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화
봉문(封門).
하나의 문파가 스스로 외부와의 활동을 끊고 고립되는 것을 말한다. 무림과의 연을 끊겠다는 금분세수가 영구적인 것이라면, 그나마 봉문은 일시적이라는 점에서 좀 낫긴 한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아니, 왜? 우리가 왜? 우리가 뭘 잘못했는데!”
빼애액!
봉문과 금문세수는 기간의 차이만 있지 근본은 똑같다. 하는 쪽이 뭔가 켕겨서 알아서 고개 숙이고 들어가는 것.
그런데 그걸 우리가 한다고?
“사파 놈들도 쥐어패 줘, 마교도 놈들 뿌리도 뽑아줘, 숨어 있던 양반 색출도 해줘. 우리가 다 했어!”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거 당장 돌아가서 빵실이 빵뎅이라도 쓰다듬어 주지 않으면 급성 과로로 실신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파리한 안색과 떨리는 손끝으로 나의 무고함을 피력했지만,
“…후우, 소협. 저도 이런 제안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요. 하지만 적어도 소협이 말한 세 가지 과업 중 앞의 둘은 세상에 밝혀질 수 없는 것이지 않습니까요.”
“그, 그건…….”
“암만 눈 가리고 아웅 하기라지만, 장강수로상단이 전투력을 거세하지 않았음을 드러내면 그때부턴 논란이 됩니다요. 거기다 함포까지 끌어다 썼으니 국법에 어긋날 요소도 많기도 합지요.”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마교도들을 잡아낸 것은 말할 것도 없습지요.”
“잠깐! 그럼 세 번째는 왜? 그건 공식적으로라도 우리 애들 공적이잖아.”
“공적… 후우, 사실 그게 가장 문제입니다요.”
내가 느끼는 두통을 이 녀석도 공유하는 걸까?
답지 않게 이마를 짚은 녀석이 의자를 끌어다 맞은편에 앉았다.
“그들이 문제로 삼고 있는 것도 그것입니다요. 자칭 정천의협회라 주장하는 이들은 정천맹 내부의 숨겨진 어둠을 밝히고, 세간에 모든 진실을 공개하길 원하고 있습죠.”
“어둠? 진실? 정천맹 지어진 지 얼마 지났다고…….”
암만 세상에 별의별 음모론자들이 다 있다지만, 뭔 벌써부터 그딴 구호를 외치는 놈들이 다 있어?
나로서는 이해 안 가는 일투성이지만, 이놈의 반응은 좀 달랐다.
“그게… 또 일리가 있습니다요. 아니지. 정확히는 업보가 닥쳐왔다고 봐야 됐습죠.”
“업보?”
“사실 이번 원정 자체가 꽤 무리하게 강행된 것이지 않습니까요? 장로와 중진들의 약점을 가지고 협박하고, 있지도 않은 정보를 바탕으로 그들을 독촉해서 대군을 움직이게 만들었습죠. 그나마 분단에서 실제로 진행하던 음모가 있어 어느 정도 무마하는 데 성공했지만, 모든 게 의혹 어린 출장이긴 했습니다요.”
“그거야 뭐… 아니, 너도 즐겼잖아? 이제 와서 나 보고 어쩌라고!”
자기도 암묵적 동의부터 적극적 동의까지 다 해놓고, 왜 나만 봉문인데?
“…후우, 소협은 그저 쉬고 계시면 됩니다요.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요양하고 계시는 동안, 제가 다 처리해 놓겠습니다요.”
“이럴 수가…….”
음모가 느껴진다.
이대로 나를 보내버리고 내가 일궈놓은 것들을 꿀꺽하려는 배불뚝이 욕심쟁이의 음모가!
“젠장… 혹시, 우리 가문 애들이 그들을 찾은 것도, 일감 몰아주기 식으로 해석되는 거냐?”
“허허.”
허허로운 웃음이 긍정을 대신했다.
불퇴 놈이 기껏 배에 구멍 뚫리며 찾아놨더니, 그게 당가 몰아주기 식으로 돌아가 버리다니.
“으허, 으허허허허허허!!”
아주 듣다 보니 실성해 버릴 것 같아서 미친 듯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암만 뒤로 빼먹기를 조금 하고, 금분세… 아니, 장물 세… 아니아니, 금분세수를 좀 하려 했다지만, 진짜 아무것도 안 하고 저들끼리 정치질 하던 새끼들한테 밀려서 뒷방에 나앉아야 하다니.
‘삼십 년 전에 저 새끼들한테 그렇게 데이고 다시는 안 데이겠다고 맹세했는데!’
결국 또 저 사특한 뱀 새끼들한테 당했다는 사실에 꺼이꺼이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래, 돌아가자. 돌아가야지.”
힘없는 뒷방 퇴물 신세는 익숙하잖아.
“금방 돌아오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요. 그동안 연일 상승세였던 당가의 힘을 다듬는다 생각하시면 편하지 않겠습니까요?”
녀석이 되지도 않는 위로를 해줬지만 조금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나는, 그냥 저놈들한테 또 뒤통수 얻어맞았다는 사실로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았으니까.
“됐어. 나 갈래.”
돌아가서 빵실이 빵뎅이나 쓰다듬어 줘야지.
힘없이 암기 통을 주섬주섬 챙기는 그때,
“자, 잠시! 소협!”
웬일로 떠나려는 나를 하윤호가 붙잡았다.
“볼일 다 본 거 아냐?”
“…하하, 그게 사실… 공적인 업무는 다 보았습지요. 그런데…….”
우물쭈물하며 눈치를 보는 모습.
그제야 나는 말 못한 뭔가가 더 있다는 걸 깨달았다.
“뭐가 더 있구나?”
“…그, 사적인 부탁이 있습니다요. 이것입니다요.”
“이건…….”
녀석이 슬쩍 꺼낸 목함의 봉인을 풀고 내용물을 훑었다.
그건,
“딱 봐도 보통이 아닌데…….”
실로 기이한 기운을 풍기는 단환이었다.
“헤헤, 생사귀의의 생사환혼단(生死還魂丹)입니다요.”
“생사환혼단?”
“그러니까 이게 어찌 된 거냐면…….”
내가 없는 동안, 녀석 역시 한 편의 대서사시를 펼쳐낸 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놈과 하오문 문주 사이에 무슨 연관 관계가 있다는 건 들어 알고 있었지만, 듣자하니 기구하고 또 박복한 인연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얻게 된 환단의 정체는,
“…단순한 환단은 아니군. 별호에 생사니 뭐니 붙이는 것들은 대개 사이비(似而非)일 확률이 높지만, 이건 또 그럴듯해.”
술법적인 영역의 냄새가 강하게 난다.
단순히 약 기운만으로 정제한 게 아닌지라, 술법적인 영역의 치료도 겸하고 있는 듯했는데―
“확실히, 네 단전의 문제야 진작 알고 있었지. 그럼에도 쓸모가 없어 크게 개의치 않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사실… 실제로도 굳이 고칠 생각은 없었습니다요. 이건…….”
녀석의 뒷말이 물안개처럼 나오다 말고 흩어졌다.
하지만 대충 이해는 되었다.
‘옛 인연에 대한 약속 같은 것이었겠지.’
그때 나눈 맹세를 기억하고 있겠다는 스스로의 약속.
‘그리고, 그 대상이 떠나갔으니 뭔가 변화가 있었을 테고.’
그 변화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나도 모른다. 애초에 본인만이 알 수 있을 변화일 테니 함부로 추측할 수도 없는 일. 스스로 알려주지 않는다면 굳이 캐낼 이유도 없기에 단환이 든 목함을 쥐며 물었다.
“해서, 이걸 내게 부탁한다?”
“의술 쪽으로나, 술법 쪽으로나 둘 다 조예가 있으신 분이 이 무림에 얼마나 있겠습니까요. 게다가, 그중에서도 제일이라 하실 분이 눈앞에 계시니 굳이 다른 쪽을 돌아볼 필요도 없습지요.”
“그렇게 올려치기 해줘도 진료비 감면 혜택은 없어.”
“…그건 기대도 안 했습니다요.”
그려그려, 공과 사는 철저히 구분해야지.
“좋아, 그럼 바로 시작하자.”
“예? 지금 바로 말입니까요?”
“할 것 많다며? 우리 가문에 드리운 의혹을 해소해 주려면 몸이라도 챙겨야지. 누워.”
“그, 그렇다면야…….”
원래 여물 잘 먹은 소가 일 잘하는 법.
“입 벌려.”
영약 들어간다.
* * *
생사환혼단(生死還魂丹).
그 이름은 어디 사짜 냄새 잔뜩 나지만, 효력만은 진짜였다.
‘중원 땅이 넓긴 넓어. 내가 모르는 계열의 약술도 있다니.’
단순히 약초의 내공만으로는 치료할 수 없는 것도 술법을 동원해 치료해 내는 방식은 확실히 새로웠다. 그리고, 내가 활동하던 때와 동시대의 인물이라는 게 신경이 쓰였다.
‘워낙 활동 영역이 달라서 마주칠 일이 없었다지만, 지난 생에 녀석의 의술을 진작 알았더라면…….’
지난 마교의 발호에서, 좀 더 많은 녀석들을 살려낼 수 있지 않았을까?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은 곧 미련임을 알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전부 의미 없는 감상임을 알기에 적당히 털어내고 있는데,
“소협.”
뒤따라오던 하윤호의 복검, 자영이 나를 불러왔다.
“무슨 일이지?”
“감사를 표하고 싶었습니다.”
나를 불러 세운 녀석은 별안간 허리를 깊게 숙이며 읍해 왔다.
평소 갈구던 녀석도 아니고, 안면도 익숙지 않은 어린 것이 진심 어린 감사 표현을 하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뭘. 다 돈 받고 하는 건데. 진료비로 수수료에서 추가 면제되는 거 못 들었어?”
“의원이 합당한 비용을 받았다고 한들, 한 가족이 구명의 은혜를 입었는데 감사하지 않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건…….”
“게다가, 진정 감사드리고 싶은 것은 소협께서 본문의 일을 스스로 매듭짓게 허락하여 주셨다는 점입니다.”
“…쯧, 굳이 언급해야겠냐.”
일부로 최대한 말 안 하고 넘어가려 한 건데, 사람 찜찜하게 말이지.
‘하오문 놈들 아니랄까 봐, 대대손손 사연 한번 기구하구만.’
내가 활동하던 시대에서 문주 역할을 해먹던 녀석과 현 시대의 문주 역할을 해오던 녀석과는 크게 인과 관계가 없어 보였다. 아니면 혹시 내가 모르고 이 녀석도 모르는 인과 관계가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때 놈이나 이제 없는 놈이나 이놈이나 셋 다 기구하긴 매한가지였다.
‘하긴, 그런 놈들이니까 뒷배 없는 밑바닥 놈들의 우두머리나 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일없다. 너희 주인 몸 상태나 잘 챙기고… 아, 그러고 보니 나도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꿀꿀한 것은 별로이기에 대충 털어내려 하니 떠오르는 의문이 한 가지.
“만검산장의 장주라는 자. 북방 출신인 거지?”
“그렇습니다.”
하윤호가 해준 이야기 속 무명(無名)이라는 이가 지금의 구천 중 한 자리를 차지하는 만검산장의 장주였다.
‘우리가 한창 마교와 투쟁하고 있을 때, 북방에서도 전란이 일었다고 했었지.’
그 시대는 실로 난세라는 단어로밖에 설명할 수 없던 시기였다.
그 이전에도 재앙이나 혈겁이라 불리던 일들이 여럿 있었듯, 그런 것들이 동시대에 여러 번 겹쳤던 시대도 있는 것.
결코 유쾌하지 않던 기억을 털어 넘기며 가던 걸음을 되새겼다.
“그래, 수고해라.”
기분이 영 좋지 않다.
집에 돌아가서 빵실이의 빵뎅이나 만져줘야겠다.
* * *
“헥헥! 헥헥헥!”
이제 슬슬 무더위가 시작되는 여름이기 때문인지, 헥헥이는 연신 혓바닥을 헥헥거렸다.
스스로도 제어할 수 없는 꼬리가 좌우로 열심히 왔다 갔다 반복 운동을 개시했고,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속에 자그마한 평온이 찾아왔다.
“그 녀석. 기운도 좋구만.”
당가로 데려온 지 일주일 만에 적응을 마친 녀석은 장원 안쪽이 전부 제 구역이라도 되는 듯 연신 뛰어다녔다.
‘짧은 네 다리만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어!’를 주장하듯 연신 빵실거리를 빵뎅이를 흔들며 뽈뽈거리며 돌아다니는 녀석은 어느새 가문 내 모든 사랑을 독차지했다.
“삑삑!”
“헥헥?”
어느새 친해졌는지 아기 새 한 마리를 등에 태우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더럽고 비열하며 사특한 정파 위선자 놈들의 흉악한 간계에 당해 상처 입은 마음도 어느 정도 안정화되는 것 같다.
“그래, 때로는 이런 시간도 가져야지.”
끊임없는 대외 확장 정책은 당가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해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내실을 다지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참고로, 여기서 내실이란 당가 내의 내실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내가 문제지, 내가 문제야.”
구구궁―
한때 필요할지 모른다고 만들어뒀다가 지금까지 방치해 놓은 거대한 전용 연공실을 열어젖혔다.
원래는 폐관 수련할 때나 쓰는 용도지만, 그간 할 게 많아서 엄두도 못 내었던 공간.
그 공간으로 들어서며 생각했다.
“나부터 좀, 바뀌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