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에? 아니, 왜?
당연히 허용해 주는 분위기 아니었어?
“뭘 그렇게 보는가. 당연히 안 되네.”
“어째서입니까?”
“이름. 바꾸시게.”
“…….”
뭐요?
“무림맹이라는 이름은 안 되네. 다른 걸로 하게.”
“…그러니까, 이름만 바꾸면 된다는 겁니까?”
“그렇다네.”
“허허허…….”
이 양반, 생각보다 재밌는 양반이었네?
“너무 그렇게 보지 마시게. 꽤 중요한 주제니까.”
“…혹시 원수 이름에 무(武) 자나 림(林) 자가 들어가십니까?”
생각해 보니 이름들에 꽤 잘 들어갈 것 같은 글자들이긴 하네.
“당연히 그런 하잘한 이유는 아닐세. 중요한 건, 자네 말대로 맹을 만들건 집단을 만들건 무리를 만들면, 사람들은 무엇보다 무림맹을 떠올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지.”
“그게 무슨 문제가 됩니까?”
“아주 큰 문제가 되지.”
이문학은 진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자네는 자네의 계획이 얼마나 큰 파장을 몰고 올 것 같나?”
“얼마나 큰 파장이라…….”
이미 이렇게 묻는 순간부터 이문학이 생각하는 최솟값은 내가 말한 걸 넘어섰다는 뜻이겠지.
그러니 말하자면,
“아무리 그래도, 예전 무림맹만큼은 안 되지 않을까요?”
“그야 당연하지, 이 사람아.”
암만 판을 벌여본다 한들, 전 정파 무림을 한데 뭉치게 했던 무림맹을 재현할 수야 있을까.
‘워낙 병신같은 곳이라 그렇지, 혁신적이긴 했어.’
괜히 무림이 중원 속 또 다른 중원이라 불리는 게 아니다.
그 전체를 아우르는 무림맹은 관과 무림의 불가침 관계라는 것이 어째서 탄생했는지를 증명할 만큼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최대치로 잡아봐야 절반 수준이겠지.”
“절반이나 나올까요?”
“그 표정을 보아하니 기껏해야 서부 무림을 규합시키는 걸 목표치로 삼았나 보군.”
정확했다.
‘그 서부 무림이라는 것도 결코 적은 것은 아니지만, 왕년의 무림맹은 세외에까지 영향을 끼쳤으니까.’
“사실을 말하자면 본관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네. 잘해 봐야 서부 무림맹을 흉내 내는 게 고작이겠지. 하지만 말일세, 앞에 ‘서부’라는 수식어가 붙기는 해도, 세인들은 그것을 무림맹의 후신이라 생각할걸세.”
“…아아. 이해했습니다.”
역시 무리의 우두머리라 그런가.
‘보는 눈이 다르구만.’
“싫으나 좋으나, 모인 이들 중에서 자연스레 예전 직위를 요구하는 이들이 있겠군요.”
“요구나 하면 다행이지, 아주 자연스럽게 그 직위를 행사할걸세.”
그리고 그건, 사천성주의 입장에서는 결코 좋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렇다면 내가 허용해 줄 리가 있겠나?”
“이름을 바꾼다는 건 그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자는 뜻이시군요.”
“이름을 바꾼다 해서 완전히 막아낼 수는 없겠지. 덩치가 큰 이들은 콧방귀 꽤나 뀔 테니까. 그럼에도, 시작부터 난리 치려는 이들에게 적당한 제약은 줄수 있을걸세.”
“그렇겠네요. 혹시 생각해 두신 이름 정도는 있습니까?”
“글쎄. 적어도 사천맹 같은 것만 아니면 된다네.”
그건 너무 속이 뻔히 보이잖아.
이문학 역시 괜히 다른 무림인들에게 광역 도발을 걸고 싶지는 않았는지 적당한 선은 그었다.
‘그럼 대충 승낙인가.’
이 아저씨가 중간에 재미없는 장난을 치기는 했지만, 어쨌든 뜻한 바는 이뤘다고 볼 수 있다.
“한데, 이제 자네가 하고자 하는 얘기는 충분히 들었으니, 본관 역시 몇 가지 물어도 되겠나?”
“얼마든지요.”
“자네는 뭘 원해서 이런 난장을 치려는가?”
“허허, 난장이라니. 저희는 어디까지나 무림의 안정과 질서를 원합니다만?”
“거짓말하지 말게.”
쳇.
한 번을 안 속아준다.
“예 뭐, 첫 번째로 거래망의 장악이죠. 기존 무림맹은 하지 못했던.”
“이미 가지고 있지 않나?”
“앞서 말씀드린 것과 같습니다. 성주님께서 얻을 부의 흐름을 관리하는 건 결국 저희 아니겠습니까?”
“진정 천하 운영에 끼어들 생각인가?”
좋으나 싫으나 유사 무림맹에 흘러들어올 모든 물자는 장강수로상단에 큰 지분을 가진 당가가 관리하기에, 그 물자를 역추적할 수 있다면 동시에 유사 무림맹 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훤히 살필 정보망 역시 얻게 된다.
그걸 관리할 하오문과도 연이 닿아 있으니, 이는 곧 사천을 벗어나 온 무림에 눈을 둔다는 뜻이기도 했다.
“딱히 그럴 생각까지는 없습니다. 저희 가문은 예나 지금이나 사천 땅에서 사천인들을 지키며 살아가는 게 낙일 테니까. 다만, 눈과 귀 정도는 열어두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일리 있는 말이군.”
사천성주 앞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말이세.
뒷말을 첨언한 뒤 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연이어 물었다.
“한데, 계획은 그럴 듯한데. 그게 가능할까 싶긴 하네.”
“어째서 말입니까?”
“귀가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네만. 당가가 그 맹주 자리를 차지할 여력은 아직 온전히 회복하지 못 했지 않나.”
“아하.”
난 또 무슨 말이라고.
“그건 맞죠. 저희 집은 이제 세상엔 거의 다 잊힌 신세고, 독과 암기는 정파 무림맹에서 인정받기에는 철저히 비주류니까.”
그게 참 문제기는 해.
하지만,
“꼭 저희가 맹주가 될 필요는 없잖아요?”
“응? 그게 무슨 소리인가?”
“원래 맹주라는 게 대대로 허울만 좋은 감투에 불과하거든요.”
분명 불리우는 건 무림맹주지만, 그 옆에는 자그맣게 무림맹 얼굴 마당 겸, 욕받이 겸 등등이 부가되어 있는 직책이랄까?
“마침 딱 좋은 인재를 알고 있어서요.”
그러니까,
“임명장 하나만 써주실래요?”
* * *
청성파.
비록 말석이긴 하지만, 정파를 대표하는 구파일방의 일좌에 수백 년간 그 이름을 올려놨던 곳이다.
지금은 사천삼주의 일축으로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니, 오늘도 그곳을 찾는 이들은 많았다.
한데, 오늘은 조금 특별한 방문자가 있었다.
원래라면 접객청에서 가진 무구도 해체하고, 며칠을 쌓인 대기 순번을 일일이 기다려야 하건만, 그런 절차를 모두 건너뛴 채 무려 청성파의 장문인 청원진인을 마주한 것이다.
모두가 그 사실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뭐 어쩌겠어?’
“사천성주의 대리자, 당유혼이 청원진일을 뵙습니다.”
씨익―
인생은 원래 인맥이 반이라고?
“…청성의 청원이 성주님의 사자를 뵙소.”
아유, 표정 좀 피시지. 아주 안색이 썩다 못해 발효돼버리겠어?
“흐흐, 그쵸. 오늘은 ‘대’사천당가의 ‘유이’한 ‘직계’ 당유혼이 아니라 성주님의 사자로 왔거든요.”
여기 보이죠? 따끈따끈하게 찍은 직인이 아직 마르지 않아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난다구?
“…공자, 그렇게 머리 위까지 들어서 펄럭거리지 않아주셔도 되오.”
“아, 죄송. 혹시 안 보이실까 봐. ㅎ…….”
“……!!”
ㅎ……?
뭐지?
뭘 의미하는 것이지?
흐, 하고 웃는 것도 아니고 흐― 하고 웃다가 발음이 새어버린 게 더더욱 청원의 심사를 뒤틀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어떻게 할까.
상대는 지금 자신들 청성파 뿐 아니라, 사천삼주 전체를 도매금으로 엮어서 쥐잡듯이 두들겨 패고 있는 사천성주의 대리자.
적어도, 저 직인이 찍힌 임명장이 함께하는 한 외교 자리에서는 자신이 절대적인 을이었다.
“뭐 어쨌거나, 장문인도 눈과 귀가 있으니 사천성에서 도는 소문 정도는 들으셨겠죠?”
청성파는 분명 하오문과 같은 정보 집단은 아니다. 하지만 정보라는 것이 원체 중요하다 보니 어지간한 대문파는 각자의 정보망을 구성하기 마련.
여기서 함부로 문답을 했다가는 사천성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염탐을 했다는 말이 될 수 있기에 슬그머니 눈알을 굴리는 청원이었지만,
“그렇게 눈치 안 보셔도 돼요. 저도 바쁘고 우리 장문인도 저 꼴 보기 싫을 테니 빨리빨리 진행하죠.”
진심과 진실이 잔뜩 어린 조언에 청원은 결국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인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 정도는 들었소.”
“그래요? 그럼 제대로 얘기해 드릴게요.”
숨겨서 뭐 할까.
“우린, 그러니까 성주님과 저는 대대적인 산적 토벌령을 내릴 생각 중이에요.”
“산적? 녹림의 무리들을 말하는 것이오?”
“그렇게 되겠죠. 사천 일대뿐 아니라, 전 대륙적인 토벌을 목표로 하고 있으니… 말하자면 녹림과의 전쟁이 되겠네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청원이 처음 지은 표정은 당혹이었다.
“공자, 그게 가능하리라 생각하오?”
만약 수많은 이들의 앞에서 연설을 한다면 청원은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녹림의 씨를 말리리라 천명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자리는 일대일 대담. 실무적인 경향이 강한 자리인 만큼 솔직하게 불가능을 표현할 수밖에 없다.
“지금의 녹림은 예전처럼 사파의 쭉정이만 모아놓은 것이 아니오. 근 삼십 년간 지속된 세력 흡수와 내부의 패권 다툼으로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급격히 강성해진 것이 현실. 청성뿐 아니라, 아미와 점창을 동원한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오. 특히, 타 지역으로 벗어나는 경우라면 관군을 동원할 수도 없잖소?”
“그건 그렇죠.”
각 지역의 성주는 군사적 재량권이 주어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이 다스리는 성도 내에서의 일이다.
만약 성주가 자신의 군사를 데리고 타 지역으로 향한다?
‘그건 바로 역모지.’
녹림 산적놈들을 상대하다 황군을 맞상대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관군은 여기 동원될 일이 없어요. 성주님이 지원해 주실 것은 물자와 대규모 인원을 동원하는 것에 대한 허락일 뿐이에요.”
“…지금, 뭐라고 하셨소?”
그러니까, 피 흘리는 전투는 우리보고만 하라고?
청원의 표정이 딱딱히 굳어지자 당유혼은 씨익 웃으며 손을 저었다.
“뭔가 오해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사천삼주만 데리고 핏값을 동원하라는 건 아니에요.”
“하, 귀가에서 병력을 지원해 주기라도 하겠다는 뜻이오?”
“우리도 돕기는 하겠죠. 하지만, 그보다는 더 큰 판을 벌이고 싶다는 뜻이죠.”
“큰 판?”
정치력으로 여기까지 올라왔다는 청원이지만, 역시 여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하는가 보다.
하긴, 그러기에는 워낙 큰 판이어야 말이지.
“말했듯, 성주님은 대대적인 물자를 지원해 줄 거예요. 그리고 대규모 인원이 움직여도 눈감아주시겠죠. 예를 들어, 구대문파 서넛, 오대세가 둘셋 정도는 사천 땅에 더 들어와도 될 만큼.”
“…설마.”
그래, 이제는 눈치채셨겠지?
이 정도로 먹여줬는데도 못 삼키면 우리 쪽이 문제라고.
“성주님께서는 대규모 동원령을 내리실 겁니다. 무림인(武林人)이라는 불법 도검 소지자들이 대규모로 사천 땅에 모여도 허가해 주실 것이고, 그들이 집단을 이루어 뿌리를 내려도 허락해 주실 거예요. 오로지, 녹림을 토벌하기만 한다면.”
그리고 그렇게 생기는 집단은, 지금의 사천삼주처럼 국가의 제재를 받으며 다방면에서 쥐어 터지지도 않겠지.
“…대규모 무림인이 모여 집단을 이루고, 관에서조차 인정을 받으며 병력을 움직일 수 있다. 그 말은…….”
아니겠지.
스스로 정리한 바를 되짚으면서도 믿기지 않아 청원은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무림맹을… 재건하기라도 하겠다는 뜻이오?”
“아하, 무림맹이라… 그건 좀 이름이 구리네요.”
그 이름 쓰면 사천성에 있는 무서운 아저씨가 벌떡 일어나 뛰쳐 달려올지 모른다.
“그러니까 이름은 정천맹(正天盟) 정도가 좋겠군요.”
이름이야 사실 뭐든 상관없고,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
“어때요. 무림맹주, 아니, 정천맹주 자리… 관심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