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월검제-137화 (137/141)

#137화.

성벽 아래로 내려온 서기종은 잠시 숨을 골랐다.

드디어 만난다.

처음으로 질투를 느끼게 만든 존재를.

왠지 모르겠지만 이번 싸움에서 만날 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던 그 사람.

서기종이 상천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불을 보고 무작정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자신을 둘러싼 군마성 무인들 사이에서 주먹을 휘두르던 상천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거대한 존재감에 침을 삼켰다.

그렇다고 해서 싸움을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은 최대한 이들이 은남도문 안쪽으로 밀고 들어가는 것을 막는 것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이내 상천은 주먹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향해 달려들던 군마성 무인들이 공격을 멈추고 서서히 거리를 벌렸기 때문이었다.

‘나야 좋지! 누구냐! 어서 와라!’

그렇게 중얼거린 상천이 오히려 그들과의 거리를 좁히며 주먹을 뻗었다.

‘헛!’

하지만 상천은 곧장 뻗었던 주먹을 회수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날카롭게 검을 뻗었기 때문이었다.

주르륵!

주먹을 거둬들이며 다시 거리를 벌린 상천은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낯선 이를 바라보았다.

‘누구지?’

자신과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아 보이는 사람이었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

하지만 왠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었다.

“오랜만이군.”

“날 아시오?”

서기종의 말에 상천이 의아함을 가득 담아 물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눈앞에 있는 사람은 만난 적이 없었다.

“아주 잘 알지. 만나고 싶었다. 그리고 꼭 싸워보고 싶었고. 누가 더 강한지.”

눈앞의 상대가 서기종이라는 것을 알 리 없는 상천에게 그의 말은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일 뿐이었다.

“아쉽군. 검이 없다니.”

“검법만큼이나 권법도 강하오.”

상천은 눈앞의 상대가 누구인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자신에게 검을 뻗었다는 것은 적이라는 뜻.

쓰러뜨리는 데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기로 했다.

“있는 실력 모두 발휘하길 바란다. 죽지 않으려면. 그래야 백룡문도 살릴 수 있을 테니까.”

서기종의 말에 상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백룡문을 알고 있는 것이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가 한 이야기를 종합해서 생각해 보면 백룡문까지 알고 있다는 것은 상대가 자신에 대해 상세하게 알고 있다는 것과 같았다.

“위험한 놈이군.”

상천의 말이 짧아졌다. 그만큼 화가 난 상태라는 뜻이었다.

“죽기 살기로 해라. 네 식솔들을 지키려면.”

서기종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

하지만 서기종과 상천의 싸움은 시작도 하지 못한 채 후일을 기약해야 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귀령대주와 여상 때문이었다.

풍신현과 대결을 벌인 귀령대주는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간 압도적인 무위를 보였던 귀령대주는 결국 풍신현의 벽을 넘지 못했다.

하지만 귀령대주 역시 쉽게 쓰러지지 않았다.

군마성 내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인 만큼 풍신현을 죽음 직전까지 몰아쳤다.

귀령대주의 보법은 신묘했고 검은 날카로웠다.

쾌검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빠르고 날카로운 검이었지만 그 안에 묵직함이 스며들어 있어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산전수전 다 겪어봤다 할 수 있는 풍신현으로서도 상대하기가 녹록지 않았다.

다만 보법이나 움직임에 있어서는 풍신현이 조금 더 우위에 있었기에 거리를 좁히며 공격을 할 수 있었다.

검과 권의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얼마나 거리를 잘 유지할 수 있느냐인데 검을 사용하는 귀령대주가 풍신현에게 간격을 내주면서 결국 목숨을 잃은 것이다.

하지만 귀령대주를 쓰러뜨린 대가는 상당했다.

살을 주고 뼈를 깎지 않으면 결코 쓰러뜨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풍신현은 보법을 최대한 활용하여 공격 일변도의 권법을 펼쳐냈고 그 결과 왼쪽 팔을 잃는 치명상을 입고 말았다.

마지막 순간 자신의 왼 어깨를 내주며 귀령대주의 하단전에 꽂아 넣은 마지막 주먹이 결국엔 승부를 갈랐다.

무모해 보일 수 있는 공격이었기에 만약 그 한 수가 실패했다면 쓰러져 목숨을 잃은 사람은 귀령대주가 아닌 풍신현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두 사람의 실력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했다.

귀령대주가 쓰러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상이 가백현의 도에 목숨을 잃었다.

여상은 귀령대주와 비등한 실력을 가진 자.

검법의 성향은 차이가 컸지만 둘 사이에는 큰 실력 차가 없었다.

그런 여상이 감당하기에는 가백현의 무위가 너무 뛰어났다.

서기종과의 싸움에서 약이 오를 대로 오른 가백현은 결국 여상에게 쌓였던 분노를 폭발시켰고 여상은 가백현의 몸에 많은 자상을 남기기는 했지만 결국 목과 몸이 분리되며 목숨을 잃고 말았다.

나군천이 여상과 싸우면서 고전했던 것을 생각하면 가백현이 이끄는 은남도문이 왜 사도련의 수장 역할을 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여상과 귀령대주의 죽음은 군마성에 있어서 상당한 피해였다.

물론 그만큼 은남도문이 입은 피해 역시 상당했지만 피부로 다가오는 충격은 군마성이 더 컸다.

결국 군마성주는 전군 후퇴를 명령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자신이 직접 나서 치솟는 분노를 폭발시키고 싶었지만 중원 점령을 생각하면 이럴 때일수록 더욱 침착해져야만 했다.

군마성주의 후퇴 명령이 떨어지자 서기종의 얼굴에는 진한 아쉬움이 묻어났다.

“아쉽군. 제대로 붙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마지막으로 묻지. 당신, 누구야. 나에 대해서 어떻게 그렇게 상세하게 알 수 있지? 나한테 원한이 있는 건가?”

“후후후.”

상천의 물음에 서기종은 대답 대신 웃어 보였다. 그에 상천의 얼굴은 더욱 차갑게 변해갔다.

“조만간 다시 보지. 그때 날 쓰러뜨린다면 자연스레 알게 될 테니. 그때까지 기다리도록.”

그렇게 말한 서기종이 천천히 군마성주가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 모습을 상천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한바탕 치열했던 싸움이 끝난 은남도문은 말 그대로 난장판이었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난무했고 건물 곳곳은 부서져 있었다.

부상을 입지 않은 무인들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부상자를 옮기고 치료하는 데 열중했다.

그 외 은남도문 내전에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던 무인들은 서둘러 정문을 보수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서기종과 헤어진 상천도 천천히 은남도문으로 향했다.

이미 상천이 나타나 군마성 무인들을 상대하는 모습을 본 은남도문 무인들이 저마다 고개를 숙여 상천을 맞이했다.

비록 한 번도 본 적 없고 나이도 어렸지만, 강자에게 보이는 존경의 표시였다.

거기에 결정적인 순간 나타나 자신들을 위기에서 구해주었으니 그런 태도는 당연했다.

낯선 대우에 어색해하던 상천이 정문 앞에 서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에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는 은남도문의 현판이 보였다.

상천이 던진 검은 누군가가 수거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역시. 살아 있을 줄 알았지.”

그런 상천에게 다가온 사람은 나군천이었다.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그의 손에는 현판에 박혀 있던 상천의 검이 들려 있었다.

“무사하셨군요.”

“내 목숨이 생각보다 질기다네. 여기, 자네 검.”

“감사합니다.”

인사와 함께 상천이 나군천으로부터 검을 받아 들었다.

“대단하군. 무인이 자신의 무기를 집어 던질 생각을 하다니. 현판이야 떨어지면 다시 만들어 붙이면 되는 것을.”

“현판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요.”

상천의 말에 나군천이 피식 웃어 보였다.

자세히는 듣지 못했지만 상천이 백룡문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현판이 떨어지는 것을 그냥 두고 보지 못했으리라.

“들어가세. 가 문주가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으니.”

“아, 제 일행이 머지않아 도착할 겁니다.”

“알겠네. 미리 일러두지. 어서 들어가세나.”

나군천의 말에 슬쩍 현판을 다시 한 번 올려다 본 상천이 은남도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군천의 뒤를 따라간 곳에서는 곳곳에 붕대를 감은 가백현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시게. 나 문주에게 얘기 많이 들었네.”

“상천입니다.”

나군천의 말대로 가백현은 상천을 굉장히 반갑게 맞았다. 그에 상천이 공손하게 인사했다.

“앉으시게. 워낙 정신없는 상황이라 제대로 대접하지 못하는 점, 양해 바라네.”

“괜찮습니다.”

“앉지.”

상천은 가백현 나군천 등과 마주보고 앉았다. 처음 나군천과 자리를 함께할 때만큼이나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 문주 이 친구가 그렇게 칭찬을 하더군. 실력이 상당하다고.”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그저 저를 좋게 봐주셔서 그렇지요.”

상천의 말에 가백현이 미소를 지었다. 짧은 대화 몇 마디 나눈 것뿐이지만 성품도 좋아 보였다.

“아직 젊은 나이에 그 정도 실력이면 대단한 거지. 나도 그렇고 나 문주도 그렇고 백룡문주 나이 대에 그 정도 실력에 한참 못 미쳤다네.”

“못 봐줄 정도였지.”

나군천의 말에 가백현이 실소를 흘렸다. 옛 생각을 하니 절로 웃음이 난 것이다.

한바탕 태풍이 몰아쳤지만 두 사람에게는 아직 웃을 여유가 있어 보였다.

아마도 귀령대주와 여상이라는 거물급 고수를 쓰러뜨린 것이 가장 큰 이유인 듯 보였다.

“그래, 비밀통로에서 빠져나온 후 어떻게 되었나? 물론 뭐 이렇게 멀쩡히 돌아올 걸 알고는 있었지만.”

“별일 없었습니다. 그냥 부상을 좀 입어서 백룡문에 가 있었습니다.”

“그랬군. 문도들은 잘 있고?”

“예. 잘 있습니다.”

상천의 대답에 가백현이 무언가 생각난 듯 물었다.

“합산도문의 여식도 백룡문에 있다고 들었는데.”

“예. 잘 있습니다.”

“그렇군. 상황이 이렇게 되니 더 미안해지는군.”

가백현의 말에 나군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을 모두 잃은. 세상에 홀로 남겨진 장여진을 생각하니 두 사람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차후에 도울 일이 있으면 무엇이든 말하게.”

“그러겠습니다.”

가백현의 말에 상천이 미소와 함께 답했다.

“그전에 저 버러지들을 어떻게 처리할지부터 고민해 보고. 무당에서 지원이 도착하려면 얼마나 남았지?”

“아직 열흘은 더 있어야겠지.”

가백현의 대답에 나군천이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무당이 있는 호북성이 가장 가깝다고는 하지만 워낙 땅덩어리가 크다 보니 빨리 달려도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오늘 하루는 어떻게 해서든 버텼어야 했는데.”

가백현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만반의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지만 단 몇 시진 만에 정문이 뚫리고 성벽을 내주고 말았다.

그만큼 준비가 부족했던 것도 있지만 생각보다 군마성의 전력이 강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버틸 수 있을까.”

가백현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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