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평화롭다. 세상 평화롭다. 이렇게 평화로우면 안 되는데… 평화롭기 그지없다.
“삑삑아.”
“삑?”
“후… 넌 혹시 아냐?”
“삑?”
이제는 익숙해진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 한 명의 사람과 한 마리의 새가 그 끝에 걸터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기 어디가 되게 말랑말랑해. 되게 뭉클뭉클하기도 하고 벼락에 맞은 듯 찌릿찌릿하면서도 쿵쿵 뛰고, 또 허하다?”
“삑삑?”
그게 무슨 개소리야?
아기 새에게선 대충 그런 반응이 흘러나왔지만, 이번엔 못 알아먹은 척 당불퇴는 멍하니 저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 눈물의 생이별을 경험한 형제들이 아닌 다른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적 소저…….”
적세희. 짧은 만남이었으나, 강렬한 기억을 새겨준 그녀.
솔직히, 아무 데나 던져놔도 잘 살 것 같은 형제 놈들보다는 마음 따뜻하고 강인하면서도 여린 그녀가 불안하고, 더 걱정이 되었다.
“삑삑아.”
“삑?”
“나… 사랑에 빠졌나 봐.”
“삑.”
“너 이 새끼, 그 표정 뭐냐?”
당불퇴는 보았다. 이 작은 아기 새가, 새의 구강구조로 가능한가 싶을 정도로 부리를 뒤틀고 있는 것을.
“모, 못 믿냐… 너?!”
“삑삑.”
“아니!! 네 녀석이 그 소저를 못 봐서 그래! 얼마나 아름다운데!”
“삑?”
“그런 소저가 왜 날 좋아하겠냐고? 야… 이 씨… 나 정도면 뭐가 빠져? 몸 좋지, 무공 좀 잘하지, 가문 번듯…하지는 아직 않은데, 그래도 이제 좀 번듯해질 것 같지.”
“삑―”
가소롭다는 듯 낮은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오!! 이 새대가리가 진ㅉ… 악!! 뭐!! 맞잖아?!”
니가 새대가리지 그럼 인간 대가리냐?!
“삑삑삑!”
“뭐? 니 엄마 욕하지 말라고? 야, 이 미친놈아! 내가 언제 너네 엄마를 욕했어! 널 욕한 거지!!”
“삐빅!!”
“뭐가 그게 더 나쁜데?!!”
삑삑이. 그렇게 이름 붙여준 아기 새와 당불퇴는 그렇게 한참을 투덕거리다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하…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다냐…….”
마음이 공허하다.
온 주변이 구름마저 내려다볼 정도로 아득한 창공이라 그런가? 당불퇴는 마음이 텅 비는 듯한 기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렇게는 못 있겠다. 수련이라도 해야겠어.”
무인이 할 게 뭐가 있을까?
당불퇴는 곧장 차양십이수를 연마하기 시작했고, 차양십이수뿐 아니라 차라리 이번 기회에 새로 익힌 무공들도 차례로 시연해 보았다.
“삑?”
처음에는 뭘 열심히 하나 싶어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아기 새 삑삑이는 차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기도 일어나더니 그 모습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삐익… 삑……!”
하지만, 인간의 육체와는 그 구조부터가 다르기에, 각종 동작에서 버거움을 느끼고 얼마 안 가 우스꽝스럽게 넘어지고 말았다.
“삑…….”
아직 덜 여문 몸뚱어리에는 너무나 아픈 고통.
그러나, 몸집이 작을 뿐, 배포가 작은 것은 아닌 아기 새 삑삑이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그 동작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삑… 삑삑!”
몇 번이나 우스꽝스럽게 넘어졌지만, 다시금 그 동작을 따라 하기 시작하는 삑삑이.
당불퇴가 그 모습을 발견한 것은 대형이 알려준 무공 다섯 종류를 더 시현하고 난 뒤였다.
“응? 너 뭐하냐?”
파들파들 떨리는 모양새로 이리저리 두 날개와 두 다리를 퍼덕퍼덕거리고 있는 삑삑이.
그사이, 지 혼자 악전고투를 치렀는지 온몸 여기저기에 흙먼지를 묻히고 있는 게 아주 가관이었다.
“…삐익…….”
툭―
얼마 안 가 지쳤다는 듯 바닥에 쓰러지는 녀석을 보며 당불퇴는 헛웃음을 흘렸다.
“뭐야, 네 녀석도 무공을 익혀보겠다고?”
“삑―”
몰라, 그게 뭐여.
대충 그런 듯한 울음소리를 바닥에 엎드린 채 부리만 비쭉거리는 삑삑이를 보며 당불퇴는 조금은 감탄했다.
‘내공 하나 못 가진 녀석이. 내가 여섯 종류의 무공을 내리 펼치는 동안 따라 했다고?’
중간부터 따라 한 것일 수도 있지만, 저 흔적을 보니 꽤 열심히 한 것은 분명해 보였다.
당불퇴는 그 의지력에 감탄했다.
“너 이거 힘들걸. 이건 무공이란 거야. 바탕이자 배경이 되고, 바닥이자 기초가 되는 내공이 수반되지 않으면 동작을 펼치기가 힘들어.”
기본적인 신체 구조의 차이를 떼놓고도, 내공의 유무는 꽤 큰 차이를 발휘할 수밖에 없다.
“삐빅…….”
“그거 어떻게 하는 거냐고? 흠… 네가 혈도의 개념을 알면 알려주기라도 할 텐데…….”
머리를 벅벅 긁던 당불퇴.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잠깐만, 이 녀석에게도 무공을 알려줄 수 있지 않을까?’
혈도의 명칭을 익히고, 인체의 구조를 달달 외우는 것도 결국은 신체 내부라는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내공의 흐름을 알기 위해서였다.
내공이 올바른 길로, 올바르게 흐르게 하기 위해 배우는 그 모든 과정은 결국 인간의 편의를 위해 개발된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직접 내공 흐름을 지도해 주면 괜찮지 않을까?’
무림에서는 그런 과정을 진기도인(眞氣導引)이라 하여 절정 상급의 고수가 되어야 시도할 만한 고난이도의 행위라 지칭했다.
그러나 당불퇴는 귀원일기공이라는 신묘한 무공과 지난번 경험을 토대로 그게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도, 어미 새를 고쳤던 것도 같은 방식이었잖아?’
그때는 독 기운을 끌어당긴 것이지만, 어차피 대형 당유혼의 가르침에 따르자면 세상 만물은 기(氣)로 되어있고 독 기운 역시 그 일부라 그게 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이 작은 어린 새에게도 그게 통용되지 않을까?
“이리 와봐.”
거기까지 생각이 도달한 당불퇴는 곧장 행동하기로 했다.
손을 까딱이자 아기 새는 그 뜻을 이해했는지 얌전히 당불퇴를 따랐다.
“자, 이상한 느낌이 들어도 저항하지 못하고 그에 따라 순응해. 나도 조류가 어떤 신체 구조를 지닌 지는 모르겠지만… 순리(順理)의 흐름을 따른다면 그것이 곧 정도(正道)일 테니까.”
이제는 자기도 모르게 퍽 그럴듯한 말을 하게 될 줄 알게 된 당불퇴는 삑삑이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린 채 정신을 집중했다.
아기 새 삑삑이도 그 진지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별다른 소리를 내지 않고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정신을 집중했다.
이후, 당불퇴는 자신이 세상과 삑삑이를 잇는 징검다리라는 생각으로 귀원일기공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돌고 돌아(歸) 근원(原)을 향한다. 어렵게 생각할 것은 없어.’
귀원일기공을 운용하자 상단전의 입구인 천령개를 통해 자연지기가 술술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람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이 신묘한 높은 봉우리는 특히나 자연지기가 풍부했고, 그것을 자신의 몸뚱어리를 통해 끌어들인 당불퇴는 흡수하지 않고 그대로 삑삑이의 천령개를 향해 인도해 주었다.
“삑…….”
뜨겁고도 시원한 기운이 머리를 통해 들어오자 삑삑이의 입에서 작은 울음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당불퇴는 모르겠지만, 원래 벽력조는 영물(靈物)이라 불릴 정도로 오래 살며, 자연지기를 흡수해 더욱 강대한 존재로 거듭날 운명을 지닌 종족이었다.
그만큼 타고난 육신은 강건하고 생명력이 끈질겨 천년혈주의 독에도 버틸 만큼 강인함을 지녔는데, 그 선천적 그릇에 당불퇴가 후천적인 기술을 알려주며 그 진화의 단계를 빠르게 당긴 것이다.
‘흠, 이 녀석. 인간으로 따지면 엄청난 무골(武骨)을 지닌 것 같은데?’
물론, 그딴 것 알 리가 없는 당불퇴는 그냥 삑삑이의 기에 대한 감응력이 굉장히 뛰어나다 여기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 내공을 느끼기 위해서 반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여기고, 영재는 한 달의 시간, 천재는 하루 만에 그걸 깨닫는다 할 때 삑삑이는 그 천재의 영역에 속해 있는 듯했다.
‘이 더러운 재능충 녀석. 부럽다, 진짜.’
처음에는 자신이 방법을 알려줘야겠다 싶었는데, 자연지기를 한 번 도인해 주자마자 삑삑이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체내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물론, 서투르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한 순간도 제법 있기는 했다.
‘어이쿠, 이 녀석아.’
갑자기 강대한 힘을 얻게 되자, 처음 불을 보게 된 아이처럼 신기하다며 막 다루다 위험한 짓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랬다가는 주화입마라고?’
그때는 적당히 당불퇴가 간섭해 녀석의 손에 들린 자연지기를 뺏어 들었다.
삑삑이는 그때마다 장난감을 뺏긴 아이처럼 불퉁한 울음소리를 냈지만, 귀원일기공의 놀라운 공능이 그 자연지기가 가야 할 올바른 길로 인도하자 자기도 제 잘못을 아는지 얌전히 당불퇴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삐익… 삑…….”
가냘픈 것 같으면서도 그리 자연스레 이어지는 흐름은 한참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것이 끝이 났을 때는 저 하늘이 제법 어둑어둑해진 뒤였고, 눈을 떴을 때 삑삑이는 전신에서 윤기가 돌고 있었다.
“후우… 어떻냐?”
“삑삑…….”
용맹한 울음소리가 아닌, 신세계를 경험하고 얼떨떨한 듯한 울음소리를 흘리는 삑삑이의 모습에 당불퇴는 피식 웃었다.
“신기하지? 이게 무공의 세계라는 거다. 네가 익힐 만한 것을 몇 개 연구해 볼 텐데… 어때, 한 번 익혀볼 테냐?”
“삑삑!”
“두말하면 잔소리라고? 그래, 좋아. 한번 해보자고.”
자신감 있게 고개를 끄덕이는 둘.
이제 시간도 늦었겠다, 당불퇴는 자리에서 일어나 삑삑이와 함께 동굴로 돌아왔다.
미리 채집해 둔 것들이 있었기에 모닥불을 피운 뒤 그것들을 구웠다.
동굴은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있었기에 환기는 걱정하지 않아도 됐고, 이 고원에 자라나는 나무뿌리와 버섯, 열매 등을 나무 꼬챙이에 끼워 타닥타닥 익히자 군침 도는 냄새가 흘렀다.
“삑삑!”
당불퇴가 그러는 동안 삑삑이는 어미에게 호다닥 달려가 폭― 하고 안겼다.
그러고는 재잘대기 시작하는데, 마치 오늘 뭐 하고 놀았는지 미주알고주알 일러주는 어린아이와 같았다.
“키륵…….”
어미 새는 그런 자신의 아이가 사랑스러운지 날개를 들어 쓰다듬어 주기 시작했고, 삑삑이는 그 속에서 오늘 익힌 내공 운용법을 보이며 자신만의 진기를 마음껏 발산했다.
“키륵?”
그에 어미 새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자, 이제 막 버섯구이 하나를 입에 가져가던 당불퇴가 말했다.
“아, 그거 내가 알려준 거야. 삑삑이가 꽤 재능이 있더라고?”
재능만 따진다면 당주 형님보다 높은 듯했다. 감히 짐작하기로… 가주님 정도 된다고나 할까?
그러자 아이 칭찬에 장사 없다는 부모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듯 어미 새가 편안한 울음소리를 냈다.
“그거 좋은 거야. 평범한 사람도 내공 심법만 제대로 익히면 무병장수한다고 하거든. 잔병치레도 안 하게 될 테고, 너도 익히면… 잠깐.”
혼자 주절주절 떠들던 당불퇴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삑삑이도 익혔는데, 이 녀석도 익힐 수 있지 않을까?’
어미 새가 내공 심법을 익힌다면 그 생명력은 더욱 강건해질 것이고, 빠른 시일 내에 다시 건강을 되찾아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탈출 속도는 더욱 빨라질 터…….
“잠깐만, 내가 좋은 거 알려줄게.”
먹던 걸 자리에 내려놓으며 당불퇴는 어미 새에게 다가갔다. 한 번 방식을 익힌 당불퇴였기에 굳이 천령개에 손을 뻗을 필요도 없이 아무 곳에나 손을 올리려 했는데,
스윽―
“키륵.”
“응?”
어미 새는 갑자기 날갯죽지를 내뻗어 그 손을 부드럽게 막아냈다.
“왜 그래? 이거 좋은 거…….”
거절의 표시에 이해할 수 없어 설득하려 들 때, 당불퇴는 느낄 수 있었다.
우우웅…….
맞닿은 부위로부터, 장중한 기운이 흘러나와 자신에게로 스며드는 것을.
“이건…….”
그렇구나.
이 어미 새는 이미 하나의 그릇을 완성한 채였다.
귀원일기공은 근원으로 되돌아오는 하나의 그릇(一器)을 연마하는 것. 이미 저 자신의 그릇을 완성한 이에게 알려주었다가는 오히려 독이 될 가능성이 컸다.
‘그렇군. 어차피 삑삑이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그릇을 완성하게 되었겠구나.’
이제야 어미 새가 지닌 강인한 생명력의 비밀이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당불퇴는 다시금 내려놓은 버섯 꼬치를 입에 물었다. 비록 목적한 바는 이루지 못했지만, 안심할 수 있었다.
‘이미 그릇을 완성한 후라면 결국 이 녀석은 자리를 떨치고 일어날 거야.’
그렇다면 괜히 재촉할 필요가 없다.
당불퇴는 조금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편, 당불퇴가 그리 편안한 마음을 느끼고 있을 때, 다른 방계들의 마음은 더더욱 무겁고 불편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