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비검무-2화 (2/184)

002화 내 운명은 나를 모르고

한식경이 지났을까.

우람한 체구에 구레나룻을 잘 기른 형형한 눈빛의 황의의 중년인이 청운이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그가 염려 섞인 표정을 내비치며 청운에게 말했다.

“나는 하남표국을 운영하고 있는 능가요.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소. 내가 표행에서 돌아오다 관도에서 공자를 발견해서 다행이지 아니면 큰일을 치를 뻔했소. 이만하길 천행이요.”

몸을 반쯤 비스듬히 일으킨 청운이 힘은 없지만 공손하고 예의바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금 전 시비로부터 이곳이 어딘지 들었습니다. 저는 안휘현에 사는 강청운입니다. 개봉에서 과거를 치르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며칠째 먹지도 쉬지도 않고 너무 걷기만 해서 탈진한 모양입니다. 이렇게 폐를 끼쳐 면목이 없습니다.”

“아니요, 강 공자. 안휘현을 표행하는 중에 공자의 이름을 나도 몇 번 들었던 것 같소. 안휘연의 수재라는 소리를. 하지만 지금은 말세요, 말세.”

“무슨 일이 있습니까?”

“황제는 귀비의 치마폭에 파묻혀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통 관심이 없고, 외척과 환관이 국정을 좌지우지하니 그 끄나풀에 줄을 대지 못하는 사람은 그가 아무리 뛰어난 인재라도 등용이 되질 않소.”

“아…….”

“공자가 번번이 낙방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요. 공자와 내가 이렇게 만난 것도 다 인연 아니겠소.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것은 인간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 마음 쓸 것 없소. 그리고 마침 우리 표국의 서기가 섬서에서 자기 표국을 차리는 바람에 서기 자리가 비었소.”

“그렇습니까?”

“그리고 나에게 미욱하고 어린 딸 하나와 아들 하나가 있는데 아이들 글 선생도 겸해 주지 않겠소, 내 사례는 부족하지 않게 드리겠소. 그러면 공자도 집안 걱정은 한 시름 놓을 수 있지 않겠소.”

능 국주는 진심으로 청운에게 부탁하듯 제안했다.

* * *

그 길로 청운은 하남표국의 서기 겸 아이들의 글 선생이 되었다.

다행히 국주의 성정이나 인품도 나무랄 데가 없고, 아이들도 청운을 잘 따랐다.

게다가 둘 다 제법 총기가 있어 가르치는 재미도 있었다.

표국의 서기 일은 처음에는 다소 낯설어 몇 차례 표단을 잘못 작성하는 작은 실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능숙해졌다.

청운은 얼마 지나지 않아 국주를 비롯해 표두들의 신망을 전폭적으로 얻었다.

청운은 서기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표국의 정보가 자꾸 새나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표물의 내용과 표행길의 행로를 철저히 비밀에 부쳤음에도 불구하고 근자에 난데없이 표물을 강탈당하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귀하고 중요한 표물을 운반할 때 더욱 그런 일이 잦았다.

청운은 틀림없이 내부의 간자가 있다고 생각하고는 국주와 함께 간자를 잡을 함정을 팠다.

삼 왕야에게 가는 있지도 않은 대단한 표행이 있다는 소문을 일부로 이곳저곳에 흘렸다.

이 계략은 오직 국주와 청운 둘만이 공유하고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그 계략에 황 표두가 덜컥 걸려들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황 표두는 원체 자신의 일에 성실하고 충직한 사람이어서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닌데, 도대체 그에게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그는 돈을 탐하지도 명예를 탐하지도 여색을 탐하지도 않았다.

단지 무공에 관심이 많고 가끔 비번 날에 술을 과하게 마시는 것 외엔 단점이라고는 없는 사람이었다.

술 역시 자신이 맡은 표국 일을 망칠 정도로는 자주 마시지도 않았다.

과거만 치면 당장이라도 장원을 할 것 같았던 자신이 매번 낙방한 것처럼 황 표두의 배신도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청운은 이런 게 사람의 삶인가 싶어 마냥 헛헛하고 우울해졌다.

* * *

두—슈—둥—둥—둥—둥.

슈—슈—욱, 휘—리—리—리—릭.

퍼—퍼—퍽, 삐—릴—릴—리.

형형색색의 복장을 한 장삼이사들이 빙 둘러선 저잣거리 한가운데에 끊임없이 흥을 돋우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장날마다 어김없이 나타나 장날을 더 장날답게 만드는 팔대괴의 공연이었다.

대금아는 북을 치고, 정사자는 발로 사발을 돌리고, 왕소별은 깃발은 흔들고, 대붓을 든 궁불파는 하늘과 땅에 붓으로 연신 뭔가를 쓰며 큰 소리로 만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팔대괴의 공연은 도성 번화가를 더 번화하게 하는 도성의 명물이었다.

청운은 비번 날에 가끔 번화한 도성으로 나들이를 나왔다.

고서점에 들러 원하던 서적을 사기도 하고, 자신의 단골집인 팔거루에 들러 자신이 좋아하는 마파두부와 오리구이를 사 먹기도 했다.

표국의 단조롭고 밋밋한 일상이 지루할 때쯤 이런 도성 나들이는 그의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였다.

팔대괴의 묘기를 넋 놓고 보다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청운은 허기가 졌다.

그제야 자신이 오늘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운은 도성의 북문대로 끝에 있는 팔거루로 걸음을 옮겼다.

한참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일 층에는 거의 자리가 없었다.

청운은 이 층으로 올라갔다.

이층도 거의 좌석이 꽉 차 있었다.

특히 백색의 수리가 가슴에 수놓아진 적색의 무복을 입은 일군의 무리가 좌석의 태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희한하게도 밖의 대로가 훤히 내다보이는 좋은 자리 두 곳이 비어 있었다.

청운은 적색 옷을 입은 장한들을 피해 왼쪽으로 돌아 서둘러 그 자리로 갔다.

막 앉으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그 무리 중 제법 덩치가 있고 오른쪽 뺨에 가로로 칼자국 흉터가 있는 인상이 험한 자가 벼락같이 고함을 질렀다.

“그 자리는 네놈이 앉으라고 비워 둔 자리가 아니다. 그 두 자리는 독아문의 두 분 호법께서 식사하실 자리다. 밥을 처먹고 싶으면 저쪽 구석에서 찌그러져 조용히 먹고 가라.”

그자는 다짜고짜 청운에게 욕지거리 비슷한 반말을 했다.

“아니,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 무슨 말버릇이오. 그리고 이 자리가 예약된 것 같지도 않은데, 내가 못 앉을 이유가 어디 있소.”

청운은 그의 막말에 비위가 상해 조금도 지지 않고 쏘아붙였다.

“하! 이것 봐라 샌님 같은 어린놈이 감히 독아방의 적의검사에게 대들어. 여기서 죽고 싶단 말이지. 그래 내가 오늘 네가 이승을 하직하도록 도와주지.”

사내는 안 그래도 흉험한 자신의 인상을 잔뜩 구기며 옆구리에 차고 있던 자신의 검을 빼들었다.

“그래, 먹다 죽은 귀신은 때깔도 다르다는데 객점에서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청운도 지지 않고 다시 대들었다.

그리고 저자들이 아무리 사납고 흉폭하다해도 설마 백주대낮에 객점에서 살인을 저지를 거라고는 청운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정말 이 좋은 세상을 하직하고 싶단 말이지!”

사내는 자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검으로 청운의 목을 찔러 왔다.

절체절명의 순간.

반대쪽 창가에서 날아온 젓가락이 사내의 검을 튕긴 후 맞은편 기둥에 박힌 채 부르르 떨고 있었다.

“거기까지! 피와 밥은 도저히 함께 못 먹지.”

청아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가 이층 주루의 공기를 날카롭게 뒤흔들었다.

객점의 손님들이 일제히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자리에는 소매에 은색의 봉황이 멋들어지게 수놓아진 녹의의 무복을 입은 이제 막 소녀티를 벗고 숙녀가 된 것 같은 예쁜 아가씨가 국수와 소채를 맛있게 먹고 있었다.

“나를 방해한 것이 네 년이냐. 완전 겁대가리를 상실하셨군. 오늘 쌍으로 초상을 치러야겠네.”

자신을 적의검사라고 말한 사내가 여자에게로 위협적으로 거들먹거리며 다가갔다.

“멈춰라! 장번!”

막 이층으로 올라오던 염소수염을 기른 중년의 흑의인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의 가슴에 세 마리의 흰 독수리가 수놓아져 있었다.

그자를 본 적의와 홍의를 입은 사내들이 일제히 기립하며 포권의 예를 취했다.

“이 호법님을 뵙습니다.”

흑의인은 그들의 인사를 무시한 채 국수를 먹고 있는 녹의의 미녀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제 부하들이 강호의 경험이 과문하여 아가씨가 누구인지 모르고 무례를 범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대신 사과를 하겠으니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지요.”

녹의 미녀에게 사죄의 말을 건넨 흑의인이 사내들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뭣들하고 있느냐. 서둘러 남궁세가의 남궁영봉 아가씨에게 사과하지 않고.”

그제야 적의와 홍의를 입은 사내들이 녹의의 미녀를 향해 일제히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남궁세가의 아가씨인 줄 모르고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는 무례해도 된다는 말인가요. 이 호법님, 독아방은 비록 사파에 속하지만 그렇게 경우가 없다고 듣지는 않았는데. 밑에 사람 교육 좀 잘 시키세요.”

남궁영봉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위엄 있는 목소리로 사내들을 나무라며 고개를 들었다.

화장도 하지 않은 채 대충 머리를 뒤로 묶고 무복을 입고 있었지만 그녀의 미모는 상당했다.

특히 총기가 빛나는 두 눈은 마치 구슬을 이슬로 씻은 듯 깨끗하고 맑았다.

“예, 제가 교육 잘 시키겠습니다. 그리고 공자는 그 자리에서 식사를 하셔도 됩니다. 우리는 이곳이면 충분합니다.”

이 호법이라고 불리는 흑의인은 청운에게도 포권을 취하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청운을 바라보는 눈빛은 순간적이었지만 표정과 달리 야멸차고 냉혹했다.

청운은 자신에게 도움을 준 남궁영봉에게로 걸어가 최대한의 예를 표하며 말했다.

“낭자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무슨 말씀을요. 불의를 보고 참지 않는 게 강호의 도리지요. 부담 가지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공자님, 성함이 어떻게 되시지요.”

남궁영봉은 조금 전과는 전혀 딴판으로 부드러우면서도 청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강청운이라고 합니다. 하남표국에 몸을 의탁하고 있습니다.”

청운은 얼굴에 가벼운 미소를 띤 채 최대한 예를 다해 대답했다.

“아, 능국주가 천재라고 그렇게 자랑하던 강 서기가 바로 당신이었군요.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남궁영봉은 말과 동시에 소매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어 그에게 내밀었다.

“여섯 달 뒤에 있는 아버님 갑년의 초대장입니다.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저의 세가에 한 번 들러 주시지요.”

남궁영봉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얼떨결에 그녀의 초대장을 받아든 청운도 밥맛이 없어 그냥 주루를 나왔다.

남궁영봉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