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상단전.
그 말을 듣고 당유혼은 나지막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젠 뭐, 상단전인가.’
중단전에 이어 이제는 상단전까지.
이쯤 되면 이미 무림의 영역은 아득히 벗어났다.
‘하긴, 안 나오는 게 이상하긴 했지.’
하단전이 무공이고 중단전이 강신이면 상단전은 술법이다.
술사들의 영역이 상단전의 공능이고, 삼십 년 마교에 함께 맞서 싸웠던 풍선(風仙) 홍길동은 당시 술법계에 있어서 정점에 있던 자였다.
그 후손인 홍수월이 술법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이상한 수준이었다.
“들어는 봤죠.”
“다행입니다. 은인의 모습을 보건대, 단순히 들어는 봤다… 수준은 아닌 듯하니 대화가 더 쉬울 듯하군요.”
당유혼의 모습에서 그가 평범한 무림인 이상으로 상단전에 대한 지식이 있음을 직감한 홍수월은 아예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도움을 받기로 했다.
“부족하지만, 저 역시 술법사입니다. 한때는 꽤 경지에 이르렀다고 자부하는 술법사였지요.”
“어… 그래요?”
술법사는 아니라지만, 한때 천하제일의 술법사와 함께했던 몸이며 또한 그들과 질리도록 싸우기도 했었던 경험이 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하자면,
“일반인과 다름없어 보이시지요?”
와, 이걸 먼저 선수 치네.
“흠흠.”
괜히 예민해 보일까 건드리지 못하는 부분을 먼저 시원하게 긁어준 홍수월은 옅은 웃음을 지었다.
“이해합니다. 제 술법 세계는 현재 완전히 폐쇄된 상태와 같습니다. 삼십 년 전 저의 아버지이시자 선대 국왕께서 마교와의 전쟁으로 전사하시고, 당시 이끌고 갔던 전력 대부분이 불귀의 객이 되며 율도국의 국력은 급속도로 쇠락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조선이 미처 그 사실을 알지 못했으나, 시간이 지나 율도국의 상태를 알게 되었고, 삼 년 전 십만의 군세를 일으켜 율도국을 침공하였으니… 저는 그들과 맞서 싸우고 유민들을 탈출시키는 과정 중 심각한 부상을 이게 되어 가졌던 모든 능력을 상실하였습니다.”
‘…그렇게 되었던 건가.’
율도국 자체가 홍길동이 당시 조선의 노비들과 얼자, 서자들을 이끌고 데려 나와 세운 국가였다.
당시 조선왕이 그를 가만 놔둘 리 없었지만, 홍길동 일신의 능력이 그 모든 고난을 물리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다가 홍길동이 죽으니 곧장 몰아쳤군.’
세상사 요지경이라.
어딜 가나 다 비슷비슷한 이야기였다.
“하면, 우리에게 요구하는 건 조선국에 대한 복수를 도와달라는 거예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건 좀 힘들 것 같은데…….”
단순히 조선이 부국강병하여 그런 건 아니었다.
만약 전성기의 사천당가였다면 그게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그만큼 당시의 자신은 초월적인 경지에 이르러 있었고, 독과 암기라는 것 자체가 다수의 약자들을 상대하는 데 특화되어 있기도 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보다 더 본질적인 것이니,
‘암만 전우의 원수라지만, 은원의 연쇄를 국가 단위까지 확산하고 싶지는 않다. 당장, 홍길동 그 녀석이 그걸 가장 경계했으니까.’
서자 출신도 아니고 얼자 출신의 홍길동이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등 사회의 갖은 핍박은 전부 받고 자라온 그는 경천(驚天)의 재능으로 스스로 배우고 깨우쳐 천하제일술사의 자리에 이르렀으니, 스스로 일국을 상대할 만한 능력을 지녔음에도 사사로운 복수를 하기보다는 자신과 같은 이들은 품에 안고 떠나기를 희망했다.
‘그때 녀석의 마음가짐을 내가 감히 이해할 수 없겠지만… 자식이 복수한다 해서 그 녀석의 의지를 짓밟을 수는 없다.’
그것은 그만큼이나 숭고한 의지였기 때문이다.
“이런, 오해하신 듯합니다.”
당유혼이 그런 생각에 이르고 있자니 홍수월 역시 표정에서 무언가를 읽었는지 고개를 저었다.
“저는 복수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증오가 아주 없다면 거짓말이겠지요. 하나, 세상의 이치는 원래 그와 같습니다.”
흥이 있으면 망함이 있고, 성함이 있으면 쇠함이 있다(興亡盛衰).
열흘 붉은 꽃은 없고(花無十日紅), 어떠한 권세도 십 년을 가기가 버겁다(權不十年).
그것이 자연의 이치며 이를 곧 도(道)라고 하니, 아비에게 그것을 배운 홍수월은 두 눈에 복수심의 불꽃을 불태우기보다는 자신에게 맡겨진 과업을 다하길 소망했다.
“지난 조선의 침략에서 살아남은 것은 온전히 제 재주가 뛰어나서가 아니었습니다. 저를 구하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졌기 때문이며, 그 역시 저 하나의 목숨을 구하기 위함이 아닌 저를 따르는 이들의 운명이 거기서 끊기지 않기를 바람이었겠지요.”
홍수월은 참 많은 것에 초탈한 듯 보였다.
“저의 선친께서 일신에 지닌 능력이 일국에 버금갔음에도 굳이 분노의 싹을 심은 것이 아닌, 희망과 꿈의 씨앗을 새 땅에 심으신 것은 저 역시 그 의지를 뒤따라야 함이라 믿습니다.”
“…그렇군. 당신은 복수보다는 당신을 따라온 유민들이 정착할 수 있는 새 땅을 원하시는군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저 개인으로서는 그들을 지킬 힘을 되찾길 원합니다.”
기나긴 얘기를 한 것은 자신의 뜻을 당유혼에게 보인 것이리라.
어쩌면 그 자신이 복수심에 불타 위험 요소를 내포하고 있음을 경계할까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 모든 것을 말하고 그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그야말로 정도(正道).
‘그 녀석에게 어떻게 이런 녀석이 나온 거지? 아니, 그 녀석이라서 이런 녀석이 나온 건가?’
스스로 도를 깨달았다며 도사란 무엇인가를 줄창 외치는 주제에 경박스럽기 그지없고, 그러면서도 항상 대도(大道)를 품 안에 품고 살아가기에 온갖 설움과 증오를 보듬을 줄 알았던 옛 전우의 자식.
그런 홍수월을 담담히 바라보던 당유혼은 결국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쉽지 않네. 제가 도와주면 그… 술법 세계를 회복할 방법은 있는 거예요?”
“도와주시는 겁니까?”
“해보는 데까지는 해보는 거죠. 그렇다고 뭐… 너무 기대하지는 마세요.”
암만 봐도, 가벼운 상처는 아닌지라 당유혼 역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에, 오히려 홍수월이 빙긋 웃었다.
“말씀만으로 감사합니다. 은인께서 최선을 다해 주실 의지가 느껴집니다.”
아니, 이 사람아. 그렇게까지 말하면 내가 뭐가 돼?!
“필요한 것은 법구(法具)입니다.”
“법구요?”
“그렇습니다. 향로(香爐)이든, 사인검(四寅劍)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대개 도문에서 사용하는 법구들이 있다면 제 술법 세계를 되찾는 데 큰 도움이 될 듯합니다.”
법구……?
“음… 그래요?”
쉽지 않은 물건이다.
옛날에야 많이 봤지만, 요즘 세상에 그딴 게 있나 싶었다.
‘내가 아는 건 마교와의 대전에서 다 박살 났는데…….’
대개 그런 법구들이 항마(抗魔)의 힘을 지녔기에 마교에서는 기를 쓰고 파괴하려 들었고, 정파 측에선 그걸로 기를 쓰고 마교의 뚝배기를 깨려 들었기에 유명한 건 싹 다 사라진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도 뭐,
“한번 노력해 볼게요.”
별수 있나.
이 정도까지 왔으면 한번 힘써봐야지.
* * *
법구, 달리 보패라 불리는 물건.
이것들을 구하는 것은 당유혼으로서도 막막했다.
기억 속을 뒤져보려 했지만 마땅치 않았고, 계속 생각하다가 문득 한 가지 결론으로 귀결되었다.
‘이걸 내가 왜 고민해야 하지?’
답이 안 나오는 고민이라면, 굳이 내가 해야 할 필요가 없잖아?
혁신적인 생각을 떠올린 당유혼은 곧장 발걸음을 옮겼고,
“…해서, 저를 찾아오신 것입니까요?”
차게 식은 시선을 던지는 하윤호가 혼신의 힘을 다해 표정을 관리했다.
반면, 아주 편안해진 당유혼은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 아니겠어?”
“허헛…….”
저놈이 진짜 한때 복검이 되겠다고 이 악물고 찾아온 인간이 맞는 건지.
이제는 숫제 도구와 주인이 뒤바뀐 신세가 되어버린 하윤호는 안간힘을 다해 웃으며 말했다.
“얼마 전에 큰일을 주시고 또 과업을 주십니다요.”
“엥? 그래? 그럼 내가 큰일 하나 덜어줄까?”
“아이고, 소협!! 당연히 이런 막중한 임무를 주시니 큰 신임을 받는 것 같아 기뻐서 그렇습니다요!!”
그 큰일이란 게 당연 마교에 대한 추적일 리는 없으니 장강으로부터 나온 장물 거래가 분명했다.
극한의 줬다 뺐기를 보이는 모습에 하윤호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겉으로는 잇몸 웃음을 만개했다.
“그치? 내가 오해할 뻔했네. 하하하핫!”
“헤헤헤헷!”
필사적인 웃음이 오가고, 하윤호는 식은땀을 닦으며 물었다.
“한데 소협. 원하시는 법구가 대체 무엇입니까요?”
“엉? 딱히 그건 없는데?”
“특정하는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까요?”
당장 당유혼이 모든 사정을 말한 것이 아니었기에 하윤호는 되려 의아하다는 듯이 물어왔다.
“그럼 굳이 저를 찾아오실 필요가 없는 것 아닙니까요?”
“응?”
가까운 곳에 있는 걸 놔두고 왜 돌아가려 하냐고.
그 완곡한 표현에 당유혼은 나도 모르는 법구가 집에 있었나 싶어 물었다.
“그럼?”
“아니 뭐, 이곳 사천 땅에만 이미 세 군데가 있잖습니까.”
“세 군데? …아.”
생각해 보니 그랬다.
보패와 법구란 결국 도가(道家)와 불가(佛家)에서 나오는 것.
그리고 사천에는 그 대표적인 세 문파가 있었으니,
“사천삼주…….”
일명 아.점.청 동맹이 바로 그러했다.
‘까먹고 있었다…….’
원래 그들은 무림의 문파로 시작한 게 아니라, 도맥과 불맥을 잇던 곳이 문파가 된 경우였다.
지금도 많은 향객들이 그들의 문파로 찾아와 참배를 드리는 게 유명했는데, 그걸 뻔히 알면서도 당유혼이 깜빡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놈들이 워낙에 세속적이어야지…….’
이미 속세에 물들다 못해 범벅이 된 놈들이라 도저히 도문이며 불문이니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 걔들한테 도움을 청하라고?”
“싫으십니까요?”
“싫냐고 묻는다면…….”
진짜 죽도록 싫다.
아니, 어떻게 고개 숙일 놈들이 없어서 그런 놈들한테 아쉬운 소리를 할까?
하지만 또,
‘도와주겠다고 큰 소리는 뻥뻥 치고 나왔잖아…….’
물론, 약한 모습이란 약한 모습은 다 보였지만, 그게 인간 당유혼으로서는 할 수 있는 최선의 허세였기도 했다.
여기까지 오면 또 물러나기 싫다고나 할까?
“끄으으응…….”
온갖 싫은 기색을 다 드러내며 몸부림치던 당유혼이 불편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그 양반들은 해줄까? 걔들도 우리 싫어하잖아.”
“흠… 그게 정 싫으시다면 신분 세탁 정도는 제가 해줄 수 있습니다요. 한데 사실, 꼭 제가 그러지 않더라도 그들은 분명 해줄 것입니다요.”
“왜?”
“그들의 현재 재정 상황이 파멸적이기 때문입니다요.”
“아.”
결국 세상사 요지경이라.
대부분의 경제 활동이 사천성주에게 탄압당하고, 원래 가지고 있던 돈줄은 당가에게 밀리고 있는 형세다.
수입원이 반 토막 난 수준을 넘어선 상태인 게 그들이고, 그렇다면 수입이 줄었으니 지출도 줄이면 되지만 인간이란 게 이미 한 번 씀씀이가 커져 버리면 과거로 돌아가기도 쉽지 않다.
“…돈만 주면 해준다는 거지?”
“자존심 하나는 만리장성보다 더한 것이 그들이지만, 저희가 먼저 부탁한다는 모양새에다 그들의 주특기인 축문 등을 핑계로 대면 애써 자신들이 해준다…라는 느낌으로 수락할 것입니다요.”
진짜 해줄까?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해주겠구나.”
스스로 생각해도 답은 곧장 나왔다.
위선, 가식, 모순으로 똘똘 뭉치 덩어리들.
그게 지난 몇십 년간 당유혼이 질리도록 겪은 정파라는 족속들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