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월검제-138화 (138/141)

#138화.

첫 전투를 끝낸 군마성 진영에는 살벌한 기운이 감돌았다.

군마성주의 분노가 제법 컸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그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행동할 뿐이었다.

서기종은 마음이 무거웠다.

상천과 상대하고자 하는 자신의 욕심 때문에 여상과 귀령대주가 목숨을 잃은 것 같았다. 물론 귀령대주야 어쩔 수 없었다 쳐도 여상은 자신 때문에 죽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해는.”

“제법… 큽니다.”

“정확한 숫자를 얘기하라.”

“오십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팔십 명 정도가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 장로의 보고에 군마성주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 정도 피해를 입고 은남도문을 무너뜨렸다면 속이 쓰려도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은남도문을 무너뜨리지도 못했고 여상과 귀령대주를 잃었다.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고도 적을 궤멸시키지 못했다는 사실에 군마성주는 큰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우리 군마성이 고작 이 정도였나?”

군마성주의 말에 아무도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아무리 적의 반항이 거세다고는 하지만 중원을 노리는 군마성 입장에서 고작 사도련을 집어삼키는 데 고전한다는 것은 변명의 여지없이 자신들의 잘못이었다.

“최대한 빨리 수습하라. 이번엔 내가 직접 선두에 설 것이다.”

군마성주의 말에 이 장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숙이며 짧게 대답했다.

“네.”

***

상천과 떨어진 화룡은 발걸음을 멈추고 녹엽과 낭호를 기다렸다. 부지런히 걷고 또 걸은 두 사람은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그녀를 반가워하며 은남도문까지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세 사람이 은남도문에 도착한 것은 상천이 도착하고 이틀이 지난 후였다. 어느 정도 사태 수습이 끝난 상태에서 도착했기에 크게 어수선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여기가 은남도문이구만. 여기를 다 와보고 출세했네.”

은남도문의 거대한 모습을 본 녹엽이 중얼거렸다. 그에 낭호 역시 동감한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그런 그들에게 정문을 보수하고 있던 은남도문 무사 한 명이 다가와 물었다.

“아, 저 우리 문주님이 이곳에 오셨는데…….”

“백룡문에서 오셨습니까?”

녹엽의 말에 은남도문의 무사가 알겠다는 듯 답했다. 미리 언질을 받았기 때문에 바로 알아본 것이다.

“네. 맞아요. 백룡문에서 왔어요. 문주님은 도착하셨나요?”

녹엽과 낭호보다는 사도련 무인들과 마주할 기회가 많았던 화룡이 나서서 물었다.

“그렇습니다. 들어오시지요. 모시겠습니다.”

은남도문의 무사가 세 사람에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 기본적으로 은남도문을 찾은 손님이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었지만 이렇게 극진한 예를 보이는 데에는 상천의 역할도 컸다.

은남도문 무인의 안내를 받아 세 사람은 곧장 상천이 쉬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문주님, 일행 분들 오셨습니다.”

그 말에 방문이 열리고 상천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세 사람을 보자마자 환한 표정을 지었다.

“고생 많았소. 앉으시오.”

상천이 세 사람을 방으로 들여 자리를 권했다. 먼 길 오느라 지친 세 사람은 의자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별일 없었소?”

“네. 없었습니다.”

상천의 물음에 낭호가 답했다.

“이곳도 큰일은 없었던 모양입니다? 생각보다 멀쩡한 걸 보니.”

녹엽의 물음에 상천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도착했을 때의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러자 녹엽과 낭호, 화룡은 놀란 듯 넋을 잃은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빨리 왔으면 진짜 짐짝이었겠구만.”

녹엽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그러자 화룡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수습이 빠르군요.”

“언제 저들이 또 움직일지 모르니.”

상천의 대답에 이번에는 낭호가 물었다.

“다음 대비책은 있답니까?”

“일단은 버티는 게 최선인 모양이오. 무당에서 지원이 오고는 있다는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고.”

“흠…….”

상천의 대답에 낭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녹엽이 툭 던지듯 한마디 했다.

“이럴 땐 개싸움보다는 그 방법이 더 좋을 수 있는데.”

그 한마디에 상천을 비롯한 나머지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녹엽에게로 쏠렸다.

갑작스런 주목에 당황한 녹엽이 어색한 미소를 짓더니 낭호에게 말을 걸었다.

“그 방법 있잖아. 무투대회에서 자주 보던 거.”

“아.”

녹엽의 말에 낭호도 무엇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짧게나마 무투대회를 경험해 본 상천이지만 두 사람의 이야기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에 낭호가 입을 열었다.

“문주님께서 보고 겪은 무투대회는 겉핥기일 뿐입니다. 무투대회를 둘러싸고 수많은 내기가 이뤄지죠.”

“그건 알고 있소.”

상천의 말에 낭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게 단순히 돈내기뿐만이 아닙니다. 무투대회가 열릴 때면 서로 앙숙인 세력들도 거대한 무언가를 걸고 내기를 하죠.”

“거대한… 무언가?”

“예. 거대한 무언가. 바로 서로의 세력에 있는 무언가를 걸고 하는 겁니다. 사람이 될 수도 있고 기방이 될 수도 있고 객점이 될 수도 있고.”

낭호의 말에 상천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무공 실력이 높아지고 강호 경험이 많아진 상천이었지만 그런 밑바닥 사정까지 다 알지는 못하는 그였다.

“쉽게 말하면 땅따먹기라는 거죠. 내가 내세운 이놈이 네가 내세운 그놈을 이기면 너희가 먹고 있는 기방 우리한테 넘겨라. 뭐 이런 식의.”

“그럼 일기를 하자는 말인가요?”

화룡의 말에 낭호와 녹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가지 때문에 안 될 것 같은데. 첫 번째, 저쪽에서 군마성주가 직접 나설 가능성이 높다. 두 번째, 열흘만 버티면 무당에서 지원이 온다.”

상천의 말에 녹엽이 고개를 저었다.

“조건은 뭘 걸어도 상관없으니까요. 어떻게든 이겨서 시간을 벌어도 좋고 저쪽 고수 한 명의 목을 걸어도 좋고 아니면 일반 무사 백 명의 목을 걸어도 좋고. 그리고 중원을 노린다는 군마성주가 고작 사도련을 먹는 이 싸움에 직접 나서겠습니까?”

녹엽의 말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었다. 만약 첫 번째 싸움에서 무당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 수만 있어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 할 수 있었다.

“일단 가 문주께 전달은 해보겠소. 피곤할 텐데 일단 여기서 쉬시고.”

그렇게 말한 상천이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가백현을 만나기 위해 그의 집무실로 향했다.

***

가백현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지난 싸움이 끝난 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그였다. 운기조식으로 피로를 몰아내며 버텼지만 몸에 쌓인 피로는 어쩔 수 없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의자에 기대어 누워 잠시 눈을 감고 있던 가백현은 상천의 목소리에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오시게.”

가백현의 말에 상천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래, 무슨 일이신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할 말이 있다니. 무슨 사단이라도 난 건가?”

“그런 건 아닙니다. 앞으로의 싸움에 대해서입니다.”

상천의 말에 가백현이 눈을 빛냈다. 뭔가 새로운 대비책을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나 문주와 하 군사를 불러와야겠군. 밖에 누가 가서 나 문주와 하 군사를 모셔와라!”

가백현의 집무실 밖에서 분주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오랜 시간 지나지 않아 나군천과 하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실 풍신현도 와야 하는 자리지만 부상이 심해 요양 중이었다.

“다들 모였군.”

“갑자기 이렇게 부르다니. 무슨 일이지?”

나군천의 물음에 가백현이 상천을 바라보았다.

“앞으로의 싸움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오호.”

상천의 말에 나군천이 턱수염을 한 차례 쓰다듬으며 자리에 앉았다.

“사실 우리는 머리가 굳어서 그럴싸한 비책이 안 나오던데. 젊은 백룡문주의 머리에서 어떤 비책이 나왔을지 궁금하군.”

나군천의 말에 상천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입을 열었다.

“사실 제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 아니라 제 일행에게서 나온 생각입니다.”

“그런가?”

“예. 지금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당의 지원이 올 때까지 저들의 공격을 막아내는 겁니다.”

“그렇지.”

상천의 말에 나군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시간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 됩니다.”

“하지만 그게 쉽지는 않지. 저들이야 마음먹으면 지금이라도 당장 우리는 칠 여력이 있고 우리는 막을 여력이 부족한 상황일세.”

가백현의 말에 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제 일행이 알려준 방법이 효과가 있을 듯합니다. 무투대회가 열리면 그 주변 세력들이 서로 내기를 한다더군요.”

상천이 거기까지 말하자 하신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말 그대로 땅따먹기죠. 하지만 지금 우리가 은남도문을 걸고 저들과 내기를 하기에는 너무 위험 부담이 큽니다.”

“잠깐. 그 말은 우리쪽 대표와 저쪽 대표가 일기를 벌여 이기는 쪽의 조건을 들어주자는 건가?”

“예. 조건은 뭐든 상관없습니다. 무당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도 좋고 저쪽 고수의 목을 걸어도 좋고 저쪽 무인 백 명의 목을 걸어도 좋습니다.”

상천의 말에 가백현과 나군천, 하신이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 그들이 생각을 끝낼 때까지 상천은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저쪽에서 군마성주가 나서면 그대로 끝일세.”

가백현의 말에 나군천과 하신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은 상천도 우려하는 부분이었다.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무당이 오기 전에 저들이 공격을 감행하면 지는 싸움입니다. 그리고 이 방법대로 해서 군마성주가 나선다면 그것도 지는 싸움입니다. 어차피 질 거라면 좀 더 확률이 있는 쪽을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전자가 더 확률이 높을 수도 있습니다.”

잠자코 있던 하신이 입을 열었다. 그 역시도 상천의 의견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안에서 막는 입장이나 밖에서 공격하는 입장이나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만 굳이 따지자면 안쪽에서 막는 게 훨씬 쉽습니다. 은남도문의 외전이 뚫린다 하여도 내전에 힘을 집중시키고 기관진식을 모두 가동한다면 저들도 쉽게 뚫을 수 없을 겁니다.”

하신의 말이 더 확률이 높아 보였다. 상천의 방법은 확실히 하신이 내세운 방법보다 더욱 무모했다.

만약 군마성처럼 확실한 승리가 보장되는 인물이 있다면 이쪽에서도 상천의 방법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은남도문에는 군마성주를 상대로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가백현과 나군천 둘이 군마성주 한 명을 상대한다 한들 이길 것이란 보장이 없었다.

만약 지난 번 싸움에서 군마성주가 나섰다면 지금 이 순간은 없었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재미는 있을 것 같군.”

그때 튀어나온 나군천의 한마디에 가백현과 하신은 마치 그를 정신병자 바라보듯 쳐다보았다.

생사를 논하는 상황에서 재미라니.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