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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비검무-5화 (5/184)

005화 붓 대신 칼

“그런데 그런 일이 우리 표국에서만 발생한 것이 아니라 산서표국, 산동표국 그리고 하북표국에서도 연이어 일어났다네. 배후에 어떤 사악한 집단이 있는 게 틀림없네.”

“그런 일이…….”

“그 일은 아무래도 중원의 표국을 일통해서 자기 휘하의 지부로 두려는 개봉의 대륙표국과 무관하지 않다는 게 내 섣부른 짐작이네. 작년 봄 대륙표국의 총사가 나를 찾아와 자신들과 제휴하면 훨씬 이득이 클 거라는 제안을 한 적이 있었네.”

국주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나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네.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에 이런 사단이 벌어졌네. 너무 공교롭지 않은가. 도저히 묵과할 수 없어 나는 다른 표국들과 협의하여 이 일에 대한 엄중한 조사를 무림맹에 의뢰하기로 했네.”

“네.”

“자네가 서류를 검토한 후에 무림맹의 감찰 전에 들러 잘 좀 설명해 주게. 그리고 시간이 얼마 없지만 나와 같이 내 연무실에 가서 자네에게 맞는 무공을 좀 찾아보세.”

“알겠습니다.”

“자네는 골격도 괜찮으니 지금부터 무공을 시작해도 그리 늦지 않네. 그리고 마방의 방목장에 들러 자네가 타고 갈 말도 한 필 고르게.”

국주는 남은 차를 마저 마시고는 먼저 일어서 앞장섰다.

연무실의 입구는 국주 집무실의 책장을 돌리자 바로 나타났다.

약 반 마장쯤 비스듬히 지하로 내려가자 제법 널따란 공간이 나타났다.

국주가 등잔에 불을 켜자, 한쪽 벽에 여러 가지 무기가 걸려 있었다.

또한 그 옆의 책장에는 그가 평생 모은 무서들이 빼곡하게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저 무서들 중엔 내가 구하기는 했지만 보지 않은 것이 태반이네. 좋은 인연이 있기를 바라네. 그리고 자네에게 맞는 무기도 하나 골라서 나오게. 나는 이만 가 보겠네.”

청운의 등을 두어 번 토닥인 후 국주는 몸을 돌려 집무실로 되돌아갔다.

청운은 먼저 무서들부터 꼼꼼히 둘러보았다.

무공에 워낙 문외한인지라 청운은 순서대로 몇 권을 대충 빼서 읽어 보았지만 어떤 게 자신에게 적합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게 다 그거 같았다.

한동안 여기저기를 살피던 청운은 책장 구석에서 춘추전국시대에서나 사용되던 전서체로 쓰인 낡은 책자 하나를 집어 들었다.

[무예구기]

전국시대 사천의 어느 가문이 집안의 사병을 훈련시키던 무예서 같았다.

그 책자에는 검, 도, 창, 봉, 곤, 활 등의 무기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몇 가지 검술, 창술, 창술 그리고 마상무예의 도해와 설명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었다.

무공의 문외한인 청운은 그걸 품속에 집어넣고는 무기들이 걸린 벽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힘으로 다루기에 적당한 검 한 자루를 골랐다.

칼집에서 칼을 뽑자 그럴듯한 검명이 울었다.

제법 철의 재질이 단단해 보이고 검 날도 서 있었다.

청운은 더 이상 다른 곳을 둘러보지 않고 곧장 연무실을 나왔다.

“그래, 마음에 드는 걸 골랐나. 어디 한 번 보세. [무예구기]라, 어쩌면 무예를 처음 시작하는 강 서기에게는 좋은 선택일 수도 있겠군. 그리고 그 검은 개봉의 암전에서 우연히 산 것인데 나도 한 번 안 써 본 것이네,

“하하. 다행입니다.”

“재질과 검 날이 제법 괜찮지.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한 번 해보게. 잘 안 되는 게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나한테 자문을 구하게. 그래도 이곳 하남에선 나도 무공으로 제법 알아주는 사람이네.”

국주는 반은 농을 하듯 청운에게 말했다.

“웬 겸손의 말씀을요. 이곳 하남에서 도의 제일 고수가 국주님이신 걸 소문으로 수없이 들었습니다.”

청운은 존경과 부러움이 반반씩 섞인 말투로 말했다.

“됐네, 이 사람아. 제일 고수는 무슨 제일 고수. 이곳 하남에만 해도 고수가 얼마나 많은데. 나는 손가락 안에도 들지 못하네.”

“…….”

“그리고 내가 모르는 수많은 기인이사들도 틀림없이 신분을 숨긴 채 어딘가에 조용히 살고 있을 것이네. 그래서 강호에선 늘 겸손해야 대접을 받네. 하여튼 잘 해보시게나.”

국주는 자못 기대 어린 눈길로 청운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붓 대신 칼이라!’

청운은 심호흡을 길게 하며 그 말을 속으로 한 번 더 되뇌었다.

그날로부터 청운은 시간이 날 때마다 마사의 관리인이 권한 말을 타고 표국의 뒷산 공터에 올라 [무예구기]에 기술된 무예를 혼자서 연습하기 시작했다.

* * *

코끝을 스치는 봄바람이 병아리의 노란 겨드랑이 털처럼 부드러웠다.

이른 봄의 아지랑이를 밟고 가는 말발굽 소리가 봄의 음률같이 관도에 잔잔히 울려 퍼졌다.

타닥타닥.

적당한 간격으로 내딛는 느릿한 말의 보폭이 마치 길섶의 꽃을 무대로 연주되는 현악기처럼 리듬감이 있었다.

먼 산자락에서 개화하기 시작한 도화들이 봄빛을 따라 산등성이를 거쳐 점점 산봉우리를 향해 달음질치고 있는 것이 마치 봄의 꿈을 보는 것 같았다.

“강 서기, 내가 몇 번 뒷산 공터에서 자네가 하는 무술 훈련을 훔쳐보았네. 처음 하는 것치곤 동작이 유연하고 힘도 있었네. 하지만 강호에서 진정한 고수가 되기 위해선 무엇보다 내, 외공을 함께 수련해야 하네.”

봄 햇살에 취해 정신이 반쯤 몽롱한 상태에 있던 청운에게 총표두 허천행이 갑자기 말을 걸었다.

“내공을 많이 쌓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청운이 총표두에게 고개를 돌리며 진지하게 물었다.

“명문 문파에 제자로 입문해 탁월한 스승을 만나 그 독문절기를 얻는 길이 가장 빠르지. 국주님도 어린 나이에 낙일문에 입문해서 낙일도법과 구결을 얻어 고수가 되었지. 자네는 이미 나이가 많아 어는 문파에서도 쉽게 받아주지는 않을 걸세.”

“또 있습니까?”

“그렇네. 전혀 길이 없는 것은 아니네. 중원 곳곳에 있는 암전상에서 돈 주고 비급을 사도 되지. 그건 돈도 아주 많이 들고 운도 따라야 하는 일이네. 아주 가끔은 우연히 기연을 만나 엄청난 비급을 얻을 수도 있지.”

총표두는 다른 것들도 알려 주었다.

“그러나 비급만 구한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건 또 아니네. 소림의 대환단이나 무당의 자소단 같은 영약이나 만년삼왕, 공천석유, 천년복령 같은 귀물을 복용하면 순식간에 고수가 될 수 있지.”

“네.”

“그래서 구대문파에선 자신의 직전 제자가 일정한 나이가 되면 영약을 복용시킨 후 자신의 공력을 소모해 가며 생사현관을 타통시켜 주기도 하네. 사파에선 몸을 상하게 하는 괴이한 약물과 기괴한 구결로 내공을 높이기도 한다네.”

“그렇군요.”

“하지만 그건 모두 선택받은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복이지. 내공만 높다고 다 해결되는 것도 물론 아니네.”

“말씀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목숨을 건 무수한 실전을 치르며 몸으로 체득하며 깨닫는 각성과 자각의 과정을 거쳐야 진정한 고수의 반열에 오를 수 있네. 아주 가끔은 우연히 기연을 만나 엄청난 무공을 얻기도 하지.”

허 총표두는 자신이 도달하지 못한 무공의 경지에 대한 회한이 많은 듯이 말했다.

청운과 허 총표두가 무공에 대해 이것저것 말을 주고받는 사이 안휘현이라는 현판이 걸린 커다란 성문 앞에 도착했다.

벌써 날이 어둑해져 있었다.

“총표두님, 저는 이곳에서 제 고향집이 멀지 않으니 집에 들러서 어머님을 뵙고 내일 묘시 경에 바로 여기 성문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청운이 허 총표두에게 공손히 예를 취하며 말했다.

“그러시게. 그게 뭐 어렵겠나. 가족과 충분히 회포를 풀고 천천히 오시게. 나도 오랜만에 한 잔 진하게 걸치고 늘어지게 한잠 자야겠네. 그럼 내일 봄세.”

허표두는 청운에게 손을 흔들고는 곧장 말머리를 돌렸다.

집까지의 거리는 약 오십여 리였다.

청운은 집에 들르기 전에 먼저 관제묘 근처 야산에 있는 아버님 묘소부터 찾아 재배하고 집으로 들어섰다.

“어머니, 소자 왔습니다.”

청운은 집안에 들어서기도 전에 사립문 앞에서 먼저 어머니부터 불렀다.

“누구라고, 청운이라고.”

청운의 부르는 소리에 놀란 어머니는 반쯤 열려 있던 방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어머니는 신발도 대충 신은 채 마당을 가로질러 달려와선 오랜만에 보는 아들을 얼싸안았다.

역시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자식의 일에는 언제나 말이나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시는 분이었다.

이래서 피가 물보다 더 진한가보다, 하고 청운은 생각했다.

‘그동안 어머니는 멀리 있는 핏줄이 땡겨서 얼마나 그립고 힘이 드셨을까.’

청운은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이 죄스럽게 느껴졌다.

“그래, 밥은 먹었나. 내 얼른 밥 지어 올게.”

어머니는 청운의 대답도 듣지 않고 곧장 부엌을 향해 종종걸음을 옮기셨다.

“어머니, 괜찮습니다. 영아 오면 같이 먹죠.”

청운은 부엌으로 향하려고 몸을 돌렸던 어머니의 소매를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

윗목에 어머니를 억지로 앉히고는 큰절을 올리며 안부를 물었다.

“절은, 무슨 절. 나는 네가 보내주는 은자 덕분에 이렇게 편하게 잘살고 있다. 이 나이에 내가 뭘 더 바라겠느냐.”

어머니는 청운이 묻지도 않은 대답을 하며 속 깊은 눈빛으로 청운을 대견스럽게 바라봤다.

“웬 말. 누가 왔지.”

대문 밖에서 영아의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방으로 들려왔다.

청운은 방문을 활짝 열고 동생의 이름을 반갑게 불렀다.

“오늘 아침 마을 앞 느티나무에 까치들이 유별나게 울더니 그놈들이 오늘 오빠가 오는 줄 미리 알았나 보네.”

한참이나 너스레를 떨며 여동생이 방안으로 들어섰다.

“딱 맞춰 오네.”

어머니는 밥상을 차리려 자리를 떴다.

“그래, 너는 여전히 읍내 포목점에서 일하고.”

청운이 동생에게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아니에요. 요즘 포목점이 장사가 시원찮아 지금은 잡화점에서 일해요.”

동생이 별일 아니라는 듯 청운의 물음에 대답했다.

* * *

저녁을 먹고 난 청운은 관제묘가 있는 뒷산에 올라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마을을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이미 마을은 어둠에 깊이 잠겼지만 어디가 어딘지 청운은 눈을 감고도 훤히 알아볼 수 있었다.

자신과 친구들이 천자문을 외우며 공부했던 서당.

서당을 끼고 흐르는 개울 위쪽의 버드나무집은 제일 친했던 친구 복호의 집.

그 옆의 옆집은 내숭이 장난 아니던 청아의 집이다.

어설프게 나무다리가 걸쳐져 있던 개울 길은 아버지가 산에서 약초를 캐서 집으로 돌아오시던 길이다.

맞은편 고샅길은 어머니가 새벽이슬에 발목을 적시며 채마밭으로 가시던 길이다.

버드나무가 늘어선 개울 옆 공터는 매일 친구들과 고함을 지르며 놀던 놀이터.

어느새 나이가 들어 마을을 떠난 친구들은 모두가 무엇이 되어 어디에서 잘 살고 있을까?

그렇게 어른이 된 친구들은 그렇게 자신이 원했던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가고 있을까?

어느새 아득한 과거의 일이 되어 버린 지난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에 어른거린다.

삶에서 모든 것은 단 한 번뿐이라는 생각에 청운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동네를 바라보는 내내 가슴이 아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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