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화 늦가을 달빛은 지나간 미련을 아득히 비추고
늦가을 대기에 씻긴 달빛이 투명하다 못해 시리다.
하남표국 별채의 지붕 위, 밤하늘에 얼기설기 얽혀 살랑거리는 백송의 잔가지가 깊은 밤하늘에 달빛을 아로새기는 현자의 붓질 같다.
마치 고목의 일부처럼 백송의 한쪽 가지를 밟고 선 검은 복면에 흑의를 입은 인형이 불 켜진 별채 한곳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다.
별채의 창호지에 비친 그림자의 움직임이 마치 정물처럼 고요하다.
잠시 후 창문 한쪽이 활짝 열린다.
갓 이십 대가 될까 말까 한 백의를 말쑥하게 차려입은 청년이 고개를 내밀고 물끄러미 달무리를 바라본다.
무슨 상념이 그리 깊은지 그의 눈빛이 밤하늘보다 더 깊다.
한순간 청년이 깊은 한숨을 내쉰다.
바로 그 순간, 백송 가지가 미세하게 흔들리나 싶더니 검은 인형이 먹줄을 튕기듯 백의의 청년이 한숨짓는 방안으로 쏘아졌다.
방 안의 젊은이가 놀랄 틈도 없이 한순간 복면인의 시퍼런 검 끝이 젊은이의 목젖에 닿는다.
“내놔라.”
복면인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시퍼런 검 끝으로 젊은이를 찌를 듯 단호하다.
“대체 뭘 내놓으란 말이오.”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젊은이의 목소리는 차분하다.
“모르겠단 말이지, 그럼 죽어야지.”
복면인이 검 끝에 살짝 힘을 주었다.
그러자 검 끝에 한 방울의 붉은 피가 몽글 맺힌다.
“정말 모르겠다면 내가 가르쳐 주지. 이번 표행에 대한 표단(계약서)과 행로에 대한 정보를 모두 내놔라.”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듯 흑의의 복면인은 칼끝에 한 번 더 힘을 주었다.
앳된 청년의 목에서 또 한 방울의 붉은 피가 시퍼런 칼끝에 맺혔다.
바로 그때였다.
“그건 절대 안 되지!”
중후한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우지끈 방바닥이 부서지며 번개처럼 한 인형이 위로 솟구쳐 올랐다.
그는 솟구쳐 오름과 동시에 젊은이의 목에 대고 있던 검은 복면인의 칼끝을 쳐냈다.
“드디어 꼬리를 잡았구나.”
바닥에서 회오리처럼 솟아오른 청삼의 중년인이 흑의의 복면인을 향해 분기에 찬 호통을 치는 순간.
하남표국의 모든 전각과 마당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그 불빛 속에 검과 활을 든 한 무리의 장한들이 별채를 완전히 에워싼 채 금방이라도 흑의의 복면인을 도륙할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비록 날개가 있더라도 너는 절대로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 빨리 복면을 벗고 네가 누구인지를 밝혀라.”
청삼인의 단호하면서도 서늘한 목소리가 흑의 복면인을 겁박했다.
“그 무슨 개소리를 그렇게 논리적으로 하시나.”
청삼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흑의 복면인의 검이 청삼인의 심장을 찔러 갔다.
“감히, 누구에게!”
청삼의 중년인이 복면인의 검 끝을 살짝 목만을 젖혀 흘린 후, 칼등으로 복면인의 검을 든 어깨를 후려쳤다.
청삼인은 흑의 복면인을 죽이지 않고 사로잡을 목적인 것 같았다.
청삼인의 급작스런 반격을 예측하지 못한 복면인은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한 강한 충격을 받았다.
그리하여 다급히 문을 박살내며 밖으로 날아올랐다.
하지만 비가 오듯 자신에게 쏟아지는 화살 세례에 흑의 복면인은 결국 던진 돌이 떨어지듯 마당에 내려앉을 수밖에 없었다.
바닥에 내려선 흑의 복면인을 보자마자 마당 중앙에서 여태까지의 모든 사태를 긴장한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던 황의의 중년인이 소리쳤다.
“나는 네 놈이 누군지 이미 다 안다. 그동안 나와 함께 동고동락한 옛정을 생각해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이실직고하면 모든 걸 불문에 부치고 용서하겠다. 내 장담한다. 황일평, 이 표두!”
방금 흑의 복면인에게 고함을 지른 사람은 다름 아닌 하남표국주 능천삼이었다.
그는 사십대 후반의 나이로, 어릴 적 낙일문의 제자로 들어가 낙일도법을 익힌 후 이십대 초반에 하남표국을 세워 하남 땅에서 황룡표국과 어깨를 겨루는 제법 규모가 있는 표국을 만들었다.
그는 육척의 장신에 성품이 호탕하고 뒤끝이 없어 주변에 평판도 좋았다.
“이미 내 정체를 아니까 이따위 복면은 필요 없겠지.”
흑의의 복면인, 아니 황 표두는 자신의 복면을 확 벗어젖혔다.
그는 삼십대 중반의 구레나룻이 덥수룩한 강인한 인상의 사내였다.
“국주님, 무림의 은원은 말이 아니라 검으로 하는 것이지요.”
황 표두는 말과 동시에 급습하듯 능국주의 심장을 자신의 검으로 찔러 갔다.
“기어이 내 호의를 무시하고 나를 실망시키는군.”
능국주는 자신의 말이 귀에 들리기도 전에 도를 뽑아 자신의 절기인 낙일도법을 전개했다.
파—파르르릉.
주변의 공기를 찢는 도의 파공음이 울림과 동시에 한줄기 붉은 도기가 황일평의 검기를 쪼개어 갔다.
퍼—퍼—퍼—엉.
굉음이 터짐과 동시에 황일평은 몸은 휘청거리며 수십 걸음 뒤로 주르르륵 밀러났다.
잠시 후 입에서 몇 모금 선형을 꾸역꾸역 토해 내더니 풀썩하고 바닥에 그대로 꼬꾸라졌다.
“저 놈을 포박해 창고에 감금하라. 내일 내 친히 심문해 진상을 낱낱이 밝히리라.”
국주는 할 말을 마치자마자 백의를 입은 청년을 향해 몸을 돌리며 말했다.
“강 서기 고생했네. 자네의 기지가 아니었으면 이번에도 어김없이 표물을 강탈당할 뻔했네. 내부에 간자가 있을 거라는 자네의 예측은 정확했네. 어디 다친 곳은 없는가.”
“아닙니다 국주님. 저보다는 국주님과 전호법께서 잘 대처하신 덕분에 다행히 목을 살짝 긁힌 것 외에는 아무 탈도 없습니다.”
청년이 가볍게 국주에게 목례했다.
“아니지, 황궁에서 큰일을 해도 시원찮을 자네 같이 뛰어난 인재가 고작 내 표국의 서기가 되고, 게다가 내 못난 자식의 글 선생까지 해주니 내가 복이 터진 사람이지.”
능국주는 자신의 말이 한 치의 거짓이 없는 진심이라는 듯 진지한 눈빛이었다.
“과찬이십니다. 국주님.”
청년이 다시 가볍게 능국주에게 목례를 했다.
“그나저나 별채가 이렇게 다 부서졌으니 별채를 고칠 때까지 본채를 쓰시게.”
“배려에 감사합니다.”
청년이 공손히 대답했다.
바로 그 순간, 적의를 입은 이십대 후반의 청의를 입은 표사가 능국주를 향해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리고 마치 자신이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 국주에게 다급한 보고를 했다.
“국주님! 황 표두가 쓰러질 때 독단을 깨물었는지 절명했습니다.”
“괴사로군, 괴사야. 어쩔 수 없지. 내일 날이 밝자마자 의원에게 보이고 무슨 독인지 알아보게.”
능국주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자리를 떴다.
* * *
본채로 쉬러 가던 강 서기, 아니 강청운은 마음을 바꿔 정원 연못가에 있는 전각에 올랐다.
갈대와 부들이 무성한 수면에 잠긴 달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청운은 자신의 지나온 과거를 생각했다.
그는 어린 시절에 동네에서 천재라는 소리를 자주 들었었다.
내가 못내 자랑스러운 약초꾼 아버지는 산에서 귀한 약재를 캐 오시면 나부터 챙겨 먹이셨다.
물론 어머니와 여동생에게도 잘 대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족에 대한 가장의 의무로 그런 것이라면, 나에게는 가족이라는 혈연의 정에다 미래에 대한 어떤 기대 같은 것이 더 담겨 있었다.
그리고 학당의 훈장님이 나를 칭찬했다는 소리를 다른 사람을 통해 듣고는, 때마다 불콰하게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오곤 하셨다.
그리고 술기운에 쓰러져 잠이 드실 때까지 집안 식구들에게 몇 번이고 거듭 사는 맛이 난다고 중얼거렸다.
현에서 치른 세 번의 해시와 향시에서는 세 번 다 장원을 했다.
하지만 중앙에서 치른 회시와 전시에서는 나름 답안지를 완벽하게 작성했다고 자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낙방을 하고 말았다.
그때마다 나는 과거에서 낙방한 것보다 부모님과 스승님을 또 실망시키고 말았다는 자괴감과 절망감에 죽고 싶었다.
그런 와중에 약초를 캐러 산에 올랐던 아버지가 절벽에서 떨어져 돌아가셨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목과 가슴에는 짐승이 그랬는지 아니면 어떤 외력에 의한 것인지 도저히 구분이 안 되는 상처가 몇 군데 있었다.
나는 더 절박해졌다.
홀어머니와 여동생을 먹여 살리려면 반드시 과거에 합격해 하급관리라도 되어야 했다.
그래서 아버지 장례를 끝내자마자 공부에 더욱 매진했다.
작년에는 정말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한 번 더 과거에 응시했으나 역시 또 떨어졌다.
그때 고개를 들어 바라본 하늘은 푸르기는커녕 샛노랬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오월의 먼지 펄펄 날리는 관도 위에서 그만 탈진해 쓰러지고 말았다.
그 순간 나는 그대로 이 세상에서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 *
목이 너무 탔다.
나도 모르게 물, 물, 물이라는 신음을 흘리자 누군가 내 입으로 따뜻한 차를 한 숟가락씩 흘려 넣었다.
어렴풋이 눈을 뜨자 흰옷을 입은 어린 여자 아이가 머리맡에서 찻잔을 소반에 내려놓는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 너머 격자무늬의 단아한 창호지창이 보이고, 도가 풍의 수묵화가 걸린 단출하고 깔끔한 방의 벽이 희미하게 보였다.
내 집의, 내 방이 아니었다.
“여기가 어디지요. 제가 왜 이곳에 이러고 있지요.”
나는 어린 여자에게 물었다.
“이곳은 하남표국의 별채입니다. 저는 표국의 시비 아현이고요. 공자님께서 관도에 쓰러져 있는 걸 표행에서 돌아오던 국주님이 발견에 모시고 왔어요. 공자님은 지금 삼 일 만에 간신히 깨어나신 겁니다.”
어린 시비는 이런 일이 가끔 있다는 듯 담담하게 대답했다.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 싶어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자 온몸이 몽둥이에 두들겨 맞은 듯 심하게 아파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른 후 청운은 다시 이불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공자님, 의원이 최소한 며칠 더 정양해야 한다고 했어요. 일어나실 필요 없습니다. 가만히 누워 계셔요.”
시비는 자신의 말을 청운이 반드시 귀담아 들어야한다는 듯 천천히 또렷하게 말을 한 후 찻잔이 올려진 소반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