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해가 뉘엿뉘엿 서쪽 하늘로 기우는 시각.
가백현은 긴장한 표정으로 해가 저물어가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명운이 달린 결전이 몇 시진 남지 않은 상황.
그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고 배포가 큰 사람이라 해도 이와 같은 상황에서 긴장하지 않을 재간은 없을 것이었다.
준비할 수 있는 것은 다 한 상태였다.
정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문 뒤에 쇠를 덧대는 작업까지 끝마쳤다.
짧은 기간에 끝내야 하는 상황이라 최대한 많은 인력이 밤샘 작업을 해야 했지만 적어도 적들이 정문을 뚫고 들어오기란 쉽지 않을 거라 자부할 수 있을 정도의 내구도를 가지게 되었다.
그 외에도 벽을 타고 넘어올 것에 대비해 끓는 기름도 준비해 놓은 상태였다.
가장 가까운 무당에서도 곧바로 지원군을 보내겠다는 회신을 받아놓은 상태였다.
최대한 사태의 심각성을 부각해 서신을 보낸 것이 그들의 즉각적인 반응을 이끌어낸 것이다.
“이제 나머지는 운명에 맡겨야 하는 것인가.”
그렇게 중얼거린 가백현이 한쪽에 놓아둔 자신의 도에 시선을 옮겼다.
워낙 좋은 재질로 만들어진 이유도 있지만 오랜 시간 사용하지 않았던 탓에 도의 날은 거의 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날이 밝으면 아니, 어쩌면 자정을 넘긴 순간부터 저 도를 미친 듯이 휘둘러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떤 상황이 오든 가백현은 자신의 애병이 그 수명을 다할 때까지 죽을힘을 다해 싸우겠다고 다짐했다.
나군천은 자신의 방에서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긴장과 흥분을 가라앉히고 정신을 맑게 하는 데에 운기조식만큼 좋은 것이 없었다.
“후우…….”
나군천이 심호흡과 함께 눈을 떴다.
그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안광은 그 어느 때보다 맑고 영롱했다.
그만큼 정신적, 육체적으로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군마성주든 누구든 다 상대해 주마. 살아 돌아갈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것이다.”
나군천이 중얼거렸다.
어찌 보면 무모할 수도 할 수 있는 발언이었지만 그만큼 자신의 몸 상태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다.
“어찌 되었을지 궁금하군.”
문득 상천을 떠올린 나군천이 중얼거렸다.
반월도문에서 처음 봤을 때의 모습부터 비밀통로에서 본 마지막 모습까지가 단편적으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
그리고 지금은 고수 한 명이 아쉬운 상황.
두 가지 상황이 묘하게 맞물리며 나군천의 마음을 울렸다.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이번 싸움에서 목숨을 건지고 승리를 거둔다면 어떤 식으로든 백룡문에 도움을 줄 생각이었다.
“일단 내일 저 밖에 있는 놈들부터 처단한 후에.”
그렇게 중얼거린 나군천이 다시 한 번 길게 심호흡을 했다.
풍신현은 웃고 있었다.
가볍게 몸을 풀며 미소를 짓고 있는 그는 지금 온몸을 휘감고 있는 흥분을 즐기는 중이었다.
적당한 긴장과 적당한 흥분.
그것이 가져다주는 쾌감은 결코 거부할 수 없는 묘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은남도문을, 그리고 중원을 노리는 군마성에는 어쩌면 자신보다 강한 상대가 우글우글할 것이다.
자칫 죽을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풍신현은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무인에게 강한 상대와 싸우다 죽는 것은 결코 치욕스럽거나 두려워할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영광스럽게 생각할 일이고 마다하지 않아야 할 일이었다.
지금 이 순간 풍신현은 은남도문의 군사가 아닌 주먹 하나로 중원을 누비던 젊은 시절의 그로 돌아가 있었다.
“문주님을 만나 새롭게 얻은 이 삶. 문주님과 은남도문을 위해 기꺼이 바치겠습니다.”
그렇게 읊조린 풍신현이 다시 가볍게 주먹을 쥐고는 몸을 풀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군사라는 직책을 벗어던지고 무인으로 돌아오니 온몸에 활력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여전히 그의 입가에는 기분 좋은 미소가 번져 있었다.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각.
은남도문 전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군마성주가 정해준 기한이 이제 막 지난 시간.
언제 적이 몰려와도 하등 이상할 것 없는 시간이었다.
늦은 시간이지만 졸음도 몰려오지 않았다.
오히려 정신은 더욱 또렷해졌고 오감은 더욱 예민해져 갔다.
그렇게 한 시진이 지나고 두 시진이 지났다.
꼬박 밤을 새웠지만, 누구 하나 눈을 감은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동이 틀 무렵.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귀령대주가 선두에 선 군마성 병력들이 천천히 그렇다고 너무 느리지 않은 속도로 은남도문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소식은 빠르게 가백현에게 전달되었다.
소식을 전해 들은 가백현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풍신현 역시 조금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다들 준비하라 이르게.”
“알겠습니다.”
가백현의 명을 받은 풍신현이 밖으로 나갔다.
“이제 시작이군.”
그렇게 말하는 가백현의 목소리가 긴장감으로 가늘게 떨렸다.
***
은남도문을 향해 진군하는 군마성의 모습은 두려움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자신감이 충만하면서 상당한 위압감을 풍기는 그 모습은 보는 이를 질리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가히 중원을 노릴만한 모습이었다.
가백현은 자신의 처소에서 나와 정문 가까이에 있는 망루에 직접 올라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소름 끼치는 그 모습에 가백현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이런 광경이라니. 적이지만 대단하군.”
어느새 가백현과 나란히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나군천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서는 일말의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쫄 줄 알았는데. 의외로군.”
“내가? 이 나군천을 아직도 모르는군.”
가백현의 가벼운 농을 나군천도 가볍게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두 사람은 두려움을 이겨낸 상태였다.
하지만 그들을 제외한 은남도문의 무사들은 달랐다.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를 보는 순간부터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대주, 단주 급 고수들이 돌아다니며 분위기를 다잡고는 있었지만 한 번 퍼져 나간 두려움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것을 가백현이나 나군천이 모를 리 없었다.
잠깐 서로 눈을 마주친 후 가백현이 내력을 실어 말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똑같다! 운 좋으면 살겠지만 어차피 죽을 거 개죽음은 당하지 말도록! 저들은 괴물이 아니라 사람이다!”
가백현의 외침은 문도들의 동요를 조금이나마 줄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때, 나군천이 나섰다.
“은남도문도 별것 아니군. 그래! 그렇게 벌벌 떨다가 적들한테 칼 맞아 죽어버려라!”
비꼬는 듯한 나군천의 외침은 제법 큰 효과를 가져왔다.
아무리 적의 모습을 보고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지만 은남도문의 문도라는 자부심만큼은 마음속 깊은 곳에 강하게 새겨져 있는 그들이었다.
나군천이 그 부분을 건드렸으니 순간 울컥하는 마음이 치솟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발언을 한 사람이 반월도문의 나군천이니 그 화살은 고스란히 군마성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제법이군.”
“이 정도쯤이야.”
“다시 봤어, 나 문주.”
“나도 다시 봤어, 가 문주. 더 대단할 줄 알았는데.”
나군천의 말에 가백현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가 이내 표정을 풀고 피식 웃었다.
“이제 내려가지.”
그렇게 말한 가백현이 높이가 제법 높은 망루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멋 부리기는.”
그런 가백현을 보며 나직이 중얼거린 나군천도 망루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굳게 닫힌 정문을 바라보며 두 사람은 나란히 섰다.
“와라, 군마성.”
가백현과 나군천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동시에 중얼거렸다.
***
선두에 선 군마성주는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단단히 걸어 잠근 은남도문의 정문을 바라보며 걷고 있었다.
표정의 변화는 없었지만 군마성주는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직접 모습을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자신에게 칼을 들이밀고 있었다. 감히.
기한을 준 것은 준비할 시간을 준 것이 아니었다.
도망갈 기회를 준 것이었을 뿐.
나름대로 자비를 베풀었다고 생각했는데 저들은 자신의 호의를 거절했다.
그렇다면 그에 맞는 대가를 치르게 해주는 것이 인지상정.
군마성주는 은남도문 안에 있는 저들을 한 명도 살려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 뒤를 따르고 있는 서기종의 표정 역시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머릿속까지 무덤덤한 건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가백현과 나군천, 그리고 생사를 알 수 없는 상천으로 가득했다.
그들과 싸우는 상상을 수없이 했다.
종무헌을 베기는 했지만 나군천이나 가백현보다 객관적인 실력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
가백현, 나군천과 검을 섞으면 자신의 실력이 어디까지 통할지 궁금했다.
그러나 서기종에게 더 신경 쓰이는 사람은 상천이었다.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이고 이번 싸움에 모습을 드러낼지도 의문이지만 서기종은 머지않아 상천과 싸우게 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 생각했다.
자신보다 어린 나이의 상천은 분명 자신보다 실력이 떨어졌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신을 훌쩍 뛰어넘어 손이 닿지 않는 위치까지 올라 있었다.
자신은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을 무공 수련에 매진했음에도 성장 속도는 더뎠다.
무수히 많은 한계를 느꼈고 벽 하나 넘는 것도 힘에 부쳤다.
그런데 상천은 무슨 복을 타고 났는지 자신은 하나도 넘기 어려운 벽 몇 개를 한 번에 훌쩍 뛰어넘었다.
자존심 상하는 일.
그리고 질투심도 강하게 일었다.
하지만 어차피 백룡문에 입문하여 상천을 문주로 모시기로 한 상황이었기에 그런 생각은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두기로 했었다.
하지만 사부와 재회한 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강한 힘을 얻게 되었고 상천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넘지 못했던 벽을 단번에 뛰어넘었다.
이제는 제대로 붙어 보고 싶었다.
상천과 자신.
둘 중 누가 더 강한지.
그런 상념에 잡혀 있을 때 군마성주의 목소리가 그를 현실로 잡아끌었다.
“긴장되느냐?”
“아닙니다.”
“후후. 그래. 긴장할 것 하나 없다. 어차피 저들은 너의 발아래 무릎 꿇게 될 것이니.”
군마성주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그만큼 자신의 무공에 자신이 있었고 자신의 무공을 이어받은 서기종에 대한 믿음도 강했다.
그런 것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한마디였다.
“네.”
서기종은 굳은 목소리로 짧게 대답했다.
그런 모습이 군마성주에게는 긴장한 것처럼 보였는지 옅은 미소만 지어 보였다.
하지만 서기종은 군마성주의 말은 크게 신경 쓰지 않은 채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쉽게 죽지 않을 거라 믿는다. 나타나라. 너와 검을 섞을 순간만 기다리고 있다.’
상천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근거를 알 수 없는 믿음 섞인 혼잣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서기종은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