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가유혼-158화 (158/350)

158화

“흐음…….”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것 같았다.

누군가 있던 빈자리는 이제 그 온기마저 식어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를 향하는 무거운 시선에 아까부터 곁에 서 있던 하윤호의 표정은 딱딱히 굳어 있었다.

‘어, 어떻게 하지……?’

당유혼.

저 미친놈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몰고 다니는 일이 워낙에 평범하지 않은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번 건은 상상을 초월했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겨도 유분수지, 이런 자리를 만드는 게 아니었는데!!’

난 병신인가?

생각해 보면 전조는 분명 있었다.

당가가 지금처럼 어느 정도의 성세를 되찾기도 전에, 아직 용독문에도 못 미쳐서 버둥거릴 때도 대거리를 한 전적도 있던 양반이 이제쯤 오면 어떤 짓까지 할 수 있을지는 분명 예상해야 했거늘.

튈까? 도망칠까? 다 버리고 새 땅에서 새로운 꿈을…….

“허허, 지부장.”

비상사태를 대비한 사천 탈출 계획을 열여덟 가지쯤 떠올리고 있을 때쯤 이군학의 목소리가 하윤호의 상념을 일깨웠다.

“예, 옙?”

“가지 말게.”

“가지 말라는 말씀은……?”

“지금, 사천을 벗어나 다른 곳에서 새롭게 웅지를 펼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은가?”

“헙……!”

“자네 정도의 인물이 흔치 않은 것도 흔치 않은 것이지만, 자네가 어디 혼자 도망칠 위인인가. 힘없는 하층민들 바리바리 싸들고 가버리면 이곳 사천 시내의 인물이 일 할쯤은 증발해 버리지 않겠나.”

하하하!

웃으면서 하는 말이 전혀 웃기지 않았다.

식은땀이 흐르는 하윤호는 그대로 땅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아이고! 벗어난다니!! 당치도 않습니다요!!”

“거, 그런 연기는 됐다네. 우리 본 지 십 년도 넘었는데 괜히 이제 와서 그러시는가.”

“여, 연기라니…….”

“됐네. 그보다는 좀 앉아보시게. 우리 얘기나 좀 하세.”

무슨 의도일까.

슬쩍 고개만 빼꼼 들어 눈치를 보던 하윤호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이제 주인이 없는 의자에 엉덩이 끝을 슬그머니 가져다 붙였다.

“큼… 저… 혹시, 심기를 거스리지는 않았는지…….”

“않을 것 같은가?”

“죄, 죄송합니다요!!”

자네 참 당연한 걸 묻는구만.

어처구니가 없다는 시선에 하윤호는 곧바로 탁자에 얼굴을 처박았다.

쿵!

덕분에 탁자가 거칠게 떨렸지만, 이군학 앞의 찻잔은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기가 막힌 허공섭물로 미리 잡아챈 덕분이었다.

“거 뻔한 연기는 그만하시게.”

이미 상대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군학은 여유로이 다시금 따라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한 찻잔을 홀짝이며 말했다.

“자네의 그런 모습, 조금 전 자리 비운 청년도 뻔히 거짓 가면임을 알고 있을 텐데 언제까지 그럴 텐가?”

“…….”

이번에는 아무런 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군학은 딱히 뭐라 하지 않았다.

사천성의 신하 관료들이 그 모습을 봤다면 무례하니 뭐니 소리치고, 위병과 관병들이 보았다면 창끝을 돌리며 당장에라도 꼬챙이라도 만들겠다고 난리를 쳤겠지만…….

‘그럴 것 같아서 떼어 놓았으니까.’

아니, 사실 이미 난리는 났을 것이다.

‘내 위치를 놓친 호위대장에게 온갖 책임 추궁을 물을 테고, 호위대장은 또 사라졌냐며 팔짝 뛰겠지? 허허허…….’

지금쯤 자신이 몰래 사라져버린 사천성 내에서 일어나고 있을 일에 웃음을 흘리는 그 모습은 못내 악동의 그것과도 같아 보였다.

하지만 그게 당장 중요한 것은 아니었으니, 이내 남은 상념을 털어내 버린 그가 다시금 하윤호를 마주 응시했다.

“재밌는 청년이더군. 자네가 직접 자리를 주선해 준 이유가 있었네.”

“아이고… 아닙니다요, 소인은 그저 성주님의 기휘(忌諱)를 거스르지는 않았으려나 못내 죄송할 뿐입니다요…….”

“흠, 그거야 뭐 당연한 일이기는 하네만. 어쩌겠나, 내가 필요한 건 그런 사람들인 것을.”

후룩―

다시금 찻물을 들이키자 목구멍 너머로 뜨뜻한 기운이 감돌았다.

원래도 따뜻한 찻물을 삼매진화(三昧眞火)의 술수로 내공을 이용해 더욱 뜨겁게 끓인 탓이었다.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뜨겁게 달아오른 심장이, 당장에라도 움직이라고 소리칠 것 같지 않나.’

쿵… 쿵!

이제 서른 중반을 향해 달려가는 나이지만, 무림으로 치면 그 나이는 한창때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황궁으로 친다면?

‘출사(出仕). 벼슬자리에 뜻을 펼칠 나이가 아닌가.’

빙긋―

상상만 해도 웃음이 맺혔다.

찻물 채워 막아보려 해도 자꾸만 웃음이 실실 새어 나오는 것을 막기가 힘들었다.

“장강수로상단이라…….”

떠나간 이가 말했던 이름을 읊조렸다.

“장강수로채라 했던가? 그 전신되는 수적 무리가 말일세.”

“그, 그렇습니다. 그들은 무림의 무뢰배 무리로…….”

“허허, 됐네. 자네도 본관이 보통 관인은 아니지 않음을 알고 있지 않나.”

보통의 관인은 무림 세력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지만, 사천성주는 무림과 관에 반반씩 걸친 인물.

무림사에 대해서도 훤했다.

아니, 그 이전에,

“장강수로채라면 그치들이라고 했지? 백경과 스스로를 흑룡왕이라 참칭하는 오만한 작자가 세력 다툼을 하는 곳이.”

당장 그들의 동향을 알려준 정보통이 하윤호 본인이었다.

“…예, 그렇습니다요.”

하윤호가 공손히 고개를 숙이자 사천성주는 톡톡 탁자를 두들기며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수적채를 집어삼키고, 그것을 상단으로 개조시켰다. 원래 감숙성에서 수백 년 동안 터줏대감 노릇을 해왔던 광형상단이란 이들의 인재를 보내 최소한의 뼈대를 만들고, 마찬가지로 원래 있던 수적채의 인력들로 살과 피부를 덧붙였다라…….’

이제 필요한 것은 물류 흐름이라는 혈액뿐이다.

그것을 추가한다면 그럴 듯한 무언가 하나가 뚝딱 만들어진다.

‘그 흐름을 사천성으로 들어오는 국상(國商)으로 채운다라. 수적채가 전신이라는 불안감을 사천성주의 보증으로 채워버린다면, 나는 장강 일대를 아우르는 강력한 상권을 거머쥐게 된다. 원래라면 그걸 꿀꺽 집어삼킨 것으로 수많은 견제를 받아야 하지만… 나의 그림자만을 빌려 쓴다면 직접적인 소유가 아니게 되니 나 역시 중앙 황실의 견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지.’

신용도를 빌려주고 상권을 쥐고, 저쪽은 막대한 물류 흐름의 일부를 바치고 가장 필요한 신용도를 단번에 채워 넣는다.

군침이 흐를 정도로 완벽한 거래.

물론, 감히 자신의 신용도를 수적채가 전신인 상단 따위에 소모될 수 있게 마음을 먹게 한 건 그의 감언이설 따위가 아니었다.

‘말만 그럴 듯하다면, 단번에 내쳤겠으나…….’

툭툭―

탁자 위에 가득 쌓인 두루마리에 시선을 향했다.

그것들 안에는 장강수로 상단의 현 체계와 각 지역에서 들어오는 물류 흐름, 향후 사천성주가 개입하였을 시 일어날 수 있는 영향력과 앞으로의 미래 방향성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감숙 전역의 뜻있는 청년이 모인 입의당이 열여덟 수채에서 정보를 끌어와 바치고, 천재 모사 육손이 자신의 모든 것을 갈아 넣어 바친 결과물이랄까?

그야말로 수십의 인재들을 맷돌 속 메주마냥 넣고 갈아 넣은 눈물진 두루마리가 아닐 수 없었다.

‘쯧쯧, 이 정도면… 본관의 휘하에 있는 관료놈들보다 더 유능하지 않나.’

그래도 나름 본인이 발로 뛰며 구한 인재 군단이라 생각했는데, 이 정도면 왠지 시샘이 날 정도다.

‘하긴, 사천성 내에서만 업무를 처리하는 수준이 아닌, 장강 전역에서 업무를 처리하려면 이 정도 결과물을 당연히 보여줘야 하려나?’

즐겁다.

사천이 비록 중원 전역에서도 손꼽는 대도(大都)라고는 하나, 결국 서쪽에 치우친 변방이라 부를 만했다.

한동안은 이곳에서 잠룡처럼 납작 엎드려 있으려 했건만, 이렇게 들쑤셔 대셔야 날개가 근질거려 참기가 힘들었다.

“예상보다 비상의 날짜가 더 빨라질지도 모르겠구만.”

“…옙?”

“모른 척하기는. 자네는 어찌 생각하나? 우리 계획이 얼마나 앞당겨질 것 같나?”

이군학은 눈앞의 사내를 응시했다.

십여 년도 더 전, 비 오는 어느 날 전신이 빗물로 축 젖은 날 밤에 홀로 자신을 찾아와 소리치던 그 모습을 떠올리며.

“어르신, 제게 힘을 주십시요!”

그때는 아직 자신조차 사천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뭐 좀 해보려 하니 사천삼주인지 뭔지 하는 놈들이 사사건건 훼방을 놓던 때였던가.’

“자네가 내게 말했었지 않나. 자네를 지원해 주면 못해도 이십 년 안에 사천에서 꺼드럭거리는 세 늙은 뱀들을 쳐내고, 그놈들을 고아 뱀탕으로 만들어 본관이 꿀떡 삼킬 수 있게 해주겠다고. 그리고 그 기운을 정양하여 저 중앙으로 나아가게 해주겠다고.”

십 년 전부터 이어졌던 대계(大計).

원래라면 앞으로도 십 년은 더 남았을 듯하지만,

“그 청년 덕에 벌써 기간이 반이나 앞당겨진 듯한데… 아닌가?”

“…그렇습지요.”

세간에는 용독문을 집어삼키고 성장한 사천당가가 사천삼주마저 밀어내고 있다 하지만, 사천성주는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제아무리 꺼드럭거려 봐야 십 년이 지나면 붉은 꽃처럼 시들고 말라 비틀어버렸을 테지.’

하지만 그건 이제 없던 일이 되어버린 것.

딱히 자신은 그에 기분 나쁠 일이 없지만, 이 정보를 다루고 흉계를 꾸며 단 십 년만에 자신의 권좌를 사천 제일로 만들어준 모사꾼은 어떤 흉즁(胸中)을 가지고 있을 지 몹시 궁금했다.

“…….”

“흐음, 답하지 않을 생각인가 보구먼.”

하나 도통 입이 열릴 기색이 없는 걸 보면 답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그걸로 됐네.”

인재란 적재적소에 부려야 하는 법.

굳이 아랫사람들을 못살게 굴어 봐야 효율이 안 나올 뿐이다.

“나는 그저 바랄 뿐이네.”

이제는 비어버린 찻잔으로는 자신의 입가를 가릴 수 없음에, 천천히 무수한 상처로 가득한 손을 들어 얼굴을 틀어쥔 이군학이 그간 삼켜온 상처받은 짐승의 웃음을 활짝 피워내며 말했다.

“내 비원을 이룰 날이 한시바삐 찾아오기를.”

* * *

“아휴, 힘들다, 힘들어.”

사천성주와의 독대를 끝마쳤다.

틈만 나면 자신의 속내를 알아 맞추려는 눈빛이 상당하기 음흉하기 그지없는 놈이었다.

‘하여튼 이래서 정치하는 놈들이랑 얽히면 피곤해.’

아니꼬우면 칼 뽑아 휘두르려는 낭만 있는 무림과는 달리, 아니꼬우면 온갖 음모와 중상모략으로 사람 보내버리려는 게 정치인놈들이다.

‘그런 놈들과 같이 놀면 뭐가 묻기 마련이지.’

에비! 지지에요!

괜히 전염병이 옮을까 화들짝 놀란 삑삑이 마냥 종종걸음으로 발길을 옮긴 당유혼은 곧장 목적지에 도착해 발길질을 갈겼다.

“이리 오너라!”

콰앙―

문이 열려 젖혀지며,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가 차게 식은 시선을 던져왔다.

“여기 네놈 집이다.”

진혁수였다.

“그런 사소한 건 넣어둬.”

“쯧쯧, 미친놈.”

미칠 것이면 곱게 미쳐야지.

땀에 흠뻑 젖은 채 당유혼이 일러준 수련을 행하고 있던 진혁수는 숨을 깊게 내뱉으며 몸 상태를 원상 복구시켰다.

가쁜 호흡에 헉헉거리며 배어 나오는 숨을 보자면, 자신이 보든 말든 죽어라 스스로를 혹사시켰을 게 뻔했다.

‘거참… 진짜 가르치는 맛은 제일인 놈일세.’

원래 가르치는 것도 맛이 있어야 한다고, 그런 것으로만 따지면 천상의 진미와 같은 놈이다.

“이상한 눈으로 꼬나보지 말고 할 말 있으면 해라.”

‘…쥐어패는 손맛도 각별하겠다.’

저 반항스러운 눈빛은 삼십 년 전에도 흔치 않았는데 말이지.

에잉, 쯧―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은 당유혼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진도를 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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