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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가유혼-332화 (332/350)

332화

온 자연이 노래하던 절벽 근방은 곧 조용해졌다.

모여들었던 구름과 바람과 물결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제 갈 길을 찾아 돌아갔고, 권천과 달리 검천은 옷자락 한 벌 남기지 않고 자연과 함께 사라졌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

녀석이 마지막에 보여준 경지다운 작별이지만, 그렇다 해서 정말 녀석이 아무것도 남가지 않고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검흔(劍痕).

검천이 바라보고 있던 절벽엔 저 거대한 절벽을 종이 삼아 그린 검흔이 거대하게 새겨져 있었다.

“하여튼, 끝까지 있는 척하며 가는구만.”

저것이야말로 무당 무공의 정수.

검으로써 하늘에 닿은 녀석이 남긴 깨달음이 저기 있으니, 무당의 누구든 후대에 저것을 본다면 검천이 남긴 심득을 얻을 수 있을 테지.

“그래, 먼저 가라. 가서 땡중 놈이랑 말벗이라도 하고 놀고 있어. 나는… 좀 천천히 갈 테니까.”

무책임하게 먼저 가버린 녀석들과 달리, 나는 할 게 많은 놈이다.

천마 목도 따야 하지, 마교도 놈들 정리도 해야 하지, 말 안 듣는 정파 놈들 뻣뻣한 목덜미도 이래저래 주물러 줘야 하지.

내가 없는 동안 기고만장해진 사파 놈들, 예절 주입까지 해줘야 한다는 걸 생각하면,

“바쁘다, 바빠.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겠다.”

뭐, 덕분에 녀석들을 만나러 가서 해줄 이야기는 무시무시하게 많아지겠지만.

그래, 그러니까 우선―

“암만 바빠도. 해야 할 일은 해야겠지?”

모든 일에는 다 순서가 있으니까.

“뒈진 척하지 말고 나와. 다 들켰으니까.”

고개를 돌려, 바닥에 덩그러니 너부러져 있는 팔뚝을 돌아봤다.

“어쭈, 안 나와?”

검천이 떠나가며 덩그러니 남겨진 팔뚝은 그저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고깃덩이라고 피력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럼 그렇게 죽든가.”

그것을 향해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 크르르르!!

순식간에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더니, 사나운 울음소리와 함께 내가 쏘아 보낸 장력에 저항하듯 방벽을 만들어냈다.

“애쓴다.”

하지만 고작해야 방벽 쯤.

우직―

가볍게 손을 쥐어 움켜쥐는 듯한 동작을 하는 것만으로도 사정없이 짜부라지며 비명을 토했다.

- 키이… 키이익!!

“어처구니가 없군. 그렇게 숨죽이고 있으면, 내가 모를 것 같았냐?”

우드득… 우드득…….

녀석에게 가해지는 압력을 더더욱 키울 때마다 녀석은 격렬하게 저항하며 흉흉한 기운을 토해 냈다.

- 키이이익!!

참다못한 걸까.

이리저리 짜부라지던 검은 연기는 한곳에 응축되더니, 이내 꽃처럼 피어나며 그 안에서 화살과 같은 형태의 덩어리를 쏘아냈다.

콰직!

“술법은 아닌 것 같은데, 어지간한 주물(呪物)은 이름도 못 꺼낼 만큼 흉물스러운 기운이구나.”

제법 필사적으로 쏘아낸 것이겠지만, 녀석에겐 불운하게도 상황이 썩 좋지 못했다.

삼십 년 가까이 검천에 의해 짓눌려 있던지라 제대로 힘을 발할 수도 없는데, 장소 역시 무당산의 정기가 응축된 곳이었다.

덕분에 쏘아 보낸 저주의 화살은 일 장을 채 뻗어 나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찌그러졌고, 내가 마주 쏘아 보낸 무형의 장력에 그대로 소멸되었다.

- 키익!!

최후의 저항이 수포로 돌아간 것을 보았기 때문일까.

녀석은 더 이상 내게 맞서 싸운다는 선택지를 택하지 못하고 온몸을 비틀어 이 자리에서 빠져 나가려 했다.

하지만,

“놓칠 리가 있나.”

가볍게 손을 휘두르는 것으로 그것을 바닥에 처박았고, 또다시 저항하려는 낌새에 아예 반으로 접어버렸다.

우드득―

- 크… 크르르!

괴로운 듯 울부짖는 모습이었지만, 큰 감흥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끝까지 같잖은 연기로군. 내가, 겨우 그 정도로 네가 고통스러워 할 것이라 생각할 것 같냐?”

그 역겨운 연기에 혐오감만 치솟을 뿐이었다.

우뚝!

괴로운 듯 몸을 비틀던 녀석의 몸이 멈췄다.

그러더니, 다시금 온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 킥킥…….

그 안에 담긴 것은 분명한 비웃음.

지금까지 괴로워하며 몸을 떨던 것이 전부 연기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킥킥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그제야 녀석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녀석 역시 내게 무언가를 할 수는 없지만, 나 역시 녀석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이라도 하는 듯 비웃음 소리는 점점 커져 갔다.

- 킥… 키킥…….

“재밌냐?”

그런 녀석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 킥킥… 킥…….

비웃음 소리는 점점 더 커져 갔고, 녀석은 마치 내게 뭔가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참,

“재밌네.”

히죽―

그런 녀석의 앞에서 미소를 지어 보이자,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녀석은 떨림을 멈추고 나를 응시했다.

잘린 팔뚝에는 눈도 코도 없었지만, 나는 본질적으로 이 녀석 안의 무언가가 저 너머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내가 저 너머의 무언가와 시선을 마주했을 때 나는 히쭉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주 재밌어 보이네.”

재밌겠지.

자신은 절대적으로 안전한데, 상대방은 자신을 해할 수 없어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으니까.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재밌을 텐데,

반대로―

“그걸 또 역으로 짓밟아주면, 얼마나 재밌을까?”

- …크륵?

“자기는 절대적으로 안전하다 생각하고 깝죽거리는 놈에게, 사실은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건 얼마나 재밌을 것 같냐?”

그래, 마치 지금처럼.

- 크륵……!

“어딜.”

어디 짐승 같은 놈 아니랄까 봐.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끼고 내빼려 하는 녀석을 발로 꾹 눌렀다.

“본체라면 힘들지 모르겠지만, 이 정도라면 가능할 것 같거든.”

꿈틀거리는 녀석을 짓밟으며, 내면에 잠들어 있던 ‘다른 녀석’을 일깨웠다.

“일어나라.”

탐(貪).

- 크르르르…….

어둠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듯한 흉성(凶聲)과 함께, 탐이 똬리 튼 몸을 펴며 일어났다.

- 크륵?!

잘린 팔뚝은 느껴지는 위기감이 어마어마한지 저항하듯 온몸을 비틀며 발버둥 쳤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탐이 포악한 아가리를 벌렸다.

어느새 내 발밑은 검푸른 기운으로 물들어 있었고, 그 안에서 거대한 맹수의 입과 같은 게 생겨났다.

“먹어 치워.”

콰직!

포악한 아가리가 다물어지는 순간, 잘린 팔뚝은 검푸른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콰직, 콰직, 콰직!!

- 크, 크르륵……!!

괴로운 듯한 비명성과, 무언가를 거칠게 씹다 못해 분쇄하는 듯한 파육음이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불가살이라 불릴 만큼 죽음 속에서 부활하는 권능을 지닌 괴물의 팔뚝이지만, 그런 괴물은 내 내면에도 존재했다.

무엇이든 먹어 치우기에 탐(貪)이라는 이름을 지닌 녀석은 괴물의 팔뚝이 재생하고 부활할 때마다 계속해서 물어뜯었다.

그러길 얼마나 반복했을까.

- 크, 크르르…….

마침내 단말마와 같은 소리가 들려오며, 저 검푸른 심연에서 느껴지던 발버둥이 끝을 고했다.

파스스…….

괴물의 팔뚝은 완전히 재로 화했고, 더 이상 팔뚝의 형상을 이루지 못한 채 검은 연기가 되어 소멸했다.

그리고, 그게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검은 연기는 허공에서 뭉쳐 마치 악귀의 얼굴과 같은 형상을 이루었다.

- 크르르……!!

‘저게 본체로군.’

저 너머에서 나를 마주 응시하고 있던 녀석이 저주를 토하듯 으르렁거렸지만,

“천산(天山)으로 와라.”

이제 와서 꼬리만 개에게 겁먹을 리가 있나.

“그곳에서, 모든 걸 끝내자.”

최후의 결전지로 적당히 초대장을 보내준 뒤 손을 휘휘 저어 잔재들을 털어냈다.

- 크릉……!

“에잉, 쯧. 꺼질 거면 곱게 꺼질 것이지.”

실제로도 녀석은 곱게 사라지는 대신,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어 내게 저주를 날렸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탐(貪)이 씹어 삼켰으니, 녀석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재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남은 것들을 끝마친 뒤 다시금 거대화한 헥헥이를 타고 날아올랐다.

‘검천, 그 녀석이 어지간히 화려하게 했어야지.’

갑자기 마른하늘에 용오름이 솟구치고, 잘 흘러가던 조각구름들이 한 데 모여드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암만 봉문 상태로 문을 걸어 잠그고 있는 무당파 사람들이라도 이게 뭔 일이여? 싶어서 몰려올 것은 뻔한 일.

자기네 집 안에서 일어난 기현상에 깜짝 놀라 사람들이 몰리기 전에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고, 마침 무당산 일대를 벗어나기 전 사람들이 절벽으로 하나둘 몰리는 것을 한번 슥 바라본 뒤 다음 장소로 날아올랐다.

* * *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헥헥이를 타고 도착한 곳은 소림.

지난번 나한들을 만났던 곳에서 백팔 명의 나한들은 가부좌를 취한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내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등장했음에도 놀라지 않고 반장을 취하며 인사해 왔다.

“안 놀라시네요?”

“무엇이 말입니까?”

“이 녀석이요.”

다시금 소형화한 헥헥이를 들어서 얼굴 앞에 가져다주자 나를 맞이했던 나한은 부처님 뺨치는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

“아주 귀여운 아이군요. 몸집은 작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이 보통이 아니며, 그 힘을 넘치지 않게 제어할 수 있으니 실로 영특하기까지 합니다.”

“헥헥!”

헥헥이는 자기 칭찬하는 소리에 기뻐하며 자신의 필살기를 선보였다.

비기.

마구마구 빵뎅이 흔들기.

“헥헥헥!”

“후후, 미안하구나. 경전 내에는 간식으로 줄 만한 게 없어서.”

“에이, 아니에요. 아무거나 주워 먹는 애는 또 아니라서.”

영물이라고 육식도 함부로 하지 않는 녀석이라서 말이지.

“어쨌든, 귀엽고 영특하다는 것만 느낀다는 거예요?”

“눈이 맑고 마음이 선하다는 것도 느껴지는군요.”

“이 녀석이 집채만 한 호랑이로 화한다는 것에 놀랍다는 것은?”

“삼십 년 뒤의 미래를 읽는 분도 계시는데, 고작 작은 강아지와 커다란 호랑이를 왕복하며 하늘을 나는 것에 놀랄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음, 그건 인정.”

그게 고작이 될 수 있나 싶지만, 그래도 삼십 년 뒤 미래를 읽는 것은 선 넘지.

‘나도 그건 아직 안 되겠다.’

한 놈은 성불하고, 한 놈은 등선했다.

친구라는 놈들이 각자의 길을 따라 정점을 봤으니, 나는 속세에서 마구마구 뒹굴다 그 뒤를 천천히 따라가면 되겠지.

“알겠어요. 그럼 뭐, 준비들은 다 되셨나요?”

“물론입니다.”

내 물음에 답하듯 백팔 명의 나한이 동시에 웅혼한 기세를 뿜어냈다.

하나하나가 자신이 가진 기운을 뿜어내는 게 아니라, 동시에 서로의 기운을 공명하듯 뿜어내자 경전 내가 진동하는 듯했다.

“과연.”

그 안에 깃든 것은 명백한 투지.

오로지 이 순간만을 위해 기다려온 이들답게 그들은 갈고 닦아온 예기를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좋네요.”

혼자 갈까도 생각해 봤지만, 역시 그건 좀 아니란 말이지.

“목표는 천산입니다. 십만대산 중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있으며… 제일 흉험한 놈들만 모인 곳이죠.”

달리 말하자면,

“마교의 본진이자, 천마(天魔)… 그놈이 도사리고 있는 곳입니다.”

사실상 중원 끄트머리나 다름없어 정말 아득히도 먼 곳.

여행길로 삼기에는 이만큼 끔찍한 곳이 있을까 싶지만,

“우리들의 종착지로 삼기에는, 이만한 곳도 없겠지요.”

참 기나긴 시간이었다.

나나, 이 사람들이나.

삼십 년 전에 얽매여 아직까지 그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우리는 그렇게 망령처럼 지금까지 남아 있으니,

“그러니 갑시다. 이 모든 것의 종지부를 찍으러.”

그 기나긴 세월의 끝맺음을 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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