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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가유혼-55화 (55/350)

55화

【 영광인 줄 아십시오 】

한심하다.

당유혼에게서 조소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진면목을 드러낸 하윤호의 기세도 혹한에 버금가는 한기를 머금고 있었지만, 당유혼은 그것마저 한심하다는 듯 비웃었다.

“…한심하다고……?”

“그럼 아니라고 생각하냐?”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묻자 오히려 되물음이 돌아온다.

도저히 상상도 못 했다는 듯 멈칫거리자, 당유혼은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을 던지며 말을 이어갔다.

“하오문이 언제부터 그렇게 자존심 따위에 연연했지?”

“아무리 밑바닥에 처박혀 있다지만, 자존심조차 없을 거라 생각하십니까요.”

밑바닥이니까, 오히려 가장 천박한 이들이니까, 그런 그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게 있는 법이다.

그런 반문에,

“웃기고 있네.”

당유혼의 입꼬리는 더욱더 기괴하게 비틀렸다.

“너희가 말하는 자존심이라는 게 겨우 그 정도였냐?”

탁―

맹렬히 떨리는 탁자를 짚는다.

막대한 중압감이 온몸을 짓눌러오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의연히 어깨를 편다.

“하오문이면 하오문답게 굴어.”

“…저희답다는 게 무엇입니까요?”

“자존심을 버려라. 그리고 자존심을 지켜라.”

모순.

하지만, 기억을 되짚어, 흘러가 버린 과거 속 누군가의 말을 흉내 낸다.

“모든 걸 버려도 가장 약한 이들은 지킨다는 긍지. 그게 하오문의 자존심이 아니었냐?”

하윤호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그 말은…….’

무언가 먹먹하면서도 탁 뚫리는 듯한 그런 기분.

그러니까 그건 마치,

“하… 하하하… 그걸 어떻게…….”

웃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는 희극이요, 비극.

“이제… 하오문의 그 누구도… 그 기치를 기억하는 이가 없다 여겼거늘…….”

하오문의 창립이념이자 이제는 잊혀 버린, 아니, 그들 스스로가 져버린 그들의 긍지.

무언가를 꾹 참던 하윤호는, 그답지 않게 감정의 편린을 드러내며 되물었다.

“…진심이십니까요?”

“무엇이 말이지?”

“비천하기 그지없는 저희들을… 품고 가셔도 되겠습니까요?”

잔뜩 비틀린 물음에,

“큭큭…….”

더한 비틀린 웃음으로 답한다.

“건방 떨지 마. 우리는 당가다.”

많은 것을 품은 말.

“지독하기 그지없다는 독도, 비겁하다고 천대받는 암기도, 하다못해 근본 없는 부랑자 새끼도 품어주는 게 당가다.”

그래, 그게 바로 당가다.

수십 년 전, 아무런 연원도 없던 그 자신을 품고 지금에 이르게까지 해주었던 것이 사천당가.

그러니까…….

“우리가 니들 하나 못 받아주겠냐?”

* * *

드르륵―

방이 엉망진창이었다.

가지고 있던 진신내공을 풀어헤쳤더니 탁자 위에 있던 집기나 주변 서재에 있던 책들이 다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어질렀던 것을 하나씩 추슬러 정리하고 있자니, 대기하고 있던 여인이 한숨 섞인 목소리를 내었다.

“지부장님. 저는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무엇이 말인가, 홍단?”

“요즘 지부장님께서는 그와 얽히면 예전 같지가 않으십니다.”

언제나처럼, 하윤호의 그림자 무사로서 존재하는 홍단은 말을 하는 저자신 조차 예전 같지 않다 여겼다.

하윤호가 피식 웃으며 그걸 지적했다.

“그림자가 목소리를 내는 것은 예전과 같고?”

“…죄송합니다.”

“죄송할 일까지는 아니지.”

달각―

하윤호는 마지막 서책을 원래 자리에 꽂아 넣으며 정리를 끝마치고 탁자에 앉으며 손짓했다.

“자네도 앉으시게. 오랜만에 차나 한잔하지.”

“…….”

그건 실로 참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그게 얼마 만이었냐면…….

달그락―

“자네가 내 그림자 무사로 발탁되기 전이었지 아마?”

“…예, 그렇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읽은 듯 홀로 독백하듯 하면서도 대화를 이어나가는 하윤호를 보며 그녀는 생각했다.

“참, 이해하기 힘들지?”

역시, 귀신 같은 사람이라고.

“하하, 너무 그렇게 보지 말게. 내 진면모를 드러내는 몇 안 되는 사람인 자네가 그리 보면… 나라도 조금은 슬퍼.”

그래서일까? 홍단은 많은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림자가… 져 보이십니다.”

“그림자?”

“예.”

언제나 귀신같이, 이해할 수 없다 여긴 그에게서 오늘따라 얼굴에는 표정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건 분명 산산이 부서진 무언가들의 편린이라 제대로 읽을 수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그가 예전 같지 않다는 방증이 되어주었다.

“그런가.”

걱정이 진하게 배인 말에 하윤호는 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그렇게 뜨겁지는 않은 차로 입 안을 적시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면 하나 묻겠네만, 자네는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그가 누구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당유혼. 조금 전 떠나간 그 사내에 대한 감상이라면,

“…경박하고, 경솔하고, 경망합니다.”

솔직하게, 말하는 본새나 행동거지가 저렇게 가벼울 수 있을까 싶다.

“딱, 나잇값을 한다고 해야 할지…….”

이제 스물도 되지 않을 이들이나 할 만한 언변이 썩 좋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 보이는가?”

그 신랄한 평가에 하윤호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나는 정반대로 보이는데 말이지.”

그에 대한 감상은 전혀 달랐다.

“그는 무척이나 옛것의 향기를 풍기는 사람이다. 그의 행동 방식도, 그가 추구하는 정의도, 그의 가치도.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 만큼 구닥다리의 것들이지.”

“예……?”

홍단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하윤호도 더 이상 말하지는 않았다. 이건 어차피 말로 한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닐뿐더러, 억지로 이해시키려 해봐야 해만 될 뿐이니까.

그래서 화제를 돌렸다.

“그의 말마따나 시대가 변해 가고 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는 변해 가는 시대의 흐름에 떡하니 나타나 버렸지.”

“구패(九覇)의 움직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것도 있고.”

구패(九覇).

만가쟁패가 도래하며, 그 이전까지의 법칙이 지워지고 혼돈의 시대가 찾아옴에 가장 뚜렷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아홉 세력을 일컫는 말이었다.

“멀리 보지 않아도 본문의 행동도 기묘하기 짝이 없지 않나?”

“확실히… 요즘 본문의 각 지부 연계가 잘되지 않는다는 말이 돌고 있기는 합니다.”

하오문은 원래 지부끼리 썩 친하지는 않았다. 대륙 정 반대편에 있는 지부는 그냥 남이라고 치부할 수준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 해도 지금은 이상했다.

“불경한 생각을 입에 담을까 봐 말을 하기가 어려운가?”

“…지부장님.”

“그냥 허심탄회하게 말하지. 이미 다른 지부들 여럿이 다른 세력에 붙어먹었다고.”

“…….”

홍단이 차마 말할 수 없었던 말을 시원하게 뱉어버린 하윤호는 빈 잔을 채우며 말했다.

“이상할 건 없지. 하오문은 원래 약해빠진 비루한 것들이 살아남기 위해 뭉친 문파니까. 살아남기 위해 어딘가에 빌붙듯… 아주 당연한 게 아닌가?”

“하지만 그건…….”

“비참하지? 자존심이 상하지? 하지만, 어쩌면 그게 맞는 걸지도 몰라. 아니, 너무 정확한 말이라서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지.”

당유혼의 말을 듣고서야 깨달은 것.

이제는 꽤 맑아진 머릿속을 정리하며 하윤호는 자신이 해야 할 것을 확실시했다.

“투자는 역시 선투자 아니겠나?”

“…당가에 투자하겠다는 것입니까?”

“그렇다네. 그리고, 이왕 걸 것이라면 전부 다 걸어봐야지.”

펄럭―

책상 한편에 말려 있던 두루마리를 펼쳤다.

그 안에 그려져 있던 것은 대륙 전도. 각 지역을 대표하는 세력들이 빽빽하게 표기된 그 전도를 바라보며 하윤호는 차를 들이켰다.

“완전히 망해 버린 용독문을 조사하며 나온 게 아예 없네. 웬만한 뒤처리는 우리가 해주려 했지만, 당유혼 그자가 이미 해가 될 만한 것들은 전부 정리하고 나왔다는 게야.”

하오문으로 자존심이 상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대륙에 현재 비일비재하지. 저 북쪽 황량한 고원을 떠도는 야차전(夜叉戰)이나, 요즘 시끄럽다는 중부지방의 패권 다툼, 아예 연락이 끊겨 버린 남만 등…….”

지금은 그런 일들이 대륙 단위로 벌어지고 있다.

“사천삼주가 있지 않습니까?”

“글쎄, 그치들은 침몰하는 배야. 과거에 취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지.”

그러니 답은 하나뿐이라는 말.

“시대에 휩쓸려 뒤처지기 싫다면, 그 위에 올라타야겠지.”

하윤호는 대륙 전도를 보며 당유혼을 떠올렸다.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한 남자에게서 먼 미래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당유혼을 생각할 때…….

“꾸웨에에에에에엑!!”

안가에서 제법 떨어진 어느 외딴곳.

그곳에서 당유혼은 검게 죽은 피를 토하고 있었다.

* * *

“우에에에엑… 주, 죽겠네…….”

이 빌어먹을 자식. 어린놈의 자식이 그렇게 강한 기세를 뿜어내?

“내, 내가 정상 상태였더라면 한주먹 거리도 안 되는 ㄱ… 구웨에에에에엑!!”

아직 용독문에서의 후유증이 다 낫지 않은 지금, 진면목을 드러낸 하윤호의 기세는 당유혼의 오장육부를 뒤틀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개자식. 지가 용독문주 목도 따버릴 실력을 가지고도 나를 부려 먹다니…….’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썩 나쁘지는 않은 기분이었다. 오늘 여러 가지로 얻은 게 있었으니까.

그 수확을 헤아리며 걷고 있자니, 아지랑이 같은 무언가가 피어오르는 게 보인다.

‘대충, 감은 잡은 모양이군.’

담장을 넘어 당가로 들어서니 연무장에 모여 귀원일기공을 운용하는 방계들이 보였다.

요 며칠간 삼재진을 연습하던 그들이 이제는 제법 영역(領域)을 만들어 내는 게 보인다.

‘저게 기본이지.’

소림의 백팔나한진이 그러하고, 무당의 태극검진이 그러하며, 마교놈들의 그 극악무도한 진법이 그러하듯, 진정한 진법은 그들만의 영역을 형성한다.

‘그리고, 삼재진 역시 마찬가지. 아니, 그 이상을 그리게 될 거다.’

아직 그 가치를 모르는 저 멍청한 녀석들은 이 대형의 은혜로움도 모르고 힘들다 찡얼대고 있지만, 먼 훗날 그 하해와 같은 은혜에 눈물을 질질 흘리게 될 거다.

‘감각 공유는 아주 기본일 뿐이니까.’

스륵―

투골저 세 개를 꺼내 들어 겨눈다.

목표를 아지랑이를 피워내는 삼재진의 주축을 이루는 당지명.

슈슉―

그 수련을 이끌어낸 그에게 이 정도라면 역시…….

“끄아아아악!!”

“대, 대형!?”

“암습이다!! 암습이야!!!”

“…….”

역시,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적중.

땅바닥에 철퍼덕 쓰러져 버린 당지명과 허겁지겁 그에게 달려드는 방계들을 보며,

“…이 모지리 새끼들.”

갈 길이 구만구천 리인 걸 새삼스레 느끼는 당유혼이었다.

광형 상단은 상행의 준비가 완료되는 동안 당가 내에서 묶게 되었고, 당가의 넘쳐나는 재산으로 귀빈 대우를 받으며 방계들의 수련 현장을 지켜보았다.

아니, 저게 과연 수련이 맞기는 할까?

“끄아아악!!”

울려 퍼지는 비명 소리.

“또 하나 가는군요.”

“…흠.”

오늘도 삼재진 연마에 힘쓰는 방계들을 보던 광운대원 하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게 뭐 하는 행위인지 모르겠습니다.”

“수련이지 않느냐?”

“허, 수련? 저게 진짜 수련으로 보이십니까?”

당유혼이 없는 동안에도 방계들을 조를 번갈아 가며 수련을 진행하고 있었다.

각기 다른 방향을 보고 서서, 한 명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젓가락을 던진다. 감각 공유가 성공한다면 피해 내지만, 그게 실패한다면…….

“끄아아악! 이 자식아, 왜 머리만 조준해서 던지는 건데!!”

“내가 뭐 노렸겠냐? 뒤에서 던지니까 거기로 가는 거지! 너도 내 엉덩이만 노렸잖아!”

“애초부터 노렸구나!! 딱 대, 네 차례야!!”

저렇게 젓가락 꽂이가 되는 것이다.

“…막막한 수련이긴 하구나.”

결국 광운대주조차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저건 수련보다는 혹사에 가깝습니다. 아니, 저게 가능하기는 합니까?”

“뭐가 말이냐?”

“날아오는 걸 보지 않고 피하기라니. 솔직히, 한 손에 짱돌을 들고 박치기를 수련해서 그걸 부숴보겠다는 게 더 합리적일 겁니다.”

실제로 그와 비슷한 철두공(鐵頭功)이라는 이름의 무공이 있다.

그리 말하는 부하의 말에, 차마 광운대주 역시 말을 잇지 못하고 먼 산을 바라봤다.

그때,

“뭐여, 지금 우리 수련이 무식하다는 거요?”

삐딱한 목소리가 앉아있는 그들을 향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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