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화 차라리 죽는 것보다 더 못하다고 생각했다.
국주는 자신의 검을 빼들고 보표들을 독려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음산 삼귀를 상대할 궁리에 몰두했다.
‘나 혼자서는 저들 세 명을 다 상대하기는 힘들다. 총표두를 데려올 걸 그랬나. 아무래도 오늘은 길보다 흉이 더 많겠구나.’
국주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능 국주는 음산 삼귀 중 둘이 괴도를 휘두르며 자신을 공격해 오자 처음부터 인정사정없이 낙일 검법의 살초를 전개했다.
휘리리릭!
음산 이귀의 푸른 도기와 국주의 붉은 검기가 허공에서 뒤엉키며 장내에 엄청난 강기가 휘몰아쳤다.
형세는 백중지세.
두 쪽 다 처음부터 자신이 가진 최고의 절기를 전개하며 혼신의 힘을 다 쏟아부었지만 국주도 음산 이귀도 어느 쪽도 승기를 잡지 못했다.
“둘이서 저깟 놈 하나를 어쩌지 못하고 개지랄을 떠네. 결국엔 나까지 나서야 하나.”
몇 장 떨어진 바위 위에서 싸움의 형세를 지켜보던 음산 삼귀 중 나머지 하나가 싸움판에 가담하자 싸움의 국면은 금세 국주가 불리해졌다.
다른 쪽은 더 심했다.
아비규환, 목불인견.
싸움을 시작하고 채 한 식경도 지나지 않아 보표와 표사들 거의 반 이상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갈수록 절망적이었다.
청운도 칼을 빼들고 [무예구기]에서 익힌 검법으로 대항했으나 몇 합 버티지도 못하고 궁지에 몰렸다.
한마디로 역부족이었다.
체계적으로 무공를 익힌 무사에게 독학으로, 그것도 내공도 없는 검법으로 대적하는 건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마찬가지였다.
상대는 아주 청운을 갖고 놀 심산으로 청운을 단번에 죽일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청운의 몸 이곳저곳에 살짝살짝 상처만 나게 공격했다.
청운도 본능적으로 그걸 느꼈다.
“이~노~옴. 차라리 무사답게 깨끗이 날 죽여라. 더 이상 나를 희롱하지 말고.”
청운은 악이 받칠 대로 받쳐 소리쳤다.
“그렇게 빨리 죽고 싶단 말이지. 그럼 지금 당장 죽여주지. 뒈져라.”
청운을 공격하던 사내는 이죽거리는 말을 내뱉고 난 후 돌연 자신의 검으로 청운의 목을 베어왔다.
청운도 물러서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하여 상대의 검을 쳐갔다.
바로 그 순간.
쿠~르~릉, 콰~아~앙!
소리와 함께 굴러 떨어진 집채만 한 바위가 청운의 바로 옆에 있던 마차를 그대로 때렸다.
부서진 마차에서 튕긴 나무상자의 파편 맞은 충격으로 청운은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다행히 청운은 상대의 검을 운 좋게 피했지만, 상자의 파편에 밀려 그만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 아래로 마차의 잔해와 함께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강 서기… 아! 안 돼!!!”
능 국주의 목소리가 아래로 추락하는 청운의 귓바퀴에 아득히 들려왔다.
청운은 이게 자신의 마지막이구나 생각했다.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 추락의 속도 속에서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어릴 적 공부를 잘해 아버지와 스승님에게 칭찬받았던 일, 서당에서 돌아오자마자 빠듯한 살림에도 갓 지은 쌀밥에 고기반찬을 차려 오시던 어머니, 과거에 낙방하고 터덜터덜 돌아오던 관도에서 탈진해 쓰러진 후 하남표국의 별채에서 깨어난 일.
남궁영봉이 자신을 바라보던 그윽한 눈길과 그것을 질투해 자신을 해코지하려고 했던 모용후와의 사건 등.
청운은 온몸의 살을 저미는 차가운 계곡의 칼바람에 계곡에 떨어지기도 전에 정신줄을 놓고 말았다.
그 순간 청운은 자신도 모르게 치우천결을 운용했다.
* * *
밤이 더 깊은 밤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축시였다.
흑의에 복면을 한 수십 명의 인영이 마치 한지에 먹물이 스미듯 하남표국의 담을 넘고 있었다.
매일 화섭자를 들고 경비를 서고 있던 표국의 외곽 경비들은 이미 새까만 담장 아래 밤보다 더 검은 밤이 되어 처박혀 있었다.
뎅—뎅—뎅—뎅.
“침입자다!”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표국 전체를 뒤흔드는 비상종이 울렸다.
슈—슈—슈—슉.
불화살이 하남표국의 전각들을 향해 빗줄기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불을 꺼라! 이놈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으악!”
차—앙, 챙—챙, 꽈—광, 콰—앙.
치솟는 화마 속에서 폭발음과 비명이 순서도 없는 터져 나왔다.
아비규환도 이런 아비규환이 없었다.
오늘 밤 십팔 층 지옥이 하남표국에 다 모인 것 같았다.
표국 본체의 대전 앞에서 허 총표두는 자신 앞에 선 보표와 표두들에게 서둘러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주 표두, 지금 즉시 사모님과 운겸 도련님, 선화 아가씨를 모시고 안가로 피신시키게. 통로는 국주님 집무실의 책상을 치우고 바닥을 들추면 나올 걸세. 이곳은 내가 책임을 지겠네. 자, 빨리!”
“알겠습니다. 총표두님. 그럼 뒷일을 부탁드립니다.”
주 표두는 즉시 내실로 달려갔다.
허 총표두는 주표두가 떠나자마자 자신의 검을 빼들고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앞마당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리고 즉시 공력을 최대한 끌어올려 소리쳤다.
허 총표두의 노성에 전각들이 쩌렁쩌렁 울렸다.
“당황하지 마라. 우리는 충분히 강하다. 일부는 불을 끄고 나머지는 본체 대전 앞에 모여라.”
그의 외침과 동시에 이번 표행에 불참한 표국의 무사들과 보표들, 짐꾼들, 시비들이 속속 본청 앞에 모여들었다.
모여든 사람들에게 서둘러 몇 가지 지시를 내린 허 총표두는 곧바로 피가 튀는 격전장으로 내달았다.
그곳에서는 표국의 보표들이 흑의를 입은 일군의 무리와 대치하고 있었다.
흑의의 무리 앞에는 시뻘건 혈랑의 얼굴이 수놓아진 흑의 장삼을 입은 염소수염을 기른 오십 대 중반의 괴인 둘이 서 있었다.
하나는 깡마른 체구에 뱀눈을 치켜뜨고 있고, 다른 하나는 붉은 얼굴에 흉광을 이글거리고 있었다.
뱀눈의 중년인은 손톱이 시커먼 손을 늘어뜨리고 있었고, 얼굴이 붉은 괴인의 손에는 자기 키보다 더 큰 낫 같은 무기를 들고 있었다.
허 총표두는 속으로 흠칫, 놀라며 생각했다.
‘설마 노산이흉!’
“노산의 선배님께서 무슨 볼일이 있어 이 먼 하남까지 왕림하셨습니까?”
허 총표두의 물음은 겉으로 보기에 나름 예의를 갖춘 말투였다.
하지만 내뱉는 말의 분위기는 심하게 상대를 질타하는 것이었다.
“그놈, 제법 강호의 견문이 있구나. 네가 총표두냐. 제법 고수라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네가 누구라도 오늘의 결과엔 변함이 없다. 오늘부로 하남표국은 강호에서 사라진다.”
왼쪽에 선 얼굴이 붉은 괴인이 음산한 말투로 말했다.
그자는 곧바로 자신의 뒤에 시립한 흑의의 무리에게 번쩍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손을 내리며 명령했다.
“쳐라. 오늘 하남표국의 쥐새끼 한 마리도 남기지 말고 깡그리 없애라.”
그의 손이 허공으로 올라갔다 내려오는 순간을 기점으로 흑의의 무리들이 표국의 사람들에게 피 냄새를 맡은 야수처럼 달려들었다.
“우리는 하남표국을 지키는 혼들이다. 적들은 별것 아니다. 평소 배우고 갈고닦은 실력을 발휘하라. 자신을 믿어라.”
‘말을 하면서도 허 총표두는 내심 표국의 운명이 정녕 오늘이 끝인가.’
끝날 때 끝나더라도 최선을 다해 부끄럽지 않게 죽으리라 결심하면서 허 총표두는 노산이흉을 향해 자신의 독문절기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 * *
청운은 귓바퀴를 울리는 물소리와 이마에 듣는 차디찬 물방울을 느끼며 간신히 깨어났다.
마치 멍석말이를 당한 듯 온몸이 몽둥이에 흠씬 두들겨 맞은 것 같았다.
간신히 눈을 떴지 꿈쩍도 할 수가 없었다.
마치 누군가 자기 몸을 접착제로 바닥에 붙여놓은 듯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가 없었다.
청운은 자기 몸이 생물이 아니라 마치 무생물처럼 느껴졌다.
청운은 자신의 처지가 차라리 죽는 것보다 더 못하다고 생각했다.
청운은 자신이 왜 이곳에 이렇게 있는지, 이곳은 대체 어디인지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청운은 꼼짝도 못한 채 누워 동굴 천장에서 얼굴로 곧바로 떨어지는 찬 물방울을 그대로 맞았다.
차가운 물방울이 침처럼 얼굴을 찔렀다.
그제야 청운은 자신이 표행길에 어떤 무리의 습격을 받고, 부서진 마차의 파편과 함께 만길 절벽에서 떨어진 걸 간신히 생각해냈다.
‘국주님과 총사님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할수록 불길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무엇보다 지금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분노와 무력감이 번갈아 정신과 영혼을 고문했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 자신을 자학하는 불길이 끊임없이 활활 타올랐다.
갑자기 목울대를 타고 덩어리진 분노가 치솟았다.
울컥, 울컥. 울컥.
그의 입가로 핏덩어리가 뭉텅이로 흘러나왔다.
핏덩이를 쏟아내고 나면 온몸의 맥이 탁 빠졌다.
갑자기 잠이 몰려왔다.
꿈속으로 서서히 가라앉으면서 청운은 치우천결을 생각했다.
* * *
꿈속에서 궤도를 이탈한 채 돌던 무수한 행성들이 제 궤도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쉼 없이 공간을 요동치고 있었다.
요동치는 행성보다 더 많은 성운과 빛무리들이 행성을 따라 소용돌이쳤다.
청운의 정신과 몸은 알 수 없는 관성처럼, 매일 뒤바뀌는 낮과 밤처럼 몇날 며칠을 깨어났다 잠들었다 깨어났다 반복했다.
그때마다 청운은 투명한 자색의 성좌와 성운이 자기 몸을 빙빙 도는 똑같은 꿈을 꾸었다.
청운은 마치 꿈의 힘으로 꺼져 가는 생명을 이어 가는 것 같았다.
그가 꿈을 꿀 때마다 그의 양팔에 찬 치우환에서 스멀스멀 새어 나온 자주빛 서기가 그를 온통 감쌌다.
‘나는 왜 여기에 이렇게 누워 있지.’
‘어쩌다 내가 이렇게 죽어가는 신세가 되었나.’
‘어떤 내 운명의 격랑이 나를 휩쓸어 나를 여기다 내팽개친 것인가.’
‘내 운명은 대체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가.’
지금 내 처지에서 내 존재의 이유에 대한 이런 감상적인 생각은 얼토당토않은 사치일 뿐이라고 청운은 생각했다.
무엇보다 살아야 한다.
아니 반드시 살아야 했다.
빨리 망가진 몸을 회복해 이곳을 벗어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청운은 생각했다.
갑자기 허기가 몰려왔다.
청운은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도 인간의 몸은 참으로 염치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치졸한 생각을 하는 순간에도 청운은 뭐라도 먹고 싶었다.
청운은 손가락과 팔에 힘을 잔뜩 주고는 자신의 천근만근 같은 몸을 뒤집으려고 안간힘을 섰다.
힘을 줄 때마다 입술 사이로 저절로 신음이 삐져나왔다.
처음에는 아무리 힘을 줘도 손과 팔에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몇 번을 실패하고서야 청운은 겨우 몸을 뒤집을 수 있었다.
온몸에 땀이 흥건했지만 말할 수 없는 감격과 감동이 가슴 가득 차올랐다.
청운은 손톱과 손가락으로 습기 찬 바닥을 있는 힘껏 긁으며 제 몸을 조금씩 앞으로 당겼다.
청운은 조금 기어가다 기력이 다하면 잠시 쉬었다 다시 기어가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얼마를 기어갔을까.
얼마 떨어지지 않는 동굴 벽과 바닥 이곳저곳에 자라난 이끼가 보였다.
빤히 보이는 거리가 생각보다는 훨씬 길게 느껴졌다.
수십 번을 기다 쉬고 기다 쉬고를 반복한 끝에 청운은 드디어 이끼가 자라는 곳에 간신히 도착했다.
청운은 허겁지겁 이끼를 뜯어먹기 시작했다.
한 움큼씩 뜯자마자 그대로 집어삼켰다.
강한 쓴맛 끝에 아주 미약한 향긋함이 있었다.
배를 채운 청운은 습기가 적은 동굴 한쪽으로 기어가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