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가유혼-282화 (282/350)

282화

“생각해 보면, 그 모든 게 함정이었던 것입니다…….”

농부 아저씨는 꺼이꺼이 울었다.

자칭 의협맹이라는 놈들의 수단은 실로 고전적인 것이었다. 이자도 넉넉하게 주고, 기일도 널널하게 주는 것으로 상대방을 안심시킨다. 그렇게 적절하고 합리적인 척 상대방에게 계약을 유도한 뒤, 대금을 반납하는 당일 납입 창구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이었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찾아가 봤음에도 그들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자가 원금의 배가 되는 날 그들은 갑작스레 찾아왔습니다…….”

당연하게도, 선무열이라는 작자 홀로 오지는 않았다.

대규모 인력을 동원한 데다, 무려 관인까지 함께 찾아왔다.

그들은 합당해 ‘보이는’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기일까지 대금을 납입하지 않았고, 이자가 대금을 넘었기에 강제 징수를 진행한다더랍니다……. 저희는 억울하다고, 대금을 반환하는 곳이 문을 열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다 한패였겠군. 자칭 증인이라는 이들은 그날 업무를 보는 곳이 분명 정상 영업을 하고 있었다고 증언했을 테고.”

“…그렇습니다.”

고작 두 달 만에 한 마을의 재정을 털어버리는 수법.

구닥다리 수법이지만, 모르고 당하면 이만한 게 없었다.

“…이자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강제 징용으로 재물을 다 뺏긴 상태에서, 원금을 납부할 수 없게 된 저희들은 무거운 빚을 지게 돼버렸습니다. 이자는 계속해서 늘어났고, 기껏 그들에게 빌려 심은 곡물 역시 추수와 동시에 그들에게 가져다 바쳐야 할 신세가 된 것입니다. 어흑…….”

서럽게 우는 농부 아저씨의 모습에 위혼이는 착잡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형님, 어찌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생각하긴…….”

정파가 정파한 거지.

‘이게 합법 노예가 아니면 뭐야?’

예로부터 정파 위선자들은 늘 그러했다.

대놓고 악행을 삼지 않을 뿐, 법에 저촉되지 않는 선에서 은근슬쩍 악행이란 악행은 다 해왔으니까.

이번 역시 마찬가지.

그들은 산골 마을 사람 전체를 노예의 굴레에 빠트려버린 것이다.

“에휴. 진짜 이제 별의별 날파리 같은 것들이 다 꼬이네.”

몰랐으면 모르되, 알게 된 이상 신경 쓰지 않을 위혼이 녀석이 아니었다.

“형님.”

“알아. 저들을 돕고 싶다는 거지?”

“돕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해야 할 일이라… 그래, 그렇겠지.”

우리 당 대협께서 불의를 참을 수가 있겠냐고.

이건 못 참지.

두 눈 가득 분노를 활활 불태우는 위혼 대협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잠깐, 우리 대화 좀 하자.”

* * *

농부 아저씨는 일단 쉬게 해놓고, 위혼이 녀석만 따로 밖으로 데려왔다.

“결론부터 말하마. 이거, 생각보다 복잡한 문제다.”

“어째서입니까?”

즉답이 돌아왔다.

흥분한 것 좀 식히라고 일부러 한 시진 정도의 시간 간극을 두었는데도 녀석은 아직도 잔뜩 화가 나 있었다.

“어째서냐라…….”

쯧―

혀를 차며 그 한 시진 동안 하오문에서 구해 온 두루마리를 펼쳤다.

“의협맹. 웃기지도 않은 이름이지만, 연혁과 순서로 따지면 정천맹보다 먼저 설립되었더라.”

“…저희보다 먼저 말입니까?”

“그래. 그리고 그 농부 아저씨의 말마따나 실제로 정파 계열의 집단인 것도 맞고. 이런 시기에 살아남으려고 연맹을 맺는 건 꽤 흔한 일이잖냐.”

불과 일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절대적인 일강이 없는 시기였다.

지금이야 사패천이니 뭐니 하는 것들이 생겨나 사파를 일통하겠다고 깝치지만, 그때에는 구패라고 하며 사파 역시 아홉 조각 난 상태였다.

‘그건 정파 역시 마찬가지.’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고 집어삼키려고 이를 드러내는 시대에 무수히 분열되어 있던 정파의 문파들은 이해관계에 맞춰 종종 동맹을 맺기도 했다.

‘적당히 앞으로는 아닌 척, 뒷구멍으로 호박씨를 까고 있으면 그게 사천삼주가 되는 거고, 아주 대놓고 붙어먹으면 의협맹이 되는 거지.’

살아남기 위해 붙어먹은 곳.

의협맹의 탄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시세 담합, 지역 물류의 독점, 지역 내의 평판 조작 등. 처음에는 힘 있는 놈들이 흔히 부리는 장난짓거리를 하긴 했어도, 불법적인 짓거리까지 손을 뻗지는 않았다고 하더라. 아무래도 근본이 지역 내에서 오랫동안 명망을 자랑해 오던 집단이라 그랬겠지.”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그들의 행동이 변했다는 겁니까? 대체 어째서…….”

“간단한 문제다. 독사가 가만있는데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경계 태세를 취하지는 않지 않느냐.”

제아무리 흉험한 독을 품은 독물이라도, 가만히 있다가 그 독을 사방에 흩뿌리지는 않는다.

독물이 자신의 극독을 자랑하는 건 대개 하나뿐.

“설마… 겁을 집어먹었을 때?”

“바로 그거다. 멀지 않은 이웃 지역에서 갑자기 어마어마한 몸집을 가진 집단이 탄생해 버렸거든.”

바로, 정천맹이란 무시무시한 몸집을 지닌 맹수가 말이다.

“고작해야 서안 내의 마을 몇 개에서만 대장 놀이를 하던 그들에게 정천맹은 공포 그 자체였을 거다. 과거 구파일방 오대세가 때부터 자리해 오던 거대 집단을 몇 개나 합친 데다, 무림맹의 유지를 이었다는 소문이 퍼질 정도로 명분까지 확실한 집단. 주변의 물류 흐름을 단박에 빨아들이며 성장하여서는, 정파라는 하늘 아래 새로운 법도를 써 내려가는 정천맹을 공포 어린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게지.”

“…어째서.”

설명해 줘도 위혼이 녀석은 쉬이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제가 맹의 일에 크게 관여하는 것은 아니기에 잘 모를 수 있지만, 그들은 크게 외부로 공격적인 확장을 벌이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지. 실제로 거기 맹주 아저씨도 확장을 할 생각은 없어.”

이미 벌려 놓은 거 수습하기도 바빠 죽으려는 양반인데, 여기서 몸집을 더욱 부풀려버린다?

‘행복해서 온몸을 비틀겠지.’

“하지만… 하필이면 비슷한 행보를 보이는 구도가… 다른 쪽에 하나 더 있게 돼버렸단 말이지.”

“아…….”

그제야 모든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 녀석은 탄식을 흘렸다.

“…사패천, 또 그들이 문제입니까.”

“뭐… 그렇게 돼버렸다는 뜻이다.”

기존 구천의 네 집단이 모여 만들어진 연맹. 발족과 동시에 구시대의 질서이던 또 다른 구패를 급습하여 복속시킨 이들은, 이후 굵직굵직한 사파들을 흡수 통합시키며 그 몸집을 불려 왔다.

“그나마 최후의 양심은 있는 거겠지.

이전 시대였다면 같은 정파끼리 그런 짓을 할까 싶겠지만, 나타협의와 만가쟁패의 시대는 겉으론 정파라 불리는 것들의 속을 사파의 것으로 물들이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스스로가 걸어온 업보가 찔리는 것들은 자신도 같은 일을 당하지 않을까 제 발을 저렸고, 결국 당하기 전에 스스로 몸집을 불려야 한다는 위기감에 그들은 공격적인 확장 정책을 시작했으니―

“정천맹의 창설이 발단이 되어 여기저기서 그런 짓을 벌이고 있다는 뜻이군요.”

“그런 거다.”

그게 순박한 농부 아저씨를 평생 올 일도 없을 사천 땅까지 오게 만든 것이다.

그 이야기를 다 들은 우리 어린 가주님은 안색을 딱딱히 굳히며 말했다.

“역시, 두고 볼 수 없겠습니다. 그 말은 저희의 행사가 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그래,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사실, 그건 억지에 가까운 궤변이었다.

한 마을의 거상이 잔치를 열겠다고 주변 마을의 곡식을 전부 매입했더니 곡식의 가격이 올랐고, 마침 그 근처 산골에 홀로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고 살던 청년이 마을로 내려와 곡식을 사려 하니 너무 비싸서 사지 못했으며, 그 때문에 어머님께서 식사를 하지 못해 돌아가시게 되었다는 수준의 이야기였다.

다른 이들이라면, 그게 어째서 나 때문이냐며 화를 내도 이상할 게 없지만,

‘이 녀석이라면 무조건 자신 때문이라 하겠지.’

당위혼.

이 어린 가주는, 그 녀석의 동생이니까.

“후우…….”

이런 광경은 질리도록 보아왔다.

체감 시간 일 년 전, 실질적으로는 삼십 년이 흘러버린 머나먼 과거.

자신에게 없는 책임도 짊어지고, 험한 일을 굳이 사서 하는 그런 녀석.

자신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던 녀석이며, 평생 이해할 수 없었던 자신의 동생.

그렇기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쉽지 않은 일이다.”

“해야 할 일입니다.”

“이 녀석아, 좀 들어봐라.”

잔뜩 흥분한 당위혼은 가만 놔두면 자기 혼자라도 서안까지 찾아갈 기세였다.

그런 녀석을 빵실이 궁뎅이 두들겨 진정시키듯 달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네가 보기에 그놈들은 분명 극악무도한 놈들일 거야. 협과 의 따위는 도매금으로 팔아버린 지 오래고, 힘없는 양민들의 고혈을 짜 먹는 사파 놈들이랑 똑같이 보이겠지.”

“그럼, 아닙니까?”

“아니… 맞긴 한데…….”

알맹이 똑같은 놈들이 흰옷 입으면 정파요, 검은 옷 입으면 사파요 하는 수준이라 나도 참 이런 말 하기는 싫지만 어쩔 수가 있나.

“둘 사이에는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

“무엇입니까?”

“그들이 하는 짓이 합법이냐 불법이냐 하는 거다.”

“…아.”

순간 흥분으로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던 녀석이 무언가를 깨닫고는 탄식을 내뱉었다.

“그들의 행위가… 표면상으로는 합법적이란 것이군요.”

“그거다.”

이 녀석은 타고난 대협의 성정을 지녔을 뿐, 결코 지능이 떨어지는 녀석이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녀석의 살인적인 업무량에 의해 잘게 잘게 쪼개진 시간 무공을 익힌 걸로는 결코 지금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을 테니까.

단지, 도저히 두고 볼 수 없는 꼴에 눈이 멀어 이성을 찾지 못했을 뿐이지만 그마저도 몇 마디 말에 빠르게 열이 식으며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다.

그리고 덩달아 차갑게 식은 시선으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들이 한 행위는 합당한 이자에 곡식을 빌려주고 기한 내에 갚지 못했기에 합당한 권리에 따른 강제 징수. 이율이라도 불합리했다면 모를까, 이율마저도 합당했으니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건 그들이 아니라 오히려 피해를 입은 마을 사람들이겠군요.”

“맞아. 게다가 그 빚을 추심하는 사람들까지 녀석들에게 넘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징수관을 동원해 마을에 들이닥쳤다 하니 그럴 가능성도 열어놔야 했다.

“어디까지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정파인들. 그들을 만약 본가에서 징치하고자 출진한다면…….”

“그건 의와 협으로 현 무림의 기치를 다시 세우자는 정천맹의 설립 목적에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것. 가만 지켜보고 있던 놈들은 좋다고 본가를 견제하려 들 거다.”

지금도 사사건건 굴러들어온 놈들이 박혀 있던 우리를 뽑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다.

내가 워낙 알박기를 잘해 놔서 마땅한 사업체조차 제대로 대지 못하는 그들은 지금까지 그저 입맛만을 다시고 있었지만, 당가가 함부로 타 지역의 문파를 건드리는 순간 그들은 온갖 정치적 공세를 할 확률이 높았다.

‘아니, 확률이 높은 수준이 아니지.’

그런 일은 무조건 일어난다.

“…….”

그 사실을 인지한 위혼이 녀석의 표정은 딱딱히 굳었다.

“방법이… 없겠습니까?”

“이건 아주 전통적인 수법이다. 그리고 전통적이라는 건 대개 안전성이 높다는 거지.”

사기 치는 방법에도 안정적이라는 표현을 쓴다는 게 웃기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그 사실을 재차 인지한 위혼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렇군요. 결국 방법이 없겠군요.”

뛰어난 오성을 지닌 녀석인 만큼 이번 만큼은 마땅치 않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해 주는 거냐?”

“예, 그렇습니다.”

이번은 답이 없다는 걸 위혼이도 인지했는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이 방법을 제외하고는.”

책상 밑에서 무언가를 꺼냈으니,

“형님.”

“야, 야? 너, 너 그걸 왜…….”

“형님의 방법으로 가시죠.”

그건 바로, 더럽게 칙칙한 복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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