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두려움.
그 말을 듣는 순간, 말문이 턱 하고 막혀 왔다.
내가 입을 다물자 자연스레 침묵이 찾아왔고, 그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걸터앉은 의자에 몸을 파묻으며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두려움, 두려움이라…….”
그 단어를 되뇌고 있는 동안 당위혼은 굳이 내게 대답을 강요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녀석은 내가 홀로 숙고하게 시간을 주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조금 더 내가 품은 마음이란 것에 한 걸음 더 쉽게 다가가게 되었다.
“…그렇구나. 네 말이 맞다.”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구나.”
무엇을 해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
가만히 있으면 진정되지를 않는다.
계속해서 움직여야 할 것 같고, 앉은 자리는 그게 어떤 푹신한 비단 위든 따끔한 가시방석 위와 같았다.
지금까지는 그것이 계속해서 움직여 온 내 행동 습관에 따른 관성이라 여겼다.
하지만 사실 답은 다른 것이었다.
“누군가를 믿고 맡긴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몰랐구나.”
그래, 답은 간단한 것이었다.
“네가 숨 쉬듯이 해온 것이, 이렇게 고마운 일인지 몰랐느니라.”
당위혼.
항상 어린 가주라 해왔던 이 녀석이, 그동안 얼마나 괴로운 길을 묵묵히 걸어왔는지… 이제야 지독스레 깨닫게 되는 중이다.
“형님.”
내 말에 녀석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우묵한 눈과 진중한 시선으로 나를 마주했고, 그 눈빛 속에서 많은 것을 익혔다.
그리고 새삼스레 깨달았다.
‘이 순간에도 너는 신중하구나.’
그전까지는 이 녀석의 성격과 성향 자체가 진중하고 무거우며 신중한 녀석이라 여겼다.
핏줄을 어찌할 수 없다고, 사유 녀석에게 물려받은 것이 이 성격이라니 참으로 고약하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구나.’
누군가를 믿고 맡긴다는 것.
누군가를 온전히 신뢰한다는 것.
자신의 한 마디가 타인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아는 자리이기에, 자신의 걱정과 염려마저 꾹 참고 누군가를 존재 그대로 온전히 믿어준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버거운 것인지.
자연스레 자신의 말수는 줄고, 남의 말을 경청하게 된 결과가 바로 지금의 당위혼.
“미안하다. 그동안 너를 어린 가주라 불러서.”
이미, 너는 누구보다 훌륭히 성장한 하나의 가주였거늘.
그 사실에 못내 미안함을 품자, 녀석은 뻔히 예상했던 답변을 내놓았다.
“괜찮습니다. 실제로 아직 어리니까요.”
“그래, 넌 항상 그러겠지.”
여기서 화낼 리가 있나.
“하아… 내가 청원 늙은이를 인정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내가 내건 기치도 후대에는 변할 것이고, 또한 내가 저지른 실수도 후대가 똑같이 벌하겠지. 그런 것을 세대의 교체라 한다면,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란 중용(中庸)을 유지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다하는 것뿐이라 생각하네.”
새삼 그와의 대담이 떠오른 것은 어째서일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 대개는 부정해 왔지만 오늘에서야 조금은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기분이다.
“후, 그래. 솔직하게 말하마. 걱정된다. 마구마구 불안해져 버리는구나.”
“차양당의 가솔들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렇지. 솔직히, 맨날 내 뒤만 따르던 놈들이지 않느냐. 단독 작전을 시행시키려 하니 영 불안해 미치겠어.”
“저는 그들의 조합이 꽤 균형이 잘 잡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형님은 다르십니까?”
“균형이라…….”
그건 맞는 말이다.
어떻게 짜 맞추기라도 한 것인지, 혹은 어릴 때부터 같이 성장한 결과인지.
극단적인 당불퇴와 이성적인 당율기, 그리고 그들을 조율하는 당지명과 그 셋으로 못한 것을 채워주는 서른의 형제들까지.
고작 서른셋이지만, 조금만 더 키워내면 어딜 내세우더라도 당당히 당가의 이름을 빛낼 수 있는 녀석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조금이 때때로 너무나 큰 차이를 만들어내는 법.’
내가 볼 때, 그놈들은 모자라도 너무 모자랐다.
“아직 여물지도 않은 놈들이다. 균형을 논하기에는 너무 모자라.”
“형님의 기준이 너무 높다고 생각하시지는 않으십니까?”
“내 눈높이가 너무 높아 그들을 과소평가하고 있지는 않냐는 물음이구나. 그래, 그리 생각할 수도 있을 게다. 하지만… 나라는 주관적 기준을 떼놓고 봐도 녀석들은 턱없이 모자라다.”
애초에 녀석들을 키울 때부터 귀원일기공과 차양십이수라는 아주 기본적인 심법과 무공을 익히게 했다.
그때야 워낙 당가가 몽땅 망해서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녀석들 전체를 대기만성의 표상으로 키워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 결과가 지금.
조금 더 키워낸다면, 진짜 어디 던져 놔도 생환이 가능하기 직전까지 왔다만…….
‘그게 지금은 아니지.’
지금은 어디 혼자 놔두기가 도저히 불안해서 안 되겠다. 어디 가서 처맞고 다니지는 않을지, 되지도 않는 정보 수집하겠답시고 움직이다가 멍청하게 걸려서 함정에나 빠지지 않을지.
“…아, 그렇구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 속에서 나는 마침내 깨닫고야 말았다.
“위혼아.”
“예, 형님.”
“아무래도… 가봐야겠다.”
암만 생각해도, 이 자식들을 도저히 혼자 놔둘 수가 없다.
한 입으로 두말하는 건 분명 잘못된 일이지만, 가만히 있으려니 마구마구 불안해지는걸?
“네 앞에서 책략이니 뭐니 헛소리 늘어놔서 미안하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번복해야겠다.”
“그들을 찾아가시려는 겁니까?”
“미안하다.”
잘난 척해서 미안하다.
그런데 도저히 가만 놔두질 못하겠다.
“그렇군요.”
솔직하게 고백하자 위혼이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내 선택에 불만도 불평도 없는 표정.
그 대신, 탁자 밑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이게… 뭐냐?”
“혹시 몰라, 미리 짐을 꾸려 놨습니다. 서안까지 제법 거리가 있으니 보법보다는 말을 타시는 게 빠를 겁니다.”
“……!”
“혹시 모를 일이지 않습니까. 필요하실까 봐 암기도 몇 개 챙겨 놨습니다.”
푸근한 미소.
그리고… 그 뒤로 비추어지는 후광.
“너 이 녀석…….”
“가주로서 제 할 일을 다 했을 뿐입니다.”
“…고맙다.”
다른 무슨 말로 이 기분을 다 표현할 수나 있을까.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나의 동생, 위혼이가 준비해 준 것을 한 아름 품에 안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 꼭, 이 죄 많은 놈들을 구해오마.”
“…벌써 그들이 무언가 했다는 것을 기정사실화시키시는 겁니까?”
잘했을 수도 있는 거지 않냐고.
조심스레 물어오는 위혼이지만, 이번만큼은 자신 있었다.
“아니, 그 새끼들 벌써 사고 쳤을 거야.”
내 모든 걸 걸고 다짐할 수 있다.
* * *
사고 쳤다.
며칠 째 멍하니 나무로 된 감옥 천장만을 바라보는 당지명의 머릿속에선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X됐다X됐다X됐다X됐다X됐다X됐다X됐다X됐다X됐다X됐다X됐다X됐다X됐다X됐다X됐다X됐다X됐다X됐다X됐다X됐다X됐다X됐다X됐다X됐다X됐다X됐다X됐다X됐다X됐다X됐다X됐다X됐다X됐다X됐다X됐다X됐다.’
어떻게 하지?
그런 생각까지는 이어지지도 않았다.
고장 난 맷돌마냥 삐걱거리는 머리는 잘 돌아가지도 않았고, 지금 처한 현실에 대한 부정만이 이어질 뿐이었다.
“하하, 꿈일 거야. 꿈, 꿈. 꿈일 거야, 이건 전부 다…….”
“쯧쯧. 미쳐버렸군.”
“그러게, 완전히 틀려버렸어.”
“그래도 맏형이란 양반이 어쩌다 저렇게 된 건지.”
그사이 수군수군 들려오는 목소리.
“다 너희 때문이잖아, 이 개자식들아!!”
동생이 아니라, 웬수놈들 뿐이다.
“어허 개자식?”
“우리는 형제인데?”
“그럼 맏형도…….”
“으아아아아!! 다 덤벼! 완장 떼고 한판 붙자!!”
이성의 끈을 잃고 동생이라는 이름의 웬수들과 뒤엉키길 한 차례.
마침내 온몸에 진이 빠져 바닥에 엎어진 당지명은 배 아래로 느껴지는 마른 짚풀의 감촉을 느끼며 서럽게 울었다.
“우리는 다 죽었어……. 다 죽은거야…….”
그리고, 그런 당지명의 곁으로 다가온 인영이 한 명.
“큼, 거 형님. 목숨에 너무 연연치 마쇼. 산 사람이란 결국 다 죽는 법. 어떻게 죽는 게 중요한 거 아니겠소?”
“…이 자식아, 그 어떻게가 문제잖아.”
결론부터 말하자면, 당지명을 비롯한 방계 전체들은 현재 의협맹의 지하 감옥에 수감된 상태였다.
정보 수집 하려다가 개같이 멸망하고, 의협인지 협의인지 붙인 놈들이 하는 꼬라지가 마음에 안 들어 전면전을 벌이려다 또 개같이 멸망했다.
조용히 일 처리 하라고 보낸 대형이 이 사실을 알면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내가 제일 깨져나가겠지…….’
‘우와! 우와! 우와! 대단해! 조용히 일 처리를 하라고 했더니 전쟁을 일으켰구나?!’
박수를 치며 으허허허허 하고 웃음 짓다가 마침내 이성의 끈이 끊어져 들이닥칠 대형의 갈굼이 머릿속에 훤하다.
“음… 유감입니다.”
“저두요.”
“조의를 표현하는 바입니다.”
“…나쁜 놈들, 너희 일 아니라 이거지?”
대표로 갈굼 받을 게 뻔한 자신과 달리, 대부분의 화풀이를 자신이 받고 남은 것만 나눠 받을 저 형제놈들은 실로 마음이 편안해 보였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웬수들 뿐이야…….’
하도 갈궈지고 또 갈궈지다 보니, 어지간한 것엔 눈 하나 꿈쩍하지 않게 된 형제들을 보다 한숨이 푹 나왔다.
“젠장,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마지막 순간.
의협맹주를 몰아치며 현장에서 그를 체포할 수도 있었던 순간, 그가 돌연 꺼내 든 무언가에 의해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와 함께 상황을 돌변하였고, 방계들은 제대로 힘도 써보지 못하고 곧장 제압당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것,
“흐흐흐, 얌전히들 있으시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지하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고, 저기 감옥 한편에서 지속적으로 흘러드는 산공향에 의해 자신들은 내공 대부분이 금제되어 버렸다.
“귀한 몸들이니 우리가 어찌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그쪽들이 화려하게 일을 저질러주신 덕에 이걸 공론화시킨다면, 정천맹 쪽에 많은 부분 양보를 받을 수는 있을 터.”
정천맹과 사천당문의 뒷배가 무서워 고문도 할 수 없이 수감만 할 뿐이지만, 자신들을 쉽게 제압했던 미지의 힘을 믿는 것인지 진태는 음흉한 웃음과 함께 사라졌다.
“아무쪼록 편히들 있어 주시오. 내, 값비싼 특식만 넣어드리라 할 테니까.”
실제로도 그 뒤로 들어오는 음식들은 기름기 뚝뚝 떨어지는 닭구이들이니, 갇힌 곳은 짚풀 더미 위의 나무 감옥이지만 한쪽에선 동생 놈들이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닭 다리를 뜯는 게 이 기묘한 현실이었다.
‘정말… 대체 그건 무엇이었지?’
결국 저 처먹기만 하는 동생 놈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 지쳐 풀썩 주저앉으며 생각했다.
‘산공독도 문제지만, 그보다 더 큰 건 역시 의협맹주가 마지막에 보인 기이한 수법이다.’
도저히 그 정체를 알 수 없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수법.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수법의 정체를 알아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조건… 대형에게 죽은 목숨이다.’
당지명.
이 말썽꾸러기들의 맏형으로서, 그리고 성질 더러운 대형의 직속으로서 살아온 그에게는 한 가지 촉이 생겨났다.
중간 관리자로서 눈칫밥만 먹고 살아보더니 생겨난 ‘불안함’에 관한 강렬한 촉!
그 촉이 지금 맹렬히 울부짖으며 말하고 있었다.
‘빨리 여기서 안 나가면… 진짜 큰일 난다.’
기분 탓이겠지만, 빨리 복귀하지 않으면 기다리다 지친 공포의 대왕이 직접 강림할 것만 같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