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이 상황에서 재미라니.”
“재미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고. 도박성이 있긴 하지만 우리의 전력을 온전히 보존한 상태에서 적을 물리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하지.”
나군천은 상천의 방법에 흥미를 보였다. 물론 우려하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럴 때일수록 좀 더 과감한 선택을 하는 것이 나군천의 성향이었다.
“사실 군마성주만 안 나오면 우리가 충분히 승산이 있는 것 아닌가?”
“물론이지. 하지만 군마성주가 안 나오겠나?”
가백현의 말에 나군천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네가 그랬지. 군마성주의 제자.”
“갑자기 군마성주의 제자가 왜… 아!”
나군천의 말에 의아해 하던 가백현이 서기종을 떠올리며 무릎을 탁 쳤다.
상천과 그렇게 마주하고 싶어 하던 그였다.
만약 이쪽에서 대표로 상천을 내세운다면?
분명 그쪽에서는 군마성주가 아닌 서기종이 나올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군마성주의 제자는 실력이 상당했어. 자칫… 젊은 인재 한 명을 잃을 수도 있는 일이야.”
가백현의 말에 나군천도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보면 자신들이 살자고 앞길 창창한 젊은이를 사지로 내모는 꼴이었다.
갑자기 상황이 이렇게 되자 상천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이 계획을 처음 접했을 때 자신이 대표로 나서게 될 것이란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사도련의 명운을 짊어질 정도의 실력도 되지 않을뿐더러 자신이 그런 일을 할 입장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상천 역시 그와 싸워보고 싶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자신을 잘 아는 것 같은 그.
하지만 자신은 모르는 그.
무언가 원한이 있는 것 같기도 한 그와 싸우면 어떻게 될까? 라는 생각을 잠깐이나마 했다.
사실 그와의 싸움에서 질 거라는 생각은 크게 들지 않는 상천이었다.
“만약 백룡문주가 나서 주고 저쪽에서 군마성의 제자가 나선다면 이길 경우 군마성주의 목을 요구할 생각이네.”
나군천의 말에 가백현과 하신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처럼만 된다면 단번에 이번 싸움을 끝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얼핏 무모해 보였던 상천의 계획이 순식간에 최고의 계획으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상천의 결단이었다.
가백현과 나군천, 하신은 부담주지 않으려 일부러 상천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상천이 나서지 않겠다고 하여도 그들로서는 상천을 탓할 수 없었다.
“해보죠.”
상천이 마음을 굳히고 말했다. 그 대답이 나오자마자 집무실의 분위기가 조금 밝아졌다.
“괜찮겠나?”
“괜찮습니다. 전 제 사부님을 믿습니다.”
상천이 종삼을 떠올리며 말했다.
종삼이 뼈대를 가르치고 자신이 살을 붙인 백룡문의 무공.
비록 중간에 기연이 있었지만 그 근간에는 백룡문의 무공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 무공이라면 절대 패하지 않을 것이란 굳은 믿음이 있었다.
“이길 겁니다.”
상천이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상천이 대표로 나서기로 결정하고 약 한 식경 뒤.
은남도문에서 전령 한 명이 군마성 진영으로 향했다. 정문 위 망루 위에서 가백현이 초조한 눈빛으로 멀어지는 전령을 바라보고 있었다.
***
은남도문에서 보낸 전갈을 받아 본 군마성주는 피식 웃었다. 눈에 빤히 보이는 계략이기 때문이었다.
“저들이 잔머리를 굴리는구나.”
“…….”
군마성주의 말에 서기종은 아무런 말없이 곁에 서 있었다.
“일대일 대결을 하자는구나. 그래서 이기는 쪽의 조건을 들어주는 것으로.”
“사부님을 이길 자는 없습니다.”
서기종이 말했다. 사실이었다. 강하다는 가백현도 직접 검을 섞어본 결과 군마성주를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저쪽에서 백룡문주가 나온다는구나.”
그 말에 서기종의 눈이 빛났다.
‘상천이 대표로.’
“네가 그렇게 마주하고 싶어 하던 자가 나섰다. 어떻게 하겠느냐? 내가 나서든 네가 나서든 이건 우리가 이기는 싸움이라 생각되는데.”
“저쪽에서 내건 조건이 무엇입니까?”
“당일에 말하겠다는구나.”
서기종이 생각에 잠겼다. 저쪽에서 내걸 만한 조건은 상천이 이기면 군마성이 두말없이 물러서는 것 정도.
그 정도라면 굳이 군마성주가 나설 것도 없었다.
“제가 나서겠습니다.”
서기종의 말에 군마성주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후회 안 남도록 싸워보거라. 전령을 데려와라!”
군마성 진영에서 돌아온 전령이 가져온 전갈을 읽은 가백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대로 군마성에서는 서기종이 대표로 나섰다.
‘도대체 무슨 관계이기에.’
가백현이 느끼기에 서기종은 상천과 굉장히 만나고 싶어 했다.
반면 상천은 그가 누구인지 잘 모르는 눈치였다.
‘뭘까.’
가백현의 머릿속에 의문이 가득 차올랐다.
같은 의문을 상천도 하고 있었다.
‘도대체 누굴까. 나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인데.’
상천은 침상에 앉아 눈을 감고 지금까지의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하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 중 그자와 같은 얼굴은 없었다.
‘가릉과 같은 식인 건가?’
죽은 줄 알았던 가릉이 살아 있었다. 얼굴 변용으로 신분을 숨기고 있었다. 만약 군마성주의 제자도 그런 식이라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짐작 가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서 형?’
갑자기 사라진 서기종. 상천의 머릿속에는 계속해서 서기종이 맴돌았다. 그러고 보니 목소리도 비슷한 것 같았다.
하지만 상천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아는 서기종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군마성주의 제자일 리 없다며 상념을 지웠다.
“조만간. 다시 보지. 그때 날 쓰러뜨린다면 자연스레 알게 될 테니.”
그러자 이내 그자가 마지막 순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 곧 알게 되겠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상천은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서기종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해가 뜨면 상천과 겨루게 된다.
단순 비무가 아닌 생과 사를 가르는 결투를.
‘내일이다. 내일.’
그렇게 중얼거리며 서기종은 눈을 감았다.
***
아침 해가 떠올랐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은남도문 외전 한가운데에 있는 거대한 연무장 위에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던 나군천이 중얼거렸다.
“저 해를 언제까지 볼 수 있을지.”
“그렇게 백룡문주를 믿던 나 문주가 어찌 약한 소리를.”
나군천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가백현이 다가오며 말했다.
“믿는 것과 내 운명은 별개지.”
“하긴. 믿는 대로 모든 것이 다 이뤄진다면 지금 이런 상황도 오지 않았겠지.”
가백현이 나군천의 옆에 나란히 서서 해를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눈부셔서 제대로 쳐다보기도 어려웠지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모습을 담아 두고 싶었기 때문인지 두 사람은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계속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눈 상하십니다.”
두 사람의 뒤에서 상천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담감이 클 텐데도 상천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덤덤했다.
“괜찮은가?”
“예. 가뿐합니다.”
상천이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 모습에 가백현과 나군천은 더욱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미안하네.”
“아닙니다. 어차피 사도련이 무너지면 백룡문도 무사하지 못합니다. 백룡문을 위해서라도 이번 싸움은 반드시 이길 겁니다.”
상천은 사도련의 명운 같은 거창한 이유는 접어두기로 했다. 이번에 지면 백룡문은 끝이라는 생각으로 나서기로 했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부담이 안 갈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조금 더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시간이… 벌서 이렇게 됐나?”
약조한 시간이 다 되었음을 뒤늦게 안 가백현과 나군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몸조심하게.”
“네.”
나군천의 말에 상천이 살짝 미소를 지은 채 활짝 열려 있는 은남도문의 정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은남도문 정문을 나선 상천은 멀리 보이는 군마성 진영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의 오른손에는 비호의 검이 굳게 쥐어져 있었고 그의 뒤에는 군마성의 조건을 은남도문 쪽에 전달할 전령도 한 명 따르고 있었다.
얼마를 걸었을까. 반대쪽에서 군마성주의 제자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누굴까.
아직도 상천의 머릿속에서는 그 의문이 떠나질 않았다.
서로를 향해 걸어온 두 사람은 어느새 지척에 마주보고 섰다.
마주보고 선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눈을 마주치고 상대의 정체를 파악하려 했다. 아니, 상천만이 그러했다.
‘누구냐.’
“드디어 이 시간이 왔군.”
침묵을 깬 건 서기종이었다. 그의 말에 상천은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렇게 쳐다보면 무서운데. 일단 양쪽 조건부터 들어봐야겠지? 우리 조건은 은남도문이다.”
군마성의 조건을 전해 들은 상천은 충분히 예상했다는 듯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쪽 조건은… 군마성주의 목이오.”
꿈틀.
상천의 말에 서기종의 눈썹이 한 차례 꿈틀거렸다. 그의 뒤에 서 있던 군마성 쪽 전령도 이 말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난감해하는 듯했다.
“재밌군. 사부님의 목이라니.”
“우리 입장에서는 가장 큰 장애물이 군마성주요. 그러니 당연한 것 아니겠소?”
상천이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 말했다. 그에 서기종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상천을 노려보았다.
“어쨌든 이기면 그만이니까. 시작할까?”
서기종의 그 말에 양쪽 전령들이 상대가 내건 조건을 전달하기 위해 양측 진영으로 돌아갔다.
이제 진짜 둘만 남았다.
서기종은 드디어 상천과 싸우게 됐다는 생각 때문인지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상천의 입에서 나온 조건이 군마성주의 목이었지만 그것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상천과 마찬가지로 서기종도 이길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거리를 조금 벌렸다.
그리고는 검을 늘어뜨린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다른 기수식은 취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멀리서 보기에는 둘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는 것도 같아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저벅저벅.
저벅저벅.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두 사람이 다시금 서로를 향해 다가갔다.
처음과 다른 점이라면 둘 다 한껏 내력을 끌어 올리고 있는 상태라는 점이었다.
검과 검의 사정 범위 안으로 두 사람이 들어왔다.
지금부터는 검을 휘두르면 서로가 상대를 벨 수 있는 간격이었다.
쒜엑!
먼저 검을 휘두른 쪽은 서기종이었다.
가백현과 싸울 때에는 보여주지 않았던 빠르기였다. 지척에서 빠르게 뻗어 나오는 서기종의 검.
하지만 상천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스윽.
부드럽게 움직이는 다리.
서기종의 검이 상천의 가슴팍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서기종의 검이 지나가는 순간 상천의 다리가 다시 한 번 움직였다.
그와 함께 상천의 단월검이 펼쳐졌다.
‘바람을 베다.’
쩌엉-!
하지만 상천의 첫 번째 초식 삭풍은 서기종의 검에 막히고 말았다.
비록 상천은 눈앞의 상대가 서기종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지만 서기종 입장에서는 상천의 단월검은 수십 번 본 초식들이었다.
예전 같았다면 알고도 막지 못할 공격이었겠지만 지금의 서기종은 충분히 막을 능력도, 반격도 가할 능력도 있었다.
씨익.
서기종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희열. 그것이 가져다주는 진한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