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 * *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지만, 그 난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진압되었다.
“어어, 손 내려간다?”
“후후, 팔이 아프십니까? 그렇다면 내리시면 됩니다.”
“내, 내리면 어떻게 됩니까?”
“후후후, 글쎄요. 어떻게 될까요?”
율기야… 니가 더 나빠……. 저게 한때 명문 정파라 불리던 당가의 후손들인지, 아니면 뒷골목 파락호들인지…….
시비가 붙은 이들을 전부 무릎 꿇린 뒤 양손을 번쩍 들게 한 당불퇴와 당율기는 돌아가며 그들을 걷어차고 있었다.
“야, 이 자식들아!”
그때 울려 퍼진 당유혼의 외침!
‘혀, 형님… 그래도 역시 이건 아니죠? 그래도 타 문파 사람들인데!!’
희망에 찬 당지명이 그의 대형을 돌아봤고,
“요샌 교육시킬 때 그렇게 편하게 앉혀 두냐? 대가리부터 박고 시작해야지!!”
“아앗!!!”
“그, 그렇군요! 그 사실을 깜빡했습니다!!”
그 희망은 단번에 짓밟혔다.
‘이 새끼들은 틀렸어… 이미 답이 없다고…….’
괜히 시비 걸다가 황무지 한복판에서 대가리를 박게 된, 아직도 정체불명의 무리를 보며 당지명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때,
“이익!! 이 무례한 놈들아!!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느냐!!”
자신의 부하들이 얻어맞는 것에 반쯤 넋이 나가 있던 조진양이 뒤늦게서야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무례한 놈?”
“…무, 무례한 분이요…….”
아니, 아직은 덜 차린 것 같기도 하고…….
발을 질질 끌며 조진양에게 다가간 당유혼이 그 앞에 불량배처럼 쭈그려 앉아 눈을 마주쳤다.
무릎 꿇고 앉아있던 조진양은 흠칫 몸을 떨었지만, 필사적으로 용기를 짜내 말했다.
“저… 대협, 우리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좋게 대화로 푸는 게 어떻겠습니까?”
“대협? 니랑 내가 언제 봤다고 대협이야?”
“허허, 자고로 무림에는 사해가 동도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요샌 동도끼리 칼부림을 하냐?”
“…사내는 다 그렇게 친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친한 척은… 확!
주먹을 치켜들자 조진양의 볼살이 부르르 떨렸다.
그가 언제 이런 취급을 받아봤을까 싶었다.
“대, 대협… 정말 저희 그냥 보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저희가 이래 봬도 국상(國商)입니다, 국상!”
“국상(國商)? 니들이?”
국상이란 자고로 나라에서 공인하는 물품을 취급하거나, 관에 물건을 대주는 공인된 상인을 일컫는 말이었다.
하지만,
“하는 짓거리는 양아치 새끼들이 따로 없는데?”
“…….”
그게 니가 할 말이신가요?
그 말이 목구멍까지 솟구친 조진양이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꾹 삼킨 뒤 애써 미소 지었다.
“하하, 정말입니다. 저희는 진짜로…….”
그리고 다시금 말을 이어가려는데,
“어어? 대형. 이거 와보셔야겠는데요?”
언제 저쪽으로 갔는지…….
검수들을 갈구다가 휘적휘적 그들이 끌고 온 마차 비슷한 것엔 뭐가 있나 싶어 안을 들여다본 당불퇴가 깜짝 놀라 당유혼을 불렀다.
“왜? 뭔데?”
당불퇴의 말에 뭔가 싶어 걸어간 당유혼은 마차의 안쪽을 보고 우뚝 멈춰 섰다.
‘…이건.’
마차인 줄 알았던 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포대로 덮어진 수레였고, 그 수레는 나무로 된 창살이 나 있는 이동형 감옥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이 개새끼들. 사람을 사고파는 놈들이었잖아?!”
며칠을 굶은 것인지, 볼이 홀쭉한 사람들이 십수 명도 넘게 갇혀 있었다.
“이런 젠장할!! 여기도?”
다른 마차까지 전부 살펴본 당불퇴는 그 수가 수십 명에 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분노에 몸을 떨었다.
“…그래도 몇 대 쥐어패는 걸로 끝내려 했는데…….”
당불퇴의 목소리에 살기(殺氣)가 섞였다.
그의 체내에 도는 극독이 언제라도 세상 밖으로 나올 준비를 마치며 흉흉하게 존재감을 드러냈고, 소매 밖으로 삐쭉 튀어나온 비수는 언제든 핏물을 머금을 준비를 하며 예리하게 빛을 발했다.
그쯤 되자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된 것을 직감한 조진양이 버럭 소리쳤다.
“자, 잠시!! 저놈들은 관노(官奴)가 될 놈들입니다!!”
“…뭐?”
“저들을 잘 보십시오! 다 이민족 야만인놈들이지 않습니까! 국법에 보호받는 중원인도 아닐뿐더러, 엄연히 정당한 거래 승인을 받은 물건들입니다! 운남 성으로 이동될 예정이란 말입니다!!”
품 안에 있는 거래 문서까지 보여주며 소리치는 조진양.
그에 당율기의 분노는 더욱 폭발했다.
“보자 보자 하니 진짜 상종 못 할 새끼들이구나! 인간이면 다 같은 인간이지, 이민족이고 중원인이 아니면 사람이 아니라 물품이라고?! 야, 이 자식들아! 니들은 살 가치가 없다. 망설인 내가……!”
“됐어. 그만해.”
당장에라도 역수로 쥔 비수로 조진양의 목을 따기 위해 걸어가려던 당불퇴였지만, 쭉 뻗어진 손에 가로막혀 멈춰 서야만 했다.
“대, 대형?”
“…관노야. 우리가 건드리면 가문 전체가 국법을 어긴 벌을 받게 된다.”
“그게 무슨…….”
“오, 오오… 과연, 잘 아시는군요!!”
당황한 당불퇴와 반대로 조진양은 반색을 하며 소리쳤다.
“저, 저희를 이대로 보내주신다면… 결코 서로 피곤해질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많지 않은 나이임에도 고절한 무공을 익히신 것으로 보아 유서 깊은 무가의 자손분들이신 듯한데… 만약 저희와의 마찰로 운남 귀족가분들과 피곤한 일이 생긴다면… 가문의 어른들께서도 좋아하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지금 협박하냐, 이 쓰레기 같은…….”
“그만.”
당불퇴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겨우겨우 목숨을 구한 조진양은 그들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그, 그럼 저희는 이만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후, 그러시죠.”
“감사합니다!! 대협, 이 은혜는 꼭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 말한 조진양은 부리나케 일어나 도망쳤다. 그를 따르는 검수들도 허겁지겁 마차를 끌고 멀리멀리 떠나갔고, 멀어지는 그 모습을 보다 당불퇴는 결국 참지 못해 소리쳤다.
“대형!! 실망입니다!!!”
수도 없이 그에게 처맞고 살아왔다. 그에 불퉁하게 입술을 삐죽인 적은 있어도, 그간 존경의 염을 품고 살아온 것도 사실이었다.
“대형은 다를 줄 알았습니다! 대형을 진심으로 존경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허리를 굽히지 않고 고개를 숙이지 않는 그 모습이, 우리 당가가 다시는 비굴해지지 않도록 해주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열변을 토하는 당불퇴의 눈에는 어느새 이슬마저 감돌았다. 분노가 아닌 서러움, 배신감, 기대가 꺾인 실망 등이 벅차오른 것이다.
“…불퇴야, 말이 심하다. 대형 역시 생각이 있으신 게지.”
보다 못한 당지명이 그를 말렸다. 씁쓸하지만, 당주라는 위를 지닌 이로서, 당지명은 그들의 어린 대형을 이해할 수 있다고 여겼다.
‘책임을 진 이는… 스스로의 자유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거야.’
어디 단순한 무림 문파도 아니고 관과 얽힌 일이다.
그 잘난 사천삼주 역시 사천성주의 눈치를 보고 쩔쩔매는 판이며, 국가의 재산인 관노를 건드리는 경우 진정 국법에 저항한다 판단되면 삼족이 멸족될지도 모를 일이다.
“대형께 너무 오만…….”
그런데,
주섬주섬…….
“저… 대형? 무,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고개를 푹 숙인 그들의 어린 대형 당유혼.
처음에는 조금 전 일에 그 역시 상처를 받았겠지, 싶었는데 이제 보니 품을 뒤적이며 무언가를 꺼내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복…면?”
“응? 너도 줄까?”
얼굴에 둘러쓰는, 눈, 코, 입이 튀어나올 구멍 네 개만 뚫린 아주 훌륭한 복면이었다.
“자, 잠깐… 아, 아니죠? 설마…….”
“뭘 설마야? 니들 짐 잘 지키고 있어라.”
“잠깐만요!! 대형!!!”
허겁지겁 매달린 당지명의 눈이 애처롭게 떨렸다.
“왜, 왜 이러십니까! 저, 저희 진정하고 대화 좀…….”
“뭘 왜 이러십니까야? 너야말로 뭐해, 이 자식아?”
이거 안 놔?
“저, 저놈들을 족치러 가는 거 아닙니까?”
“어허. 누가 보면 이 몸, 당가의 적법한 직계이자 당가의 등불, 당가의 희망, 당유혼이 그런 짓을 할 줄 알겠다?”
“그, 그럼요?”
“몰라. 난 이제부터 노상강도 당… 아니지, 갈무흔이다. 그래, 추풍대주 갈무흔!”
그놈은 니가 직접 족쳤잖아, 이 새끼야!!!
“아니, 지옥에 있을 그놈이 어떻게 이곳 운남 땅에 있습니까?!”
“모르지. 뒈진 줄 알았던 그 새끼가 황산 계곡 절벽에서 떨어졌다가 운이 좋게 돌부리에 걸려 살아남고, 그대로 절벽 사이에서 기연을 발견해 복수심으로 빠득빠득 살아남았을지?”
그게 말이 되냐?!
“그, 그놈은 도법의 고수이지 않습니까?”
“도법? 아, 그래. 딱 적당한 게 있네.”
그 말에 당유혼은 인신매매범들이 떨어트리고 간 병장기 중 하나를 적당히 주워 들었다.
갈무흔이 들고 있던 박도는 아니었지만, 적당히 쓸 만한 도 하나가 주어지자 그것을 이리저리 낭창낭창 휘둘러 보였다.
“자, 추풍도법이다. 어때?”
“미… 미친… 그, 그걸 어떻게?”
모든 게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가장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진짜 추풍도법이잖아……?’
추풍대 마적단들과 부딪친 적이 있던 만큼, 당지명은 그들이 공통적으로 추풍도법을 익힌 걸 알고 있다. 그걸 따라 할 수는 없어도 그게 무엇인지 알아볼 수는 있었다.
“흥, 뭐 대단한 무공이라고.”
전성기 시절에 견식했던 최상승의 도법에 비하자면 어디 동네 양아치들이나 익히는 도법 따위.
단숨에 베껴 낸 당유혼이 쥐고 있던 도를 어깨에 삐딱하게 걸치자, 멍하니 그 상황을 지켜보던 당불퇴가 뒤늦게 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핫! 역시 대형이십니다! 혹시, 남는 거 하나 없습니까?”
“남는 거? 있지.”
옜다.
툭― 하고 던져준 복면을 받아 쓴 당불퇴는 겔겔겔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좋습니다. 뒤를 따르겠습니다. 대ㅎ… 아니, 대주님!”
“야, 이 자식아!! 넌 추풍도법 못 쓰잖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지적을 하는 당지명이었지만,
“…꼭 추풍도법을 펼칠 필요가 있겠습니까?”
당불퇴는 불퉁한 눈빛으로 고개를 삐딱하게 꺾었다.
“…뭐?”
“전 추풍도법 말고 추풍권법 펼치는 추풍대 할래요.”
“이… 미친……!”
“아, 왜요. 추풍대주 갈무흔이 지옥에서 살아 돌아오며 기명제자 하나 꼬셨다고 하지, 뭐.”
이미 다들 들을 생각이 없는 상태.
당율기 역시 은근슬쩍 복면 하나를 받아 쓰고 있었고, 당지명의 정신은 점점 혼미해졌다.
“야, 그런데 너 아까 나한테 뭐라 소리치는 것 같던데?”
“에이, 존경한다고 그런 거죠. 흐흐흐…….”
그리고 그런 당지명의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유혼을 필두로 한 부활한 추풍대는 운남 땅에서 새로운 마적행의 전설을 시작했다.
* * *
한편, 멀리멀리 말을 몰아 도망쳐가는 조진양은 분통을 터트리고 있었다.
“이 개자식! 근본도 없는 놈!! 감히 나 조진양에게 이런 굴욕을……!!”
잔뜩 얻어터져 부풀어 오른 살점이 푸들푸들 떨리도록 노호성을 질러대는 조진양.
그에 찔끔한 부하 하나가 조심스레 속삭였다.
“조, 조심하셔야 합니다. 대인. 그놈들이 듣고 쫓아올지 모릅니다…….”
“흥! 거리가 얼마나 멀어졌는데 놈들이 이 소리를 듣는단 말이냐!!”
앞에서야 살아보겠다고 불이 나도록 손발을 싹싹 비볐지만, 뒤에서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리고, 놈들을 다시 볼일은 내가 놈들의 목을 저 운남 성 장대에 걸어버릴 날밖에 없을 것이다.”
“예? 그 말씀은……….”
“운남 관아에 가져다 바친 돈이 얼마인데? 관병들을 요청해 놈들을 잡아넣을 것이야!”
‘…아니.’
아무리 무림인이 관병을 쉽게 건드릴 수 없다 한들, 자기들 죽이러 온다는데… 그게 쉬울까? 게다가, 이 운남 황량한 벌판에서 놈들을 또 어떻게 찾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어처구니가 없어 입이 쩍 벌어지는 인신매매범이었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다른 의견을 제시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조진양이 자신의 목을 운남 성 장대 위에 다 걸어버릴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두두두두두두―
갑작스레 뒤편에서 들려오는 굉음.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고, 뿌옇게 피어오르는 흙먼지가 보였다.
“저, 저게 뭔…….”
처음에는 말이 달려오는가 싶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복면인 네 명이서 말이 달리는 속도로 접근하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란 그들이 딱딱히 얼어붙어 있는데, 복면인들이 금세 그들 앞에 당도했다. 선두에 있는 이가 헉헉거리며 급한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헉… 이, 개새끼들… 그사이… 멀리도… 갔네…….”
빠드득―
잔뜩 화가 났는지 이를 가는 소리가 울려 퍼지자 겁에 질린 조진양이 몸을 덜덜 떨었다.
“다, 당신들은…….”
“헉헉… 헉… 나?”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드는 복면인이 뚫린 눈구멍 사이로 활활 타오르는 안광을 폭사했다.
“대 사ㅊ… 아니, 대 추풍대주 갈무흔 님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