가 누각의 삼층에서 커튼을 살짝 젖힌 채 바라보고 있었다.

“손님을 이리 모시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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