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은남도문의 정문에서 약 이 리 정도 떨어진 곳.
군마성 무리는 그곳에 멈춰 서 있었다. 군마성주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지만 군마성 무인들은 마치 성난 소가 투레질 하듯 당장이라도 은남도문을 향해 달려들 것 같은 기세를 보였다.
군마성주는 말없이 은남도문을 바라보았다.
마지막 싸움.
그와 동시에 새로운 출발을 알릴 싸움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꿈에 그려왔던 순간.
군마성주는 차오르는 묘한 흥분을 가라앉히며 작게 심호흡을 했다.
“가라.”
“쿠와아아!”
두두두두두!
군마성주의 짧은 한마디에 군마성 무인들이 괴성을 지르며 앞으로 튀어나갔다.
지축을 울리는 소리가 이 리 밖에 떨어져 있는 은남도문까지도 생생하게 전달될 정도였다.
“다들 준비하라!”
가백현의 외침에 은남도문 무인들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오기만 해봐라.
그들은 눈빛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광기를 내비치며 미친 듯이 달린 군마성 무인들은 순식간에 이 리의 거리를 좁혀 은남도문의 코앞에 당도했다.
꽈과광!
그러더니 미친 듯이 자신들의 무기로 은남도문의 정문을 내려찍기 시작했다. 상당한 충격이 전달되었지만 지난 며칠간의 고생이 헛되지 않았는지 정문은 제법 잘 버티고 있었다.
“지금이다!”
쏴아아아!
가백현의 외침에 은남도문의 정문 위쪽 망루에 있던 무인들이 일제히 끓는 기름을 붓기 시작했다.
“크아악!”
아무리 괴물 같은 군마성 무인들이라고는 하지만 끓는 기름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데 버틸 재간은 없었다.
비명을 지르며 은남도문의 정문에서 멀어진 군마성 무인들은 이내 서로의 어깨를 밟으며 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계속 부어라!”
쏴아아아!
은남도문 무인들은 계속해서 끓는 기름을 부었다. 그에 군마성 무인들은 쉽게 벽을 타고 오르지 못하고 무너지기를 반복했다.
그 광경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군마성주의 얼굴에는 살짝 인상이 찌푸려져 있었다.
결국에는 무너질 은남도문이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제법 많은 준비를 해 생각보다 많은 피해를 입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번 싸움은 빠른 시간 안에 최소한의 피해로 최대한의 타격을 입힐 생각이었으나 전면 수정해야 할 것 같았다.
“귀령대주.”
“예.”
“처리해.”
“알겠습니다.”
군마성주의 곁에 서서 아직 나서지 않고 있던 귀령대주가 명령을 받고 바로 움직였다.
그 한 명 나선다고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귀령대주는 아무런 말없이 명령에 따랐다.
은남도문의 끓는 기름 공격에 군마성 무인들은 은남도문의 벽과 정문에서 조금 떨어져 위쪽을 노려보기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반면 벽 위에서 군마성 무인들을 바라보는 은남도문 무인들의 표정에는 자신감과 함께 안도감이 살짝 번져 있었다.
천천히 걸어가던 귀령대주가 서서히 뛰기 시작했다.
점차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군마성 무인들과의 거리를 좁혔고 그 탄력을 이용해 허공으로 뛰어 올랐다.
탁! 탁! 탁! 탁!
귀령대주가 가볍게 군마성 무인들의 어깨를 밟고 앞으로 나아갔다.
타앗!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앞에 있는 군마성 무인의 어깨를 박차고 뛰어오른 귀령대주는 어느새 은남도문의 성벽 위에 있었다.
신기에 가까운 경공으로 벽을 올라온 귀령대주의 등장에 은남도문 무인들은 순간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틈을 귀령대주는 놓치지 않았다.
스윽!
서걱!
“크악!”
순식간에 자신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은남도문 무인을 베어 넘긴 귀령대주는 그것을 시작으로 쉴 새 없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으악!”
“컥!”
귀령대주는 거칠 것이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은남도문 무사들을 마치 벌레 잡듯 손쉽게 베어 넘겼다. 벽 위의 공간이 좁다는 것도 그가 은남도문 무인들을 상대하기 편한 상황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벽 위에서 귀령대주가 혼란을 만드는 틈을 타 군마성 무인들이 다시금 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가지.”
그렇게 말한 나군천이 나서려 할 때 먼저 나선 사람이 있었다.
바로 풍신현이었다.
몸이 근질근질하던 차에 나타난 강적. 나서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 풍신현의 모습에 나군천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렇게 웃고 있을 정도로 상황이 여유가 있지는 않았다.
군마성 무인들이 벽을 기어오르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들을 막을 은남도문 무인들은 귀령대주에게 유린당하고 있었다.
“어쨌든 나서야겠군.”
그렇게 말하며 나군천이 자신의 도를 움켜쥐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귀령대주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도착한 나군천은 때마침 벽 위로 고개를 내민 군마성 무인과 눈이 마주쳤다.
씨익.
그를 향해 미소를 지어보인 나군천이 주저하지 않고 도를 휘둘렀다.
서걱!
벽 위로 올라왔던 군마성 무인의 목은 나군천의 도에 의해 다시 벽 아래로 떨어졌다.
하지만 군마성 무인들은 우후죽순처럼 벽 위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에 나군천의 도가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 속도를 군마성 무인들이 기어 올라오는 속도를 따라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어느새 나군천 주변에는 은남도문 무인들이 아닌 군마성 무인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나군천의 표정이 점차 사나워지기 시작했고 그가 휘두르는 도의 위력도 점차 강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이 신호탄이 되었을까.
아래에서 잠시 전열을 가다듬고 있던 군마성 무인들이 다시금 정문 쪽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끓는 기름을 뿌려도 소용없었다.
그 자리를 다른 무인들이 채웠고 계속해서 정문을 두들겨 댔다.
꽈광! 꽈광! 꽈과광!
아직까지는 잘 버티고 있는 정문이었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언제 정문도 뚫릴지 알 수 없었다.
가백현의 표정이 점차 굳어가고 있었다.
***
조금 더 속도를 높여 은남도문으로 향하던 상천의 표정이 어느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빗나가길 바랐던 불길한 예감이 적중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단순한 예감이 아니라 주변의 공기가 알려주고 있었다.
“아무래도 속도를 더 올려야 할 것 같소.”
상천의 말에 녹엽과 낭호, 화룡도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괜찮겠소?”
“우리는 신경 쓰지 말고 먼저 가십시오. 지금 은남도문 쪽에는 고수 한 명이 아쉬울 겁니다.”
낭호의 말에 상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먼저 가겠소. 너무 빨리 도착하려고 무리하지는 마시오. 화룡.”
“걱정 마세요.”
“아닙니다. 화룡도 우리 신경 쓰지 말고 서둘러 가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낭호는 현 상황을 최대한 냉철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짐까지는 아니지만 지금으로써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일행 중 은남도문에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상천과 화룡 정도.
한 명이 아쉬운 상황이라면 두 사람을 먼저 보내는 것이 당연했다.
“따라올 수 있겠소?”
“저 신경 쓰지 마세요. 너무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따라갈게요.”
화룡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상천이 녹엽과 낭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먼저 가겠소.”
“그러십시오. 저희도 부지런히 뒤따라가겠습니다.”
상천을 안심시키려는 듯 낭호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에 고개를 한 차례 끄덕인 상천이 빠르게 앞으로 달려갔고 곧장 화룡도 뒤따라 달렸다.
“후……. 괜히 따라왔나?”
순식간에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녹엽이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은남도문으로 향하는 상천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처음에는 뒤따르는 화룡을 어느 정도 의식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화룡은 그런 상천에게 뭐라 소리치고 싶었지만 이내 포기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닿기에는 이미 상천이 너무 멀어졌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그저 앞만 보고 달리는 상천의 머릿속에는 한시라도 빨리 은남도문에 도착해야 한다는 사실뿐이었다.
자신이 도착한다고 해서 판도가 크게 달라질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만큼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고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어쨌든 반월도문에게서는 많은 도움을 받았던 것도 있고 백룡문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군마성의 손에 사도련이 무너지는 것을 막아야 했다.
오로지 그 생각 하나로 상천은 내력을 다리에 집중해 속도를 더욱 올렸다.
***
고수 한 명이 판도를 뒤바꿀 수 있음을 귀령대주가 몸소 보여주었다.
물론 재빨리 풍신현이 나서면서 혼란을 일으킨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사이 군마성 무인들은 은남도문의 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절대 틈을 주지 않을 것 같던 은남도문의 방어벽은 너무 쉽게 금이 가기 시작했다.
정문을 부수려던 군마성 무인들은 방법을 바꿔 다른 방식으로 공략하기 시작했다.
벽을 타고 오를 때처럼 서로를 발판 삼아 정문을 뒤덮었다. 정문을 부수기보다는 힘으로 밀어 넘어뜨리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리고 그 방법은 효과를 보았다.
정문을 지탱하고 있는 경첩에도 신경을 쓰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약한 부위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강한 무게가 한 쪽으로 쏠리니 경첩이 한계 상황에 다다라 있었다.
“어떠냐. 이게 고수 한 명의 힘이다. 그리고 너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지.”
먼발치에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군마성주가 곁에 서 있는 서기종에게 말했다. 서기종은 아무런 대답 없이 살짝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그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해보겠느냐?”
군마성주의 말에 서기종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순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말 그대로 스쳐 지나간 것일 뿐, 그의 고개는 이미 끄덕이고 있었다.
“그래. 가라.”
“네.”
짧게 대답한 서기종이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발걸음을 옮기던 서기종이 순간 지면을 박차고 앞으로 튀어나갔다.
귀령대주보다 빠른 속도.
가히 바람과 같이 달려 나간 서기종은 무사들의 어깨를 밟지 않고 그대로 바닥을 힘차게 내딛었다.
날아오른다는 표현이 딱 맞아 떨어지는 모습이었다.
힘차게 발을 굴러 땅을 박찬 서기종은 단번에 성벽 위에 내려앉았다.
성벽 위에 오른 서기종은 지체하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그의 검이 춤을 추기 시작했고 은남도문 무사들은 추풍낙엽처럼 허물어질 뿐이었다.
서기종의 입가에 점차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지금껏 자신이 익혀왔던 검법이 완성된 형태로 구현되고 있었다.
군마성주와 재회하기 전까지는 그저 답답하고 생각했던 대로 되지 않던 초식들이 자신이 생각하기도 전에 먼저 펼쳐졌다.
마치 생명이 있어 살아 움직이는 것같이.
그것이 가져다주는 희열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그리고 그것은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검을 휘두를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