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9화
“오랜만이야.”
안 반갑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그런 내 인사에 주교 중 하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며 물었다.
“혼자 왔나, 흉왕.”
“응, 아직 미혼이야.”
“…….”
안 웃어주네.
“…팍팍한 녀석들. 이게 나름 바다 건너 조선국에선 엄청 유행이라 들었는데.”
분위기가 싸해졌다.
눈으로 뒤덮인 설산보다 더욱 차갑게 냉각되는 분위기.
‘…돌아가면 가만두지 않겠다.’
내가 대충 이런 걸 최신 유행이라 알려준 하가 놈에게 원망을 품고 있자, 세 명의 주교 중 또 하나가 입을 열었다.
“과연, 오만한 모습은 변함이 없구나, 흉왕. 어찌 전성기의… 아니, 그 이상을 되찾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천산에 홀로 발걸음을 향하다니.”
녀석들은 과연 내 상태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아까 활잡이 놈들 이후로는 별다른 인적도 느껴지지 않는 게, 무의미한 피해를 늘리기보단 놈들 셋이서 끝장을 보려는 듯했다.
“뭐, 될 거 같으니까?”
“실로 오만하군.”
“흐흐, 애써 허세 부릴 필요 없어. 너희들이 날 보듯, 나 역시 너희가 보이거든.”
애써 가린 거적때기 안으로, 선명히 남겨진 끔찍한 상처들이 느껴진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검천과 권천. 지고한 경지에 달한 그 두 녀석들도 삼십 년 전의 악전고투에서 입은 상처에서 자유롭지 못했었지.’
그런데 이놈들은 죽은 천마를 되살리기까지 해야 했으니, 이 녀석들이라고 무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잘됐네. 죽지 못해 살아 있는 늙고 병든 퇴물들. 오랜만에 노인 공격 좀 해볼까?”
불가살을 영겁의 감옥에 가두고, 검천 녀석에게 짧은 애도를 하며 식었던 몸을 다시금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온몸의 준비는 다시금 만전.
이제 이대로 싸우기만 하면…….
“아차, 그전에 하나. 헥헥이는 나가 있어.”
품속에서 으르릉거리며 함께 전투 준비를 하던 헥헥이를 빼내 하늘 위로 던졌다.
“헤, 헥?!”
배신당한 표정을 지은 헥헥이가 허공에서 개헤엄을 치며 버둥거렸다.
“네가 낄 곳 아냐. 이젠 빠져 있어.”
이제부터 벌일 전장은 아직 어린 영수가 끼기는 너무나 험악하다.
불가살 놈처럼 삼십 년간 개꿀 빨며 영락해 버린 놈들이 아니라, 퇴물이라지만 항아리에 숨어 고진감래 품속의 지독한 흉험함을 더더욱 숙성시켜 온 노물들이 셋이나 되면 나조차 버거울 테니까.
“헥헥…….”
내 굳건한 의지를 느낀 것인지 헥헥이는 잔뜩 시무룩해져 저 높은 하늘로 뽈뽈거리며 날아갔다. 보아하니 위급 상황이 되면 바로 뛰어들어 도와줄 생각인 듯하지만, 뭐 어쩌겠냐. 내가 부처님도 아니고 그것까지 막을 수는 없지.
그러니까,
“슬슬 시작하자고.”
탁탁―
서서히 몸을 풀며 두 손에 힘을 모았다.
시작은 가볍게 무형지독부터 꽂아줄까 고민하고 있는데, 문득 그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흉왕. 이 자리에서 물러날 생각은 없나.”
“엥?”
내가 잘못 들었나?
“나보고 물러나라고?”
“그렇다.”
“호오, 나에게 그런 친절한 제안을.”
다른 놈도 아니고, 나를 곱게 보내준다니.
그 마음 씀씀이가 너무너무 고마워서 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엿 먹어.”
가운뎃손가락을 우뚝 펼치며 답하자, 녀석들의 표정이 딱딱히 굳었다.
“…삼십 년 전을 잊지는 않았겠지?”
“당가가 부활하려는 것을 들었다.”
“그것을 재현하려 하는가?”
“이 새끼들. 한 놈이 다 말하면 되는 걸 굳이 그렇게 돌림놀이 하듯 말해야겠냐?”
왜 한마디씩 하고 지랄이야?
“농담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본교의 정예들이, 천산의 입구에서 우리들의 명령을…….”
“하하하!”
“…왜 웃지?”
“그냥, 세월이 참 무상하다 싶어서.”
네 녀석들도, 변하긴 변하는구나.
“광신도 놈들이 협상도 제안하고. 세월이란 참으로 무상하구만.”
“…우리가 거짓을 말하는 것 같나?”
“아니, 믿어. 그 정도는 해줘야 광신도 놈들 답지.”
여기서 시원하게 싸우고 끝날 수 있었다면, 네놈들이 광신도 놈들일 리도 없잖아.
“너희가 날 잘 알듯이, 나도 너희들을 잘 알지. 삼십 년 전 그때처럼 개떼처럼 몰려올 걸 예상하지 못했겠냐.”
그래서 나 역시 한 수를 준비해뒀다.
“백팔나한이라고, 들어는 봤냐?”
“소림…….”
전설에 가까운 이야기지만, 그 전설이 소림의 전설이라면 마교도들도 모를 수가 없다.
삼대 주교 중 하나가 침음을 흘리듯 말하자, 나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해 주었다.
“그래. 지난 삼십 년간, 우리 땡중이 바른 자리 진자리 가려가며 곱게 키워 놓은 분들이 천산 어귀에 계신다. 너희 마교도 놈들이 한 놈도 세어 나가서 세상을 오염시키지 못하게, 단단히 틀어막아 줄 거야.”
“…그 정도로, 본교의 교도들을 모두 막을 수 있을 것 같나?”
“나도 그 전부를 막아주길 기대하지는 않아. 하지만, 일주일 정도 걸어 잠가주지 않을까?”
삼십 년간 산속에 틀어박혀 오로지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해 수련했던 그들이다.
맹목적임은 광신도 놈들 못지않을 테니, 단순히 천산 입구에 대한 봉쇄만이라면 일주일 정도는 버텨줄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이면 내가 너희들을 쓸어버리고 쫓아가 나머지를 마저 쓸어담기 충분하겠지.”
“……!”
내 답에 녀석들의 표정이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졌다.
* * *
거대한 파동이 몰아쳤다.
그 파동이 얼마나 거대한지, 수백 년 쌓여온 천산의 눈더미가 무너져 내려 눈사태가 일어날 정도였다.
그에 따라, 석관 속 빙백신수에 몸을 담그고 있던 이가 눈을 떴다.
“…이 기운은.”
뇌를 헤집어 과거의 기억을 찾아냈다.
그것은 삼십 년동안 저 깊은 곳에 쳐박혀 있던 먼지 쌓이고 퀴퀴한 골동품과 같은 기억이지만, 단 한 차례도 잊어본 적 없는 끔찍한 악몽과도 같은 것이었다.
“…….”
그는 몸을 일으켜 걸음을 옮겼다.
살아남은 삼대 존자는 다행히도 무공과 마도, 권능을 나란히 나누어 가진 이들이었으니, 그중 권능을 나누어 가진 그는 몇 걸음을 옮기는 것만으로도 수만 걸음을 건너뛰어 원하는 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엎드려 절하고 있던 자신과 같은 삼대 존자를 발견했다.
“왔는가, 무결(無缺).”
그는 자신의 등장을 알고도 행하던 의식을 멈추지 않았다.
그저 입을 열며 자신을 반겼을 뿐.
그 모습에 속이 답답해져 말했다.
“지금… 의식을 할 때인가?”
스스로의 머리를 백 하고도 여덟 번 찍어 피를 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들의 구주(救主)에게 바친다.
지고한 경지에 도달한 그들의 피를 의식을 통해 바치면, 그 생명력을 바치는 의미이기에 회복에 걸리는 시기를 줄일 수 있다.
아무 의미 없는 의식은 아니더라도, 수 없는 세월 꾸준히 행해야 그나마 효과를 발할 수 있을 만한 것이기에 지금과 같은 급박한 상황에서 할 것은 아니었다.
“흉왕(凶王). 그가 돌아왔네.”
“…….”
그 이름에 절을 하던 이는 우뚝 멈췄다.
하지만 그도 잠시, 다시금 의식을 재개했다.
“겁화!!”
결국 참다 못한 그가 소리치자, 상대방은 고저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기다리게. 세 번 남았네.”
쿵…….
쿵…….
쿵…….
기어이 백 하고도 여덟 번의 제례를 끝낸 후 겁화라 불린 이가 고개를 들었다.
피범벅이 된 얼굴로도 구주께 의식을 다할 수 있었음에 편안한 표정을 지은 그가 몸을 돌렸다.
“자넨… 참으로 많이 변했군. 가장 맹렬히 타오르던 그대가, 이리도 변할 수 있다니.”
겁화(劫火)는 종말에 피어날 화마(火魔)였다.
타오르고 타올라 종국에는 세상을 전부 집어삼킬 가장 맹렬한 불꽃이 바로 겁화였다.
그만큼, 역대 겁화존자라 불린 이들은 하나같이 폭급한 성정을 지니고 있었고, 그건 분명 눈앞의 인물도 다르지 않았다.
적어도, 삼십 년 전까지는.
“당장 그를 막으러 가도 모자랄 판에 이리 침착할 수 있다니. 겁화의 불꽃은 이제 사그라들어 작은 불씨가 된 건가?”
따지듯 소리치는 그의 말에 겁화존자는 덤덤히 답했다.
“글쎄, 그건 자네도 마찬가지일세. 무결(無缺).”
“…무슨 뜻인가.”
“우리 일곱 종파의 존자 중, 가장 그분의 후은을 짙게 받았기에 오만의 이름을 칭하는 자. 그렇기에 흠 잡을 곳 없는 무결이라 하는 그대가, 이리도 감정에 휩쓸린다는 게… 실로 통탄할 일이지 않을 수가 없다네.”
“…….”
그 말에 무결존자의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맞는 말이었다.
분명 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칠대 존자 중 가장 오만한 인물이었다.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고, 어떤 변수에도 그저 조소할 뿐이었다.
어차피, 어떤 일이 벌어지든 그분의 후은을 가장 두텁게 입은 자신이 직접 나서면 전부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었으니까.
하지만 그 오만은 삼십 년 전 산산이 깨졌다.
단 한 사람.
교의 대적자, 흉왕(凶王)에 의해서.
“…맞는 말이네. 나는, 더 이상 무결의 이름을 짊어질 수 없게 되었을지 모르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기에 더더욱 다급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무결하지 못하듯, 자네 역시 더 이상 세상을 불태울 겁화가 되지 못하게 되었네. 그리고 우리를 그렇게 만든 본교의 대적이 찾아왔네. 삼십 년의 시간을 넘어, 기어코 본교의 마지막 불씨를 꺼트리기 위해 찾아왔단 말일세!!”
발악하듯 소리쳤다.
“이런, 두려운가?”
“두렵고말고! 어찌 두렵지 않을 수가 있겠나!!”
솔직함을 담아 말했다.
“아직 그분께서 깨어나지 못하셨네. 내가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 그건 두렵지 않네. 그분을 맞이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 그 역시 두렵지 않네. 하지만 오로지 하나만은 두렵네.”
고개를 들어 자신의 구주를 바라본다.
그가 두려워하는 오직 하나.
“그분을 구하지 못할까 봐. 그분께 받은 은혜를 돌려드리지 못할까 봐. 그것이 너무나도 두렵단 말일세!!”
만년설보다 더욱 단단히 얼어붙은 빙정 속에서 눈을 감고 있는 그들의 구주.
그분께서 눈을 뜨지 못하실까 봐, 저 간악한 악적의 흉수에 떨어질까 봐.
그것 하나가 너무나 두렵다.
왜냐면,
“나는… 삼십 년 전에도 그분을 지키지 못한 죄인이니까.”
그 끔찍함은, 이미 한번 겪었던 것이니까.
차마 들지 못해 떨구어지는 고개가 처량하게 땅으로 박혔다.
죽음, 그보다 더한 고통이 그의 심장을 옥매여 왔다.
그때,
턱―
그가 완전히 쓰러지지 않게 붙잡아오는 손길이 느껴졌다.
“이보시게, 무결. 내가 지난 삼십 년간 얻은 한 가지 깨달음이 무엇인 줄 아는가?”
그리고, 그를 일으켜 세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바로, 우리는 우리 생각보다 더욱 하잘하다는 것일세.”
“…뭐?”
오만의 이름을 칭한 것은 자신이지만, 그에 못지않기로 오만하게 타오르는 분노종의 존자가 말했다.
“겁화의 이름을 짊어진 나지만, 결국 세상을 불태우지 못했네. 무결의 이름을 짊어진 자네이지만, 결국 완전무결하지 못했지. 그렇게, 여기까지 왔다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겐가.”
“그냥 당연한 말을 할 뿐일세. 우리가 받은 이름은 원래 그분의 것이니, 그것을 한 데 가진 그분께서만 세상을 태울 불길이 되실 수 있고, 그렇기에 또 무결할 수 있을 뿐이란 사실이지.”
그것을 나눠 받은 우리는, 고작해야 그것을 흉내 낼 뿐이고.
그래, 고작해야 흉내일 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상관없다.
“고개를 들게. 무결하지 못한 무결이여.”
“…겁화.”
“무슨 상관이 있겠나. 우리가 설령 그 이름을 다하지 못한다 해도, 그것은 당연히 우리에게 주어진 한계인 것일 뿐. 우리가 다하지 못한 것은 그분께 맡기고 귀의하면 그만일세.”
설령 세상을 불태우지 못해도 상관없다.
설령 무결하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다.
우리가 이루지 못한 것은, 분명 우리의 구주께서 매듭지어 주실 터이니.
“지난 삼십 년. 꽤 긴 시간이었다네.”
긴긴 시간, 고통과 멍에의 굴레 속 걸어온 그 길의 끝이 이젠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분께 귀의할 준비는 되었는가, 무결.”
마지막을 논하는 목소리가 담담히 들려오고, 그 물음에 오만의 주인은 마침내 절망에서 고개를 들어 답했다.
“…실로 건방지군. 감히, 내가 해야 할 질문을 탐하다니.”
실로, 오만한 대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