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비검무-12화 (12/184)

012화 그것은 거대하고 섬뜩한 괴물의 붉은 눈이었다.

동굴 앞 계곡의 깊은 소에서 이상하고 거대한 물굽이가 잠시 일렁이는 것 같더니 금세 잠잠해졌다.

구무자의 말대로 저 시퍼런 소에 진짜 뭔가 살고 있는가 싶었다.

구무자의 말에 따르면 계곡의 깊은 소에 뭔가 엄청난 것이 살고 있어 간간이 부정기적으로 거대한 물굽이가 일고.

그때마다 물고기 떼가 동굴로 도망치듯 튀어 들어온다고 했다.

특히 보름달이 뜨는 자시와 축시에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고 책에 써놓았다.

덕분에 구무자는 동굴 속에서도 양식 걱정은 하지 않았다고 했다.

청운은 보름달이 뜰 때 한 번 나와 보기로 작정하고 발밑에서 퍼덕거리는 물고기를 몇 마리 주워들고 자신 거처로 삼은 곳으로 되돌아갔다.

사람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건 말건 자연은 제 할 일만을 쉬지 않고 했다.

동굴 입구가 유난히 환한 걸 보니 오늘이 보름인가 하고 생각한 청운.

그는 동굴 입구로 걸어갔다.

고개를 들어 달을 보니 아무래도 오늘이 보름이 맞는 것 같았다.

청운은 검을 오른손에 단단히 쥐고는 계곡의 시커먼 소를 주시했다.

두 시진이나 흘러도 격랑 치는 물살에 부서지는 기포소리만 들릴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청운은 설마 구무자가 잘못 본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막 동굴 속으로 되돌아가려고 몸을 돌릴 때였다.

갑자기 잠잠하던 소에 집채만 한 물굽이가 잇따라 일었다.

그리고는 수백 마리의 팔뚝만한 물고기 떼가 허공으로 치솟아 오르더니 동굴 입구로 떨어졌다.

그 중 수십 마리는 청운의 바로 발 앞에 떨어졌다.

그 바람에 청운은 물을 흠뻑 뒤집어쓰고 말았다.

물속을 들여다본 청운은 깜짝 놀랐다.

시퍼런 소의 까마득한 심연에서 두 개의 불꽃이 벌겋게 타오르고 있었다.

갑작스레 열린 밤의 문으로 저승의 불덩어리가 수면으로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것은 거대하고 섬뜩한 괴물의 붉은 눈이었다.

청운은 오금이 저리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청운은 다급하게 동굴 안쪽으로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 먹물 같은 밤에 저 괴물과 대책 없이 싸울 수는 없었다.

청운이 구무자의 환약을 복용하고 꾸준히 치우천결을 운용한 덕분에 이제 밤에도 동굴 속에서 생활하는 데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하지만 물속은 사정이 전혀 다르다.

청운은 동굴 속 자신이 쉬는 곳으로 되돌아가 자신이 본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교룡도 이무기도 아닌 것 같았다.

지금은 도무지 그 정체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괴물의 정체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괴물과의 대결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지금보다 몇 배로 무공이 강해져 물속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면 모를까.

난감했다.

도대체 여기서 얼마를 더 있어야 하는가.

물론 이곳에서 탁월한 기연을 만나 무공에 눈이 뜬 것은 적지 않은 소득이지만, 이제는 이곳을 나가야만 했다.

하지만 동굴 입구에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괴물이 도사리고 있으니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표국과 능국주님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어머니와 영아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여기에 갇혀 있는 동안 돈 한 푼 보내지 못했는데 어머님과 소영이는 굶고 있지나 않은지 걱정이었다.

서둘러 이곳을 벗어날 방책을 찾아야만 한다.

청운은 뒷골을 당기는 여러 가지 골치 아픈 생각에 마음만 더욱 조급해졌다.

‘그래, 앞으로 못 나가면 뒤로 나가보자.’

청운은 밖에 나가서 돈으로 바꿀 요량으로 그동안 말려 둔 백매태를 동굴 벽에 자라는 넝쿨을 잘라 단단히 동여맨 후 동굴 안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 * *

수십 마장을 갔는데도 동굴은 끝이 없었다.

이상한 것은 갈수록 동굴은 더 넓어졌다.

얼마나 더 갔을까.

청운은 아! 하고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다니!

청운은 자기 눈을 믿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둘레가 이십여 마장이 넘는 커다란 호수가 중앙에 있고, 그 주변에는 태어나서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온갖 수목들이 우거져 있었다.

또한 그 사이사이로 기화이초들이 다채로운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인세에 보기 드문 선경이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 청운은 한 번 더 놀랐다.

그곳의 지형은 호리병 모양으로 하늘로 뚫려 있었다.

절벽을 타고 올라가면 안 될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생각으로 그쳐야만 했다.

그 높이는 인간이 도저히 오를 수 없을 정도로 까마득했다.

게다가 절벽이 마치 도끼로 잘라놓은 듯 매끈해서 손으로 붙잡거나 발 디딜 곳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청운은 일단 호수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시 봐도 세상에 없는 절경이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했다.

도대체 물이 들어올 곳이 없는데 어떻게 이런 큰 호수가 생길 수 있는 것일까.

청운은 이곳 지형을 구석구석 자세히 살펴보았다.

‘아!’

어느 순간 청운은 깨달았다.

그러니까 이 호수는 그 바닥이 계곡과 바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것 말고 달리 설명할 수가 없었다.

청운은 또다시 절망하고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다.

동굴 입구 쪽에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엄청난 괴물이 가로막고 있고 동굴 뒤편인 이곳은 날개가 없는 이상 도저히 밖으로 나갈 수가 없는 호리병의 절벽이다.

바로 그때!

호수 맞은편 삼사 장 높이의 널따란 절벽 위에 뭔가 이상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구무자가 남긴 영단을 먹고 끊임없이 치우천결을 연마한 덕분에 청운의 안력은 과거와는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밝았다.

청운은 그게 뭔가 궁금해서 그것을 좀 더 잘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은 주변의 평평한 바위 위로 뛰어올랐다.

그가 얼마 전에 깨우친 신법을 전개해 단번에 날아오른 것이다.

청운은 또 한 번 놀랐다.

그것은 풀과 나뭇가지로 만든 엄청나게 큰 둥근 사발 같았다.

둘레가 거의 이십여 장은 넘을 것 같았다.

‘저게 도대체 뭐지.’

청운은 자신이 공부한 모든 지식을 끌어모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설마 새의 둥지? 세상에 저렇게 큰 새도 있는가?’

바로 그 순간 청운은 퍼뜩 뭔가를 생각해 냈다.

대붕의 둥지.

‘그건 전설에나 나오는 새인데, 지금까지 아무도 본 적이 없었다던데.’

저게 만약 대붕의 둥지라면 모든 게 설명되었다.

계곡의 소에 도사리고 있는 괴물은 적곤이 틀림없다.

그것도 최소한 오백 년 이상이 넘은.

곤은 그 크기가 어마어마하고 천년이 지나면 대붕이 된다는 북해에만 산다는 용 같은 물고기다.

곤은 원래 흰색인데 영역 다툼에서 져서 북해에서 쫓겨난 곤은 그 분노 때문에 온몸이 붉게 변해 적곤이 되고 만다.

곤일 때는 성격이 온순하지만 적곤은 분노의 화신이기에 그 성질이 그 무엇에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난폭하고 잔인하다.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성가신 것은 모두 파괴하고 죽여 버린다.

적곤이 다시 대붕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대붕의 알을 먹는 것이다.

동굴 입구의 소에 잠복하고 있는 저 적곤은 이곳의 대붕이 알을 낳는 순간만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적곤은 대붕이 알을 낳고 잠시 기운이 빠졌을 때를 노려 대붕의 알을 훔쳐 먹으려는 것이다.

고오오.

휘리리—릭.

갑자기 호수 주변에 거대한 바람이 일더니 수면이 출렁거리고 주변이 컴컴해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하늘을 올려다본 청운은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동굴과 맞닿은 호리병 같은 하늘에서 거대한 은빛 구름이 호수 위로 곧장 내려오고 있었다.

다시 자세히 보니 날개 하나의 길이만도 십여 장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새가 마치 은빛 구름처럼 내려오고 있던 것이다.

대붕이었다.

대붕이 둥지로 천천히 하강하고 있었다.

청운은 들키지 않기 위해 움푹하게 파인 바위 사이에 들어가 몸을 숨기고 숨을 죽인 채 그 놀라운 광경을 지켜봤다.

둥지에 내려와 날개를 접은 대붕은 경계의 눈빛으로 몇 번에 걸쳐 주변을 천천히 둘러본 후 둥지 이곳저곳을 다듬기 시작했다.

부리만 거의 이 장이 넘을 것 같았다.

몇 식경이 지났을까.

가만히 있던 대붕이 갑자기 목을 길게 뽑은 채 부리를 한껏 벌이며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끼끼끽끼~르르륵!

대붕은 인간의 말로는 뭐라고 도저히 형언할 수 없는 괴이한 소리를 내질렀다.

아니, 괴로운 신음 같은 것을 연달아 내뱉었다.

그 소리가 얼마나 웅후하고 큰지 동굴 전체가 커다란 북처럼 울리고 잠잠하던 호수의 수면에 출렁거리며 파문이 일었다.

또한 비릿한 냄새가 천지를 진동했다.

그 냄새에 청운은 갑자기 속이 메스꺼워 토할 것 같았다.

대붕이 알을 낳은 건가 청운은 생각했다.

대붕은 기운을 잃고 축 늘어진 것 같았다.

바로 그때였다.

잔잔하던 호수의 수면에 거대한 불은 물기둥이 수십여 장 높이로 치솟더니 거대한 붉은 용 같기도 하고 이무기 같은 것이 튀어나왔다.

그 길이가 이십여 장이 넘고 그 직경이 족히 대여섯 아름이 넘을 것 같았다.

적곤이었다.

콰~꽈~아~아.

적곤은 기괴한 소리를 내지르며 알을 낳느라 기진맥진한 대붕을 향해 화살처럼 쇄도했다.

알을 놓고 잠시 넋을 놓고 있던 대붕도 깜짝 놀라 엄청난 괴성을 지르며 적곤을 향해 부리를 돌렸다.

콰—콰—콰—까—깡.

대붕과 적곤의 싸움은 엄청 났다.

적곤이 꼬리를 휘두를 때마다 주변의 바위가 산산조각 나서 비처럼 떨어지고.

대붕이 발로 할퀴고 부리로 쪼고 찍을 때마다 절벽이 푹푹 파였다.

인세에 다시없는 절경이던 호수 주변은 완전 난장판이 되었다.

* * *

두 식경쯤 지났을까.

점차 대붕이 싸움에서 밀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알을 낳은 후유증이 때문인 것 같았다.

대붕이 밀릴 때마다 청운의 손에는 땀이 배어났다.

저건 정당한 대결이 아니다.

한쪽은 대를 잇는 번식이라는 일생일대의 일 때문에 기운을 모조리 다 써버린 상태이고.

다른 한쪽은 충분히 힘을 비축한 채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상대가 힘이 빠지기만을 엿보고 있다가 급작스러운 기습을 한 것이다.

이건 절대 공정하지도 정당하지도 않은 싸움이다.

잠시 청운이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적곤의 꼬리에 머리를 강타당한 대붕이 쿵 하며 절벽 한쪽에 나뒹굴었다.

그 순간을 노려 적곤은 대붕의 둥지를 향해 아가리를 벌린 채 돌진했다.

맞은편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청운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아, 안 돼!”

청운은 있는 힘을 다해 초식을 동시에 전개해 곤의 왼쪽 눈을 찔러 갔다.

<쾌—타—절—변—회>

청운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강맹하고도 날카로운 자색의 검기가 대붕의 알에 정신이 팔린 적곤의 왼쪽 눈에 명중되었다.

청운은 마치 바위를 찌른 것처럼 손목이 부서지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적곤의 눈에서 피가 쏟아지는 걸 보니 적곤도 분명 적잖은 타격을 입은 것 같았다.

분노한 적곤은 머리를 돌려 청운을 공격해 왔다.

한쪽 눈에 피를 철철 흘리는 용 같기도 하고 이무기 같기도 한 괴물의 얼굴을 본 청운은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오금이 저리고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다시 한 번 청운은 자신의 모든 공력을 끌어올려 이번엔 적곤의 오른쪽 눈을 찔러 갔다.

청운에게 한번 혼쭐이 난 적곤도 이번엔 단단히 조심을 하는 것 같았다.

청운의 투명한 자색 검기가 오른쪽 눈을 찔러오자 적곤은 머리를 홱 돌며 슬쩍 검기를 흘려버린 후 꼬리를 휘둘러 청운을 휘감아 왔다.

놀란 청운이 임시방편으로 검으로 꼬리를 쳐냈지만, 적곤의 꼬리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아아악!”

그 힘에 직격당한 청운은 비명을 지르며 마치 던져진 돌멩이처럼 날아가 반대편 절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온몸의 뼈라는 뼈가 다 부서지는 처절한 통증에 청운은 그만 정신줄을 놓은 채 기절해 버렸다.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 자신의 입속으로 비릿한 냄새와 함께 뭔가 흘러들어오는 것을 청운은 느꼈다.

청운은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꿀꺽 삼킨 후 다시 의식을 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