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비검무-9화 (9/184)

009화 일에는 절경이 없다.

하남표국 마당은 곧 떠날 표행을 준비하느라 북새통이었다.

마차와 말, 표물과 온갖 짐들이 뒤엉켜 어디가 땅이고 어디가 짐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준비를 서두르라는 표사들의 외침과 고함이 이곳저곳에서 난무했다.

“아직도 말굽도 안 갈고 여태껏 뭐 했는가.”

“예, 예, 지금 죽어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워낙 말이 많아서… 최대한 빨리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빨리빨리 마차에 표상을 전부 실어라. 그리고 표차마다 표국 깃발을 달아라. 당장!”

“노숙에 쓰일 식량도 서둘러 실어라. 자 빨리빨리 서둘러라. 내일 묘시에 출발할 것이다. 준비에 차질이 없어야 한다.”

총사 하후행은 책자와 붓을 들고 일일이 표물과 표상을 점검하면서 이것저것 지적을 했다.

청운도 책자와 붓을 들고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북새통도 이런 북새통이 없었다.

청운도 표행의 준비 일을 여러 번 경험했지만, 이번 표행처럼 대규모의 표행을 준비하기는 처음이었다.

거의 은자 이십만 냥에 달하는 이번 표행의 목적지는 이천 리 길이나 되는 귀주성의 삼왕부다.

표물들은 삼왕야의 회갑에 쓰일 물건들이다.

귀하디귀한 동방의 인삼과 담비가죽, 흑삼 그리고 천산에서만 난다는 동충하초 등 어느 것 하나 귀하지 않은 표물이 없었다.

이번 표행의 대가는 하남표국이 거의 일 년을 먹고 놀아도 될 만큼의 거액이다.

반대급부로 일이 잘못되면 하남표국의 운영은 치명적 타격을 입을 것이다.

그래서 어지간한 표행에는 나서지 않던 국주가 직접 나선 것이다.

이번 표행은 하남표국이 단독으로 성사시킨 계약이 아니다.

이번 일은 중원의 삼대 표국 중 하나인 사해표국의 의뢰를 국주가 수용해서 이루어졌다.

이번 표행은 하남표국뿐 아니라 황룡표국과 안휘표국도 동시에 의뢰를 받아서 하는 표행이다.

물론 각 표국의 본산이 달라 따로 출발해 귀주성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번 표행 때문에 국주는 임시 계약직으로 사십여 명의 보표와 표사를 더 뽑았다.

그래서 표행의 전체 규모는 마차 열두 대에 총인원이 거의 백여 명이 넘었다.

이번 표행은 국주가 직접 지휘하고 감독한다.

그리고 물품이 워낙 다양하고 처리해야할 서류가 많아 국주는 청운도 동참시켰다.

대신 총사와 총표두가 표국에 남아 표국일을 처리하도록 결정되었다.

요즘 표국 일에 있어서는 국주가 총사보다 청운을 더 믿는 눈치다.

그래서 총사 앞에서 청운이 민망해질 때가 자주 있었다.

하지만 총사는 표국 설립 때부터 수십 년간을 국주와 함께 동고동락한 터라 그런 일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청운 혼자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 * *

대파산맥의 선하령 계곡 어귀에 있는 이십여 개의 천막이 쳐진 널따란 공터.

일 장 정도 높이의 평평한 바위 위에 올라선 국주 능천삼이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이곳까지 온다고 모두들 수고가 많았다. 지금까지 큰 고비는 없었다. 물론 녹림과 흑림 지대를 통과할 때 적당한 통행비로 사태를 무마한 것은 내일부터 우리가 넘을 이 선하령에 바친 소소한 제물에 불과하다.”

국주 능천삼은 주변을 스윽 한 번 둘러보더니 말을 이어갔다.

“선하령은 그 길이만도 삼백여 리에 달하고 벼랑의 깊이는 헤아릴 수조차 없다. 가파름은 나는 새도 쉬어가야 할 정도로 대단하고 겨우 마차 한 대가 지나갈 정도로 잔도의 폭도 좁다. 그래서 오늘은 여기서 충분히 쉬었다 출발한다.”

능 국주는 짧지만 강한 어투로 꼭 필요한 말만 하고자 했다.

“답로조는 지금 당장 솥과 화덕을 걸고 고기를 삶아라. 술도 한 잔씩 돌려라. 하지만 내일을 위해서 절대로 취할 정도로는 마시지는 마라. 말들에게도 충분히 콩을 삶아주고 상한 발굽은 일일이 찾아 갈아주라. 찢어지고 헤진 표기도 다른 것으로 갈아라.”

모두가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모두 잘 알겠지만 산속 날씨는 변화무상하다. 혹시라도 폭우 같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표물이 상하지 않도록 꼼꼼히 챙겨야 한다. 그럼 보초만 빼고 모두 푹 쉬기를 바란다. 이상이다.”

능 국주는 훌쩍 바위에서 뛰어내려서 자신의 천막으로 갔다.

청운과 총사도 국주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그동안 수고 많았네. 이제 드디어 마지막 고비만 남았네. 모두가 총사와 강 서기의 노고 덕분이네. 자, 자, 사양치 마시고 한 잔 쭉 들게.”

국주는 총사와 청운에게 한 잔 가득히 술을 따랐다.

“과찬이십니다. 다 국주님이 애쓰신 덕분이지요. 저희가 뭐 한 게 있습니까. 그냥 국주님이 시키시는 대로 따랐을 뿐이지요.”

총사는 겸양의 말과 함께 단숨에 국주가 따라준 잔을 마신 후 국주에게도 한 잔을 권했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큰 탈이 없었지만, 왠지 황 표두 사건이 영 마음에 걸리네. 이런 큰 표행을 저들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는데.”

능 국주의 불콰해진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우리가 무림맹에 제소를 한 걸 알고는 저들도 잠시 조심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총사는 국주의 근심을 덜어 주려는 듯 일부러 별일 아닌 것처럼 상황을 낙관하듯이 말했다.

“아니, 아니네, 무림의 일은 절대 그렇지 않네. 한 번 목표로 정한 걸 무림맹에 제소했다고 쉽게 그만둘 작자들이라면 아예 그런 일을 벌이지도 않았을 거네. 강 서기 생각은 어떤가?”

능 국주가 청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의견을 구했다.

“저야, 워낙 강호의 생리를 모르니 확실한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만, 만약 저들이 우리를 정녕 해하고자 한다면 이 선하령 길을 절대로 그냥 넘기지 않을 것입니다. 단단히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청운은 자신 앞에 방금 마시고 내려놓은 빈 술잔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어 말했다.

“그렇지, 나도 강 서기와 같은 생각이네. 그래서 막대한 자금을 써서 나름 일류 보표들을 더 충원하지 않았나. 이 정도면 어지간한 공격은 막아 낼 걸세. 자 마지막으로 딱 한 잔만 더하고 우리도 그만 쉬도록 하세.”

국주는 애써 자신감을 내보이며 말했다.

술을 몇 순배 마신 청운은 취기를 느꼈다.

국주의 천막을 막 빠져나온 청운은 천둥 같은 물소리가 들리는 계곡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취기에 젖어서 한밤중에 듣는 계곡물 흐르는 소리는 마치 밤의 산이 어둠을 연주하는 음악 같았다.

아직도 천막 곳곳에는 술판이 벌어지는 듯 왁자했다.

곧 해시가 되면 취침나팔이 불 것이다.

그러면 모두가 무조건 자야만 한다.

그것이 표행길의 규칙이자 법칙이다.

쿠르릉~

쾅! 쾅! 콰르르.

마치 산을 두 쪽으로 쪼개 놓은 듯 깊이를 알 수 없는 계곡은 밤에 밤을 겹쳐 놓은 듯 주변의 밤보다 훨씬 더 시커멨다.

마치 우주의 태곳적 어둠이 가득 고여 있는 것 같았다.

낮과 빛이 아니라 밤과 어둠이 세상의 본래 얼굴 같았다.

취침나팔 소리와 함께 선하령 계곡의 밤이 끝없이 깊어지고 있었다.

눈길로도 다 가닿지 못하는 까마득하게 깎아지른 절벽.

기기묘묘한 수많은 기암괴석의 형상.

그런 기암괴석을 수천 년 길들이며 사느라 뿌리에서 우듬지까지 꾸불텅꾸불텅 뒤틀린 노송의 가지와 줄기들.

그 노송들의 영혼인 듯 노송의 우듬지를 일렁이며 쓰다듬는 운무.

절경도 이런 절경이 없다.

그냥 소풍을 나왔다면 모두가 아~, 하는 시인묵객이 되고도 남았을 장관이다.

하지만 일에는 절경이 없다.

큰일일수록 주변의 수일한 풍광은 오히려 일에 위험을 더하는 요소가 될 뿐이다.

깎아지른 벼랑길과 잔도를 조심조심 이동하는 하남표국의 행렬이 그러했다.

십여 대의 마차를 간신히 끌고 가는 마부와 짐꾼, 표사들의 발걸음에는 긴장이 잔뜩 묻어났다.

긴장을 하기는 청운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눈에도 인세에 다시없는 절경이 절경으로 보이지 않았다.

다만 얼마나 더 가야 이 긴긴 계곡이 끝날까만 생각했다.

체질적으로 청운은 작은 일에도 생각이 많은 사람이었다.

거기에 더해 성장기에 그가 읽고 학습한 무수한 책들이 안 그래도 생각이 많은 그의 성정에 기름을 붓고 말았다.

표국 일을 시작하고부터는 생각의 양과 깊이는 과거와 다를 바 없었으나, 생각의 결은 많이 달라졌다.

전적으로 자신이 가족을 부양하고부터는 생각의 방향이 단지 학문만을 향하지 않고 여러 가지 세상사에도 가 닿았다.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되는 꿈은 이제 완전히 접었다.

청운은 표국 일을 착실히 배워 자신도 나중에 국주처럼 표국을 운영해 보고 싶었다.

그러면 가족 부양은 물론 남는 돈으로 사회적 약자도 돕는 그럴듯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얼마나 갔을까.

수천 마리의 시꺼먼 이무기가 뒤엉킨 것 같은 선하령 계곡은 징그럽게도 길고도 길었다.

묘시에 출발해서 지금은 거의 미시이니, 모두가 지칠 대로 지친 것 같았다.

빨리 적당한 쉴 곳을 찾아 조금이라도 쉬어야 할 것 같았다.

간신히 말을 몰아 고갯마루에 올라섰다.

그러자 상단 전체가 쉴 만한 제법 널찍한 공터가 나타났다.

아니나 다를까 앞장서 표행을 이끌던 국주가 팔을 들어 올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

“자, 자, 이제 오르막길은 거의 다 왔다. 조금만 더 고생하면 곧 내리막길이다.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여기서 잠시 쉬었다 간다.”

“네!”

“모두들 건량과 육포를 꺼내고 솥을 걸어 찻물을 끓여라. 그리고 말들의 발굽도 살펴봐라.”

말을 마친 국주가 말에서 풀쩍 뛰어내렸다.

그때였다.

“굳이 여기서 만찬을 즐길 필요가 있을까. 조금 뒷면 어차피 사잣밥을 먹을 터인데. 하긴,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다르다지. 그냥 죽으나 먹다 죽으나 매한가지이기는 하지.”

집채만 한 바위 뒤에서 갈의에 죽립을 쓴 인영 셋이 장내로 날아들며 으스스한 괴소를 흘렸다.

그들의 손에는 낫고 아니고 창도 아닌 이상한 병기가 들려 있었다.

“음산의 선배들께서 이곳 선하령까지 웬 행차요. 지나가시는 길인지 아니면 나에게 무슨 볼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국주는 평소와 다르게 아연 긴장의 낯빛을 띠며 공손하지만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당연히 국주에게 볼일이 있지. 두말하지 않겠다. 마차와 말은 그대로 두고 모두 절벽 아래로 뛰어내려라. 운 좋으면 살 수도 있을 것이다.”

오른쪽에 선 괴인이 자신의 무기를 앞으로 쭉 내밀어 절벽 아래를 가리켰다.

“강호의 선배가 되어 후배에게 무슨 망발이요. 돈을 원하신다면 내가 조금 선심을 쓸 용의가 있소.”

국주는 금방이라도 자신의 검을 뺄 태세로 긴장하며 말했다.

“나는 두 번 말하지 않겠다고 했다. 시작해라. 오늘 날짜로 하남표국은 강호에서 영원히 사라진다. 내가 장담한다.”

가운데 괴인이 자신의 무기를 머리 위로 들어올리자.

절벽 위에서 활과 검을 든 수십 명의 인영들이 나타났다.

쿠~ 쿠르릉~ 콰~ 콰~ 꽝.

슈~ 슈~ 슉.

집채만 한 바위가 갑자기 아래로 굴려 내내렸다.

화살이 폭우처럼 표국의 일행에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당황하지 마라. 적들은 별것 아니다. 마부들은 마차를 절벽 쪽으로 바짝 붙이고 말을 진정시켜라. 보표와 표사들은 무기를 빼들고 적들에 대항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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