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화 나는 이것을 무위검이라 명명한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이 지났을까.
청운은 조금씩 기력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상체를 움직여 기어갈 수 있게 되었고, 그 다음에는 힘들게나마 일어설 수 있었고, 또 며칠이 지나자 드디어 한두 발짝씩 뗄 수 있었다.
이끼만 먹고도 이렇게 몸을 회복할 수 있다니 청운은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청운은 자신이 뜯어먹은 것이 무엇인지 보기 위해 이끼가 있는 곳으로 가 보았다.
‘아! 저건 백매태!’
청운은 어쩌면 자신이 살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렀다.
저 이끼는 아버지가 산에 가지 않는 날이면 늘 들여다보시던 [약초집성방]이란 책자에서 얼핏 본 것 같았다.
[백매태는 골짜기가 깊고 습기가 있는 곳에 자라며 온도에 민감하다. 그래서 사시사철 온도가 일정한 곳이 아니면 자라지 못한다.]
[백매태의 약효는 기력이 쇠한 몸을 보하고 특히 골절에 효능이 뛰어나다. 독이 없고 성질이 따뜻하여 오래도록 장복하면 몸의 사기를 없애고 혈을 튼튼하게 한다.]
책자에 적힌 내용은 그런 것 같았다.
그제야 청운은 자신의 몰골을 들여다보았다.
의복은 한군데 성한 곳이 없이 찢어발겨졌고 팔과 다리에는 온통 째지고 긁힌 자국이 낭자했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그렇게 욱신거리며 통증이 심하던 관절과 뼈가 이제는 큰 탈 없이 멀쩡한 것 같았다.
팔과 다리를 이리저리 흔들고 뒤틀어 보아도 특별히 통증이 느껴지는 곳은 없었다.
청운은 이게 다 백매태 덕인가 하고 생각했다.
청운은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궁금해서 동굴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조금씩 물기가 많아지고 있었다.
반다경쯤 걸어갔을까.
청운의 눈앞에는 모든 걸 그대로 집어삼킬 것만 같은 집채만큼 커다란 계곡의 급류가 동굴 입구를 연신 들이치며 때리고 있었다.
엄청난 우기였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다.
자신도 저 격류의 물굽이에 휩쓸려 이 동굴로 밀려온 것 같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더 이상 다가갈 수가 없었다.
청운은 몸을 돌려 동굴 안쪽으로 되돌아갔다.
일다경쯤 걸어갔을까.
제법 널찍한 공터 같은 게 있었다.
그곳은 습기도 적고 제법 쾌적했다.
거기서 잠시 쉴까 생각하다가 청운은 내친김에 안쪽으로 더 들어갔다.
일다경 이상을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동굴의 한쪽 벽면이 움푹 파인 아늑한 공간이 나타났다.
그곳에 들어서자 땅으로부터 약 두세 척 높은 곳에 제법 널찍하고 평평한 바위가 나타났다.
청운은 그곳에 오르기 위해 팔에 힘을 주고 몸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청운은 곧바로 너무 놀라서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청운은 몇 번의 심호흡을 깊게 하고는 다시 몸을 끌어올렸다.
그곳에는 죽은 지 너무 오래되어 백골만 남은 시체가 반쯤 벽에 기대어져 있었다.
입고 있던 옷가지도 거의 삭아 있었다.
그 옆에는 고검도 한 자루 바닥에 놓여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오래된 시체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청운은 유골을 저대로 방치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몰랐으면 몰라도 유골을 본 이상 최소한의 인간적 도리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청운은 유골을 대충이라도 수습해 조금 전 안으로 들어오다 봐둔 제법 흙이 두툼한 곳을 파서 묻어 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청운이 유골을 수습하기 위해 살짝 건드리자 유골이 마디마디 분리되어 버렸다.
그때 유골을 덮고 있던 옷가지에서 뭔가 툭 하고 떨어졌다.
책자였다.
제법 두꺼웠다.
표지에는 [구천무록]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표지를 넘기자 목차도 없이 바로 내용이 이어졌다.
* * *
이 책자는 내가 강호를 주유하면서 평생토록 경험하고 접한 무공에 대한 이론서이다.
특히 검에 관해 중점을 두었다.
이것을 끝까지 읽게 되면 이 세상에 왜 그런 다종다변한 무공이 존재하는지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세상의 모든 무공의 초식은 사실 더 빠르고, 강하고, 효과적인 공격을 수행하기 위해 조합된 동작에 불과하다.
아무리 괴이하고 현란한 초식도 그것의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다.
이 세상의 모든 잘초는 자신의 내외공에 가장 알맞게 수련한 결과물이다.
이 이론서를 제대로 이해하면 얼마든지 자기만의 변화무쌍한 초식을 만들 수 있고, 거기에다 특별한 기연을 얻어 튼실한 내공까지 쌓는다면 산을 허물고 폭포를 뒤집을 힘을 얻을 수도 있다.
수련의 정도와 성취도에 따라 절정, 화경, 현경, 그 이상도 이를 수 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런 경지도 무공의 기본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으면 모두 한낱 꿈에 불과하나니…….
청운은 거기까지 읽고는 책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바닥에 있던 검과 함께 유골을 수습해 밑으로 내려온 청운은 흙이 제법 두툼하게 쌓여 있던 곳으로 곧장 갔다.
땅을 파기 위해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청운은 다시 한번 놀랐다.
이 검이 도대체 무슨 재질로 만들어졌는지 녹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묵빛에 가까운 은은한 광채까지 띠고 있었다.
청운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검 끝을 땅에 찔러 넣었다.
검 날이 푸~욱하고 단단한 땅을 파고들었다.
아! 역시 예사 검이 아니었다.
금방 유골이 들어갈 충분한 깊이와 넓이의 구덩이가 파여졌다.
청운은 비록 삭은 옷이지만 그것으로 정성껏 유골을 감싸 땅에 묻고는 주변의 돌을 덮어 제법 그럴듯한 봉분을 만들었다.
영면을 빌며 두 번 절하고 일어섰다.
청운은 다시 아까 유골이 있었던 곳으로 책자를 가지러 갔다.
청운은 아예 그곳을 자신의 쉴 곳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비록 맨바닥이었지만 동굴의 습기를 피할 수 있어 제법 아늑했다.
그는 몸을 기대어 책을 읽을 자리를 고르다 적색에 가까운 주먹 크기의 반쯤 되는 작은 옥함 하나를 유골이 있던 자리에서 발견했다.
청운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녹슨 옥함의 걸쇠를 칼로 쳐낸 후 옥함을 열었다.
은은한 향기가 도는 갈색의 환약이 하나 들어 있었다.
청운은 당장 먹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무턱대고 먹을 수는 없었다.
환약을 다시 옥함에 집어넣은 청운은 조금 전 읽다 만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 * *
무공은 내 몸의 동작과 기가 몸 안에서 몸 밖으로, 몸 밖에서 몸 안으로 움직이는 방식들이 중첩된 상호작용이다.
그 어떤 초식의 발출과 회수도 이 원리를 벗어나진 못한다.
그리고 경지가 올라갈수록 기의 움직임을 내면화할 수 있으니, 움직이지 않아도 움직이는 것이고, 움직여도 움직이지 않는 수준이 될 수 있다.
정신과 몸이 일체를 이루면 풀에 바람을 울고 돌이 세월을 품듯, 구름이 천둥과 번개를 만들 듯 네 몸의 모든 감각과 지각이 매일 새롭게 깨어날 것이다.
그 경지가 날로 발전하면 자연의 모든 힘이 곧 나의 힘이 될 수도 있고…….
<구무자>
청운은 [구천무록]을 다 읽고 나자 마치 머리에 벼락을 맞은 것처럼 전율했다.
청운은 무공도 학문과 다를 바 없다, 는 생각을 했다.
공부가 정신의 힘을 길러 지혜와 통찰을 벼리는 것이라면 무공은 몸의 움직임과 기를 벼려 방어와 공격을 하는 것이었다.
청운은 옥함을 열어 환약을 삼킨 후 치우천결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구무자의 설명에 따르면 그 환약은 구무자가 천하를 돌아다닐 때 세상 곳곳에서 채집한 수십 가지의 좋은 약초를 배합해 만든 것으로 그 효능이 소림의 대환단이나 무당의 자소단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했다.
세상의 어지간한 독도 해독시킨다고 기술해 놓았다.
평생 세 개를 만들어 두 개는 자신이 먹었고, 하나는 유사시를 위해 남겨두었으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복용하지 못한 것 같았다.
청운은 [구천무록]을 통해 치우천결이 다른 무엇이 아니라 엄청난 내공 심법임을 깨달았다.
그날로부터 청운은 [구천무록] 실린 인간의 가장 효과적인 동작을 참조해 자신의 검법을 만들기 시작했다.
* * *
[내가 곧 우주고 검이다.
내가 있기에 검도 있고 기도 있다.
검이 나를 이기면 광폭해지고, 내가 검을 이기면 광오해진다.
나와 검은 따로가 아니니 내가 검에 속하고 검이 나에게 속한다.
공격은 물러서듯 다가가며, 힘은 부족한 듯 넘치게, 기교는 서툰 듯 완벽해야 한다.
세상의 모든 초식은 누군가의 깨달음에 의한 창조된 가장 효과적인 몸의 동작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세상의 어떤 고정관념에 지배되지 않는 나만의 통찰이 중요하다.
아무 움직임도 없는 것 속에 모든 움직임이 있고, 나의 버림 속에 나의 채움이 있고, 아무 곳도 이르지 않지만 모든 곳에 이르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데 모든 걸 한다.
나는 이것을 무위검이라 명명한다.
제1식 — 쾌 : 빛보다 빠른 직선은 없다.
제2식 — 타 : 빛이 지나는 모든 길이 부서진다.
제3식 — 절 : 빛이 빛을 자르니 모든 것이 따라 잘려진다.
제4식 — 변 : 빛이 변하니 모든 것도 따라 변한다.
제5식 — 회 : 빛이 돌아오니 모든 것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제6식 — 접 : 빛이 빛을 다 비우니 빛이 저절로 먼저 채워진다.
제7식 — 파척 : 빛이 빛을 밀어내니 다른 빛이 다시 찾아온다.
제8식 — 멸환 : 환이 눈을 뜨니 시공간도 환의 빛 속에만 존재한다.
제9식 — 멸환겁 : 세상이 환의 속에서 죽으니 모든 것은 원래 없었다.]
청운은 [구천무록]의 이론을 바탕으로 해서 스스로 창안한 무공을 밤낮없이 수련했다.
치우천결을 심법으로 삼아 검법을 먼저 수련하고 그것을 장법과 권법 그리고 지법으로 응용해보기도 했다.
치우천결의 운용이 어느 정도 용이하자, 보법과 신법으로도 변용해 보았다.
그는 꿈속에서도 무공을 수련했다.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인지하는 자각몽이었다.
시공간이 따로 없는 꿈속에서는 현실에서 불가능한 어떤 난해한 동작도 가능했다.
청운은 자신이 그동안 수련한 검법을 시험하기 위해 동굴 입구로 향했다.
우기가 어느 정도 끝나 가는지 그동안 동굴 입구까지 차올라 동굴 벽을 세차게 때리던 물굽이의 힘도 많이 숙진 것 같았다.
그래도 여전히 엄청난 계곡물이 동굴을 집어삼킬 기세로 격랑치고 있었다.
이곳을 벗어나려면 계곡을 건너 반대편 절벽을 타고 올라가야 한다.
그런데 세찬 물살을 보니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건 나중의 일이라고 생각한 청운은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검명이 예기를 내뿜었다.
치우천결을 운용해 검에 진기를 주입했다.
우—우—웅—웅—웅.
청운이 쥐고 있는 묵빛의 검신에 일순 자색의 강기가 은은하게 어리기 시작했다.
청운은 검을 머리 위로 한껏 치켜들었다가 앞으로 쭉 뻗으면서 <쾌—타—절—변—회>.
다섯 초식을 연달아 전개했다.
그의 검에서 줄기줄기 뿜어져 나온 자색의 강기가 날카로운 파공음을 내며 세찬 계곡물을 자르고, 때리고, 뒤집었다.
그가 출수를 멈추자 죽거나 기절한 팔뚝만한 물고기들이 수면 위로 둥둥 떠올랐다.
몇 마리는 청운이 발 딛고 있는 동굴 입구 쪽으로 떠밀려왔다.
상당한 위력이었다.
청운은 장력을 이용해 물고기 몇 마리를 허공으로 끌어올려 동굴 안쪽으로 당겼다.
철퍼덕 소리를 내며 기절한 물고기 몇 마리가 그의 발밑에 떨어졌다.
오늘 먹을 양식이었다.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