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화
* * *
삼십 년째, 무당의 시간은 멈춰 있었다.
어릴 적, 전쟁통에 부모를 잃은 뒤 입양되고 양전해라는 이름을 얻은 뒤, 현우라는 도명을 얻기까지.
어린아이의 티를 벗어내고 성인이 되며 수염이 자라나고 흰머리가 모습을 보일 때까지.
무당파의 시간은 멈춰 있었다.
그럼에도 현우는 그것이 싫지 않았다.
시간이 멈춘 무당파는 무료함만이 남아 있지만, 그것이 평화의 또 다른 이름이란 것을 알기에 고즈넉한 무료함을 받아들였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무당에 거두어진 제자였기에, 사십 줄의 나이에 이름에도 갖은 심부름을 해야 했지만 그 역시 즐겁게 받아들였다.
“자, 오늘을 시작해 보자꾸나.”
그렇기에 그는 십 년째 함께하고 있는 물 양동이를 지고 아침 산문을 벗어났다.
삼십 년째 반복되고 있는 그의 아침 일과, 연못에서 물을 떠오기 위해서.
오늘도 그는 물을 길 것이고, 그것으로 사형들이 목을 축이게 될 것이다.
먼지가 내려앉은 마룻바닥을 닦고 선조들의 위패를 정성 들여 모시며, 산새들이 지저귀는 노랫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받아들일 것이다.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무료함을 또 반복할 것이다.
현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매일 물을 길기 위해 향하는 연못, 해검지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그리고 그곳에서 온갖 괴물체를 집어 던지는 소년을 만나기 전까지는.
“지,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 * *
무당.
무림의 태산북두라 불리며, 과거 정파의 찬란한 영광을 상징하던 그들은 호북 무당산에 있었다.
그리고 호북 무당산은 사천당가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냥 바로 옆에 붙어 있었다.
막말로 같은 사천에 있는 아미파와도 큰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니, 방계 놈들과 헤어진 뒤 하루도 지나지 않아 무당산에 도착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일단 오긴 했는데…….”
연못이 보였다.
이 연못의 이름은 해검지(解劍池).
무당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무당파를 방문하는 무사들이 갖고 있던 병장기를 풀어 놓는 곳이며, 무당의 산문 어귀에 존재하는 입구와도 같은 곳이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퐁당퐁당.
괜스레 조약돌을 던지며 자문했다.
‘검천, 그놈을 만나기 위해 왔지만. 그렇다고 봉문한 문파의 입구를 두드릴 수도 없잖아?’
암만 내가 막 나간다지만, 봉문한 문파를 건드리는 것은 진짜 못할 짓이다. 그들은 스스로의 약조를 지키기 위해 문을 걸어 잠그고 삼십 년간 외부와의 단전을 증명해 냈다.
향객의 발길이 끊긴 산문에 더 이상 인적을 찾아볼 수 없는 게 그 증거였고, 그런 곳에 들어가 ‘당신의 사조를 찾으러 왔다!’ 하고 소리친다면, 그건 진짜 문파의 존망을 걸고 전쟁을 치러 보자는 것과 다름없는 말이 된다.
‘어떻게 하지?’
검천 녀석이 죽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삼십 년 전 그날, 녀석이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 모르겠지만 그놈이 어디서 쉽게 죽을 놈은 아니었으니까. 그때 죽지 않았다면 수명의 제약쯤은 훨훨 벗어던진 고강한 무공의 경지로 아직도 정정할 것이다.
막말로, 무공 따윈 조금도 모르는 당궁상도 아직 살아 있잖아?
“그러니 녀석이 살아 있다고 봐야 하는데…….”
문제는, 그놈을 어떻게 찾아갈까 하는 것.
‘밤이 되면 은밀하게 침투라도 해봐?’
챙겨온 복면이 품속에서 울부짖는 게 어서 자길 사용해 주길 원하는 듯했다.
하지만,
“…아니, 내가 뭘 잘못했다고 침투해야 하는 거지?”
은밀히 침투하려니 이젠 자존심이 울부짖는다.
“내가 물건을 훔쳤냐, 죄를 지었냐? 손님으로 왔으면 당당히 들어가면 되는 거지.”
게다가, 지가 오라 했으면 직접 마중을 나와야지, 나를 난처하게 하는 건 또 뭐야?
그 모든 걸 고려해 보면 결국 결론은 하나.
“이 새끼. 빠져 가지고… 엉덩이만 무겁다는 거지?”
역시, 녀석을 불러내 직접 걸어오는 꼴을 보지 않으면 속이 뒤틀릴 것 같다.
“좋아. 네 방식대로 해주마.”
해검지.
모든 병장기를 풀어헤치는 곳.
그곳을 향해,
“옜다! 문안 인사받아라!!”
가진 바 암기들을 통째로 쏟아냈다.
풍덩풍덩!
시원한 물보라가 일어나며, 호쾌한 물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덩달아, 들려오는 비명 소리도.
“어엇?”
뭐야, 사람이 있었네?
“소협! 어찌 이런 무도한 행위를……!!”
호다닥 놀라서 달려오는 이는 반 오십이 다 되어 가는 중년인.
흰머리가 희끗희끗 보이는 나이대임에도 헐레벌떡 달려와서는 어깨에 든 물 뜨는 바구니를 내려놓고는 기겁해 소리쳤다.
“소협은 당최 누구십니까! 이곳은 무당파의 사유지이거늘, 어찌하여 위험천만한 것들을 무단 투기하시는 겁니까!”
“어…….”
갑자기 나타난 사람에게 뼈아픈 지적을 받았다.
‘아니, 나라고 사람이 있을 줄 알았겠냐고…….’
검천, 그 녀석의 잔재가 워낙 강해 다른 이들이 있을 것을 생각 못 했다.
“이러면 달려올 사람이 있을 줄 알고…….”
“그야 당연히 달려오지요! 설령 사문의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이런 행동을 했으면 달려왔을 겁니다!”
그건… 맞지.
“당최 어떤 연유로 이러시는지 모르겠지만, 부디 돌아가 주십시오. 본문은 현재 외부인의 방문을 간곡히 거절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곳은 국가에서 인정한 본문의 사유지며, 폐기물을 무단 투기 시 법적 처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뭐지?
이게 진정 속세와 연을 끊은 지 삼십 년 된 도인이 맞나?
“아니, 그…….”
어떻게든 상황을 이해시키고 찾을 사람이 있다 설명하려는 그 순간,
“큭? 고개 숙여!!”
“예? 갑자기 왜 말을 놓… 헙?”
저 멀리서부터 느껴지는 강렬한 예기에 깜짝 놀라 내공을 끌어올렸다.
구구구구구!!
정작 이 도사라는 양반은 등 뒤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기세를 못 느낀 듯했지만, 내가 끌어올린 기세는 깨닫고 숨을 들이켜며 뒷걸음질 쳤다.
‘아니, 뒷걸음질 치지 말고 숙이라고!!’
그 방향이 도사의 등 뒤이니 가만 놔뒀다간 휩쓸릴 게 분명했다.
재빨리 뛰쳐나가 그를 밀쳐내며 내공을 끌어올려 합장하듯 두 손을 마주쳤다.
전륜마공(轉輪魔功).
대파옥(大破玉).
폐관 수련이랍시고 가주 전용 연공실에 파묻혔던 보람을 볼 때가 왔다.
단전에서 끌어올린 내공이 마주한 두 손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구체를 형성했다.
회전하면 회전할수록 그 힘이 상승하는 파괴의 마옥(魔玉)은 삽시간에 그 크기를 사람 몸통만큼 불렸고, 그 기세에 깜짝 놀라 신음을 흘리는 도인을 뒤로한 채 저편에서 날아드는 투사체를 향해 뻗어 갔다.
거대한 충격이 예상되는 그 순간!
서걱―
날아든 투사체는 단번에 파괴의 마옥을 베어버렸다.
‘…뭐?’
종잇장이라도 벤 듯, 파괴의 마옥은 중심점을 잃고 소멸했다.
‘이게, 이렇게 쉽게?’
지난번에 만났던 투왕인지 뭔지 하는 놈이라도 감히 정면으로 받아내려 했다가는 낭패를 봐야 할 힘이 담긴 일수이거늘.
그 충격이 너무 커서 두부라도 베어버리듯 날아드는 그것을 보며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이 면전에 날아든 그 순간,
후웅…….
태풍과 같이 날아들었던 그것은, 가벼운 산들바람을 풍기며 멈추었다.
그제야 날아든 것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으니,
“이건… 검?”
정확히 말하자면,
“부러진…….”
“사, 사조님의 검?!”
“엥?”
다급하게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도사 양반이 해검지에 빠져 흠뻑 젖은 몰골로 경악성을 흘리고 있었다.
“사조님의 검이 어찌 이곳에……!!”
이 검이 무엇인지 아는 눈치.
나 역시 그게 무엇인지 잘 알기에 한숨을 푹 내쉬며 그를 돌아보았다.
“괜찮아요?”
“예, 예? 저는 괜찮습니다만, 이게 어찌 된 건지…….”
“어찌 되긴 어찌 된 거겠어요.”
이 모습을 보고 유추할 수 있는 답은 애초에 하나뿐이다.
“이 녀석이, 저를 부르고 있는 거죠.”
날아들던 기세를 완전히 감추고, 역으로 검병을 이쪽으로 향한 채 부유하는 부러진 검은 마치 길을 안내하는 듯했다.
어서 자신을 따라오라고, 잘게 떨리는 그 모습이 의미하는 바는 너무나 간단했으니까.
“믿기 어렵겠지만, 아마 그쪽의 사조 되는 사람이 제가 아는 사람일 겁니다.”
“예? 그게 무슨… 사조님께서는 밖으로 외유하지 않으신지 벌써 삼십 년이 넘었습니다. 하나 소협의 나이는 암만 봐도…….”
“뭐, 그런 일이 있는 거죠. 제아무리 무당산이라지만, 이 정도의 이기어검을 부릴 수 있는 이가 둘이나 있겠습니까?”
“그건……!”
그렇게 열심히 현실을 부정하려 해도, 바뀌는 것은 없다.
“갑자기 물에 빠트려 미안합니다. 따지고 보면 다 그쪽 사조님 잘못이니 그쪽에 청구하세요.”
“아니, 무슨 그런 패륜적인 말씀을……!!”
끝까지 예의를 지켜주는 아저씨에게는 미안하지만, 여기서 더 이상 입씨름하고 있어 봐야 서로 난처할 뿐.
“먼저 갑니다! 물기 잘 말리고 나오세요! 안 그러면 감기 걸려요!”
나랑 비슷한 생각인지 먼저 출발하는 부러진 검을 뒤쫓아 달렸고, 재빨리 해검지를 벗어났다.
* * *
부러진 검의 비행 속도는 무시무시했다.
전력으로 경공을 펼쳐서야 그 뒤를 쫓을 수 있었고, 사실은 그마저도 부족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멀찍이 앞서 나가다 내 속도를 고려라도 해주는 듯 멈춰서는 검을 보자면 짜증이 이는 걸 느껴야 했다.
- 아직도 거기냐?
짓궂은 녀석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기분.
저 나이 먹고도 성격 더러운 건 실로 한결같구나, 싶어서 영차영차 달려가니 어느덧 꽤 멀리 높이 왔음을 느꼈다.
‘징글징글한 놈. 더 강해진 거냐?’
거진 무당산의 꼭대기까지 왔다.
그 말은 이 검의 주인인 검천이란 놈은 이기어검 만으로 무당산 전체를 휘저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단 뜻이 된다.
이미 검으로 하늘에 닿았다는 녀석의 경지가 느껴지는 한 수였고, 그래서 더더욱 의문이 일었다.
‘이렇게나 강한 놈이, 왜 한 번도 당가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냐?’
이 녀석이 있었다면, 당가는 그 고난을 겪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위혼이 녀석이 홀로 외롭게 가문을 지키지 않아도 됐을 것이고, 내가 돌아왔을 때 웃어줄 녀석이 한 녀석이라도 더 남아 있었을 것이다.
당궁상 녀석이 스스로를 괴롭히듯 처절히 노동에 내던지지도 않았을 것이고, 정말 많은 것이 바뀌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만약의 경우들이 머릿속을 스쳐 가는 동안, 어느새 부러진 검의 속도는 서서히 줄기 시작했고, 나는 작은 묘옥 앞에 도달해 있었다.
“…하.”
들어오라는 듯, 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기세가 녀석이 있음을 나타냈다.
‘낯짝도 두꺼운 놈.’
대체 무슨 말을 할지 한번 들어보고 싶었다.
얄랑궂은 변명일지라도, 한번 뱉어보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래야만 이 답답한 속이 조금은 풀릴 것 같으니까.
이 한심한 원망이 조금이라도 가실 것 같으니까.
그런 생각으로 문을 열어젖혔고,
“이게… 뭐야?”
그곳에서, 나는 마주하고 말았다.
“흘흘, 이제 왔는가. 벗이여.”
너무나 오래된 얼굴.
너무나 그리운 얼굴.
너무나 괴로운 얼굴.
“이게… 뭐냐고……!”
그 얼굴이,
“왔으면 앉지 뭘 하는 겐가?”
그 얼굴의 주인이, 끔찍한 팔뚝에 꿰뚫려 있는 것을.
“이게 뭐냐고 묻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