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 광동 】
교(敎).
고작 한 글자이지만, 그 한 글자가 주는 의미는 무척이나 무거웠다.
“…흠.”
하오문주의 말에 흑의인도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이 이상 저들이 헛된 짓을 한다면 본교(本敎)의 흔적 역시 이르게 세상에 드러나게 되겠지.”
그건 확실히 곤란한 일이다. 언젠가 다시 이 거짓된 세상에 진정한 진리를 외치며 부활할 교(敎)이지만, 아직은 시기상조였다.
“젠장! 그렇게 곤란하면 그쪽도 어떻게 해보란 말이오!!”
“어떻게라… 미안하지만, 그건 곤란해.”
“뭐요?”
내가 지금 잘못 들었나?
어이가 없어 하오문주가 표정을 딱딱히 굳힐 때, 흑의인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정천맹이라고 했던가. 저 우매한 무리가 도시 일대를 포위하여 정보가 느린 모양인데, 얼마 전 사패천이라 불리는 것들이 하필 곡(谷)의 근방 산채에 진을 차렸다.”
“뭣? 아니, 왜 하필…….”
사패천이란 놈들이 강남으로 움직일 낌새가 있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자리를 잡은 게 하필이면 자신들의 조력자인 마교의 무리가 뿌리내린 근방이라고?
“어째서… 아니, 어쩌면… 당연한 건가?”
하오문은 마교와 손을 잡았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그들이 협업을 제의했고, 그들은 서로의 필요에 따라 서로가 필요로 하는 것을 교환했다.
마교도가 필요로 하는 것은 하오문의 본단이 나서야 할 만큼 많았고, 그렇기에 또 그들은 광동 성내에 자리를 잡을 수는 없었다.
비선을 통해 몇 번이나 세탁 작업을 거쳐 은밀하게 전달해야 할 물건들이 많았기에 그들이 뿌리를 내린 곳도 도심에서 멀어진 어느 은밀한 심산유곡이어야 했다.
그러면서도 도시 내부로부터 물자를 받아들이고, 또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방어와 은신에 능해야 하는 곳이었으니―
‘저 정천맹 놈들과 한판 승부를 벌여야 할지 모르는 사패천이 진지를 설치하기에는… 필연의 일치일 수밖에 없구나.’
한계치를 넘어서 지끈거리는 두통에 한 손으로 이마를 덮은 하오문주가 눈을 꼭 감았다.
“…해서, 도와줄 수 없다는 거요?”
“당분간 몸을 숨겨야 한다. 그러니, 그쪽도 몸을 숨기도록. 우리와 관련된 증거는 은폐하도록 하고. 어차피 그대도 진짜 중요한 것은 성도 밖에 있지 않나?”
“제길… 그건 그렇긴 한데…….”
하오문주도 머저리가 아닌 이상 마교도와의 끈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었다.
하오문 소속이라 해봐야 기껏 정파가 수틀릴 때 한번 시비 걸고 지나가는 수준에 불과하겠지만, 마교랑 붙어먹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그대로 무림공적행이지.’
정(正)과 사(邪)가 함께 사이좋게 손을 맞잡고, 심지어 국가의 관병들까지 함께 출동해서 자신들을 발라먹으려 들것이다.
‘그건 더더욱 안 된다.’
그 사실을 잘 아는 하오문주였기에 본문의 중요한 내부 문서가 빠져나가는 와중에도 정파의 표적 수사에 가까운 행위를 눈 딱 감고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야 자존심 구기고 마는 정도가 그만이지만, 여기서 만약 마교와의 끈이 들킨다면 진짜 사패천까지 자신들을 잡아 죽이러 올지 모르니까.
“여유로워 좋겠군, 그쪽은.”
“이쪽도 여유롭지는 않아. 끽해야 산적 놈들과 반푼이 강시들의 조합이라지만, 이곳은 본교 내에서도 꽤 중요한 곳. 그런 것들이 천지분간 못하고 난동을 부린다면 대계(大計)에 지장이라도 생길 터.”
그것만은 피해야 한다는 의지를 강하게 보이는 흑의인의 모습에 하오문주는 눈두덩이를 꾸욱꾸욱 짚었다.
“…젠장. 한동안 시달려야겠군.”
어쩌겠나. 일평생 허리 굽히고 고개 땅바닥에 조아리고 살아왔는데, 고작 며칠을 더 못 숙이고 살까.
‘그놈들이 그 대군을 이끌고 왔는데, 오래 있을 수는 없겠지.’
대군을 이끌고 오는 건 그만큼의 물자를 소요하는 일.
더군다나, 저기 있는 사패천이라고 가만있지 않을 테니 정천맹의 이 횡포에는 시간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을 터.
“부디, 본교에 발목 잡히는 일은 없도록 바라지.”
골 아파하는 하오문주를 놔두고, 흑의인은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하… 끝까지 남의 일이라 이건가?”
처음부터 기묘한 술수를 부리며 나타나 자신을 ‘사제’라 칭한 인물.
종종 이렇게 무공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수법으로 나타나 먼 거리에서도 의사를 표현하고 사라지는 상대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던 하오문주는 턱 하고 의자에 몸을 기대며 천장을 바라봤다.
“그래, 마음껏 지껄여둬라. 마음껏 우릴 무시해 두어라.”
정파든, 마교든, 같은 사파든.
언제나 자신들을 가장 밑바닥이라 여기고 밑창으로 짓이기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그들 모두에게.
“반드시, 시간이 흘러… 꼭, 네놈들을 이 진창에 처박아줄 터이니.”
하오문주는 그렇게 다짐했다.
* * *
사파 사냥이 시작되며 한창 시끄러운 광동.
그런 소란스러움을 내려다보는 어느 고층에서, 나는 또다시 전쟁이라 하기엔 소박하고 모략이라 하기엔 웅장한 계획을 주도한 둘과 회합을 가졌다.
“자, 그럼. 정보를 조합해 볼까.”
정천맹이 가진 명분.
그 어마무시한 권능을 마음껏 휘두른 결과 하오문의 사업체들이 샅샅이 발각됐다.
애당초, 하오문 본단이 점령하다시피 한 광동이요, 부폐의 뿌리가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좀만 까뒤집으면 곧장 흑사파에 연관되어 민초의 고혈을 빨아먹은 놈들이 나오니, 심 봤다며 뿌리채 뽑아 쥐고 흔들어도 어디 관아에 달려가 억울하다 소리칠 수가 없다.
‘그래도 간혹가다 관아에 달려가는 놈이 있긴 했지만.’
그들에게는 실로 안타깝게도, 정천맹의 뒤에는 다른 누구도 아닌 사천성주가 있다.
설령 광동성주가 직접 오더라도 사천성주보다 끗발이 딸리기 마련인데, 어쭙잖은 관아의 현령이 무언가를 할 수 있을까?
그리하야 무자비한 정의의 손길이 광동 여기저기를 헤집으며 다닌 결과,
“…뭐, 정보라고 할 것도 없지만 말입니다.”
꽝.
안타깝게도, 당첨된 건수는 하나도 없었다.
“젠장, 역시 그렇지.”
본단 내에도 여러 사업체들이 있고, 그 사업체의 장들이 자신들의 상관 몰래 숨겨둔 비자금까지 탈탈 털어버릴 정도로 강도 높은 압수 수색을 강행했음에도 마교와 관련된 연결 고리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슬슬 위기입니다요. 이게 무슨 짓거리냐는 목소리들이 맹 내부에서 하나둘 흘러나오고 있습니다요.”
사파를 쥐어패는 거야 정파의 의무요, 책무라지만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는 이들을 계속해서 괴롭히는 것을 마냥 좋아할 이들은 많지 않다.
털 때마다 비밀 장부를 찾아내는 것도 하루 이틀 일이지, 기루나 주루, 도박장을 운영하는 이들이 흑사파와 선이 닿아 있는 것 역시 모르는 이들이 없는바.
이 머나먼 광동까지 와서 하오문이나 들쑤시고 있는 자신들의 행동에 의문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이지?”
“사패천이 강남 땅에서 준동할 기색을 보여 싸우기 위해 왔잖아.”
“그런데, 왜 아무리 뒤져도 뒤져도 흔적 하나 안 나오는 거야?”
처음에야 하오문이 사파니 자연스레 같은 사패천과 결탁하려는 모양이다 싶어 흑사파들을 이 잡듯이 뒤졌지만, 점점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다른 생각도 들었다.
“이게… 맞나?”
“같은 사파라서 결탁할 거라 생각하기엔, 걔네들은 이미 야차전도 보내버렸잖아?”
점점 지성을 가지기 시작하는 이들이 하나둘 늘어남에 따라, 약점이 잡혀 협박당하던 이들 역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큼… 이 광동 파견 건은 내가 처음부터 반대한다고 했잖소.”
“굳이 여기까지 와야 했나 싶고…….”
누가 자신들을 움직여 이곳으로 오게 한지는 모르겠다만, 어쨌거나 뒤에서 모략을 꾸며 파명이 이루어지도록 충동질한 놈은 분명 있다.
그렇다면 이 파병 자체에 대한 무용(無用)함을 주장한다면 뭐 하나라도 먹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불순한 의도를 가진 놈들이 하나둘이 아니니… 에잉 쯧.”
이래저래 정치적으로 몰린 상황이기는 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더욱 무언가 있다는 생각은 들지만 말입니다.”
“그건 그렇습지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으나, 그렇기에 더더욱 확신은 생겼다.
“역시, 이 땅에 뭔가가 있기는 있나 보구만. 그리고, 문주란 놈이 꽤 시간에 쫓긴 것 같기도 하고.”
“예… 그건 확실할 것입니다요. 그 아이가 분명 두 눈으로 확인하였다 하였으니…….”
분명 무언가가 있다는 걸 확인하고 광동 땅으로 왔다.
홍단, 그녀가 목숨 바쳐 가져온 서신엔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설들에 대한 목격담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고, 따로 정보선을 통해 확인해 본 바 무인들이 속속들이 사라진 정황 역시 포착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이 잡듯이 뒤졌는데 나오는 게 없다고?
“숨길 거면 제대로 숨겼어야지. 하다못해, 그럴듯한 자투리 증거라도 하나 던져주는 식으로 말이야.”
뒤져서 나오는 게 아무것도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하오문주란 놈이 이를 악물고 무언가를 숨겼다는 증거.
‘이런 혼탁한 시대에 하오문이 외부 세력과 결탁하지 않았을 리 없다. 대대로 하오문은 살아남기 위해 힘 있는 세력과 손을 잡고 그 위세를 빌리는 걸 주된 생존 전략으로 삼아왔으니까.’
털다 보면 먼지 하나쯤은 나오는 게 당연지사.
그런데, 어쭙잖은 흑사파만 나오고 아무런 끈도 나오지 않는다면 그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뭉친 것들이 실로 위험한 존재들이고, 그들에 대한 정보는 외부로 퍼져 나갔다간 위험 부담이 너무 크기에 적당한 미끼를 던질 새도 없이 전부 숨겨버렸다는 뜻이겠지.’
“저… 공자님. 의도는 알겠지만, 그래도 이대로 계속 밀어붙이는 것은 힘들지 않겠습니까요?”
“힘들긴 뭘 힘들어? 이런 건 원래 기세 싸움이야. 먼저 쫄리는 놈이 뒈지는 거지.”
“아니, 무슨… 공자님께서는 혹시 제가 모르는 본단의 비밀 안가라도 알고 계십니까?”
“내가 그런 걸 알겠냐?”
내가 미래에서 과거로 돌아온 회귀자라면 모를까, 과거에서 미래로 건너뛴 구시대 유물인 이상 그런 걸 알 수는 없다.
그럼에도 그 시간대로부터 살아온 구시대 유물이기에, 고금을 통틀어 절대 변하지 않는 진리 하나만큼은 안다.
“다만, 그런 놈들은 대개 남을 더럽게 못 믿거든.”
그런 놈들은 꼭 자기가 모든 비밀을 다 관리하겠다고 나대다가 큰 사달을 만들고야 만다.
“그러니까, 녀석들에겐 더 이상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보다는, 다른 쪽에 신경을 써야겠지.”
지도.
광동성이 그려진 지도가 보인다.
군략을 짜기 위해 각 세력들의 현황을 그린 지도지만, 지금 보아야 할 것은 그려진 광동성이 아닌 더욱 바깥.
“해서, 사패천 놈들이 여기 자리 잡았단 말이지?”
성도와는 거리가 있는, 하지만 지리적으로 결코 광동의 성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곳.
그 산 중턱에―
“사패천의 이들이 임시 산채를 설치하고 병영을 이루고 있다 합니다.”
“하 참. 산적 놈들 아니랄까 봐.”
장강수로상단과 하오문 사천지부에서 파견 나온 정보원들이 가장 먼저 한 게 사패천에 대한 경계다.
언제 어디서 쳐들어올지 모를 놈들에 대한 대비책으로 사람들을 풀어 눈과 귀를 여기저기 심어놨으니, 일천이 넘는 대군세의 움직임이 포착되지 않을 수가 없다.
“혹시라도 빠져나오면 곧장 말해 줘.”
“알겠습니다. 그런데.”
걱정 말라는 듯 말하던 육언이 돌연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한 가지 재밌는 정황이 파악되었습니다.”
“재밌는 정황? 마교 끄나풀이라도 발견했어?”
“그렇습니다.”
“뭐?”
진짜로?
“사패천의 대군세가 지나간 발자취를 좇던 이들이 말해 오길, 그들이 지나간 자리가 마치 오래전부터 길이 닦여 있다고 하더랍니다.”
“오래전부터 길이 닦여 있어?”
“그렇습니다. 그들이 자리한 비슬산이란 곳이 경제적 요충지라면 그러려니 하지만, 그곳은 전략적 요충지라면 모를까. 사람 오다니기에는 결코 좋지 않은 곳인 데도 여러 사람이 오가며 자연스레 길이 닦인 흔적이 있다고 합니다.”
“재밌네…….”
정작 찾으려던 하오문과 마교의 관계에 대한 증거는 찾지 못했는데, 그 마교의 지부가 어디 숨겨져 있는지에 대한 정보는 찾아버린 셈.
“그들이 마교일 확률은?”
“확률로 따진다면야…….”
육언은 셈하듯 눈을 감고 중얼거리다 천천히 손가락 하나를 펼쳤다.
‘일 할?’
그럴 리가 있나.
“십 할. 확신하는 상태입니다.”
“하!”
천재 군사 나리의 확신.
이보다 더한 보증 수표가 있을까?
“어떻게, 정천맹에 이 사실을 흘려보면 되겠습니까요?”
마교의 지부를 발견했다는 소식에 눈이 희번득 돌아가 버린 하윤호가 곧바로 반응을 일으켰다.
하지만,
“아니, 우리가 직접 치는 건 하책이지.”
누구 좋으라고 놈들과 직접 싸워주냐?
“산 하나에 호랑이… 아니, 이리 두 마리가 함께 뒹굴고 있다잖아.”
그럼 벌어질 일은 하나뿐이다.
“어디, 이리 두 마리 중 누가 살아나오는지 한번 확인해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