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월검제-133화 (133/141)

#133화.

군마성주의 등장으로 싸움이 멈추고 밤이 찾아왔다.

군마성 진영은 그 어느 때보다 고요했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사기가 충천해 있었다.

군마성주는 자신의 처소로 마련된 장막 안에서 귀령대주와 독대를 하고 있었다. 독대라고는 하지만 그의 곁에는 항상 서기종이 있었다.

“의외로군.”

“면목 없습니다.”

귀령대주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하지만 군마성주의 표정은 그를 질타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야. 내 명을 어기고 먼저 도발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겠지. 너를 탓하는 게 아니다.”

“종무헌이 깨어났다는 소식은 들었겠지?”

“그렇습니다.”

“뒤에서 치고 올 병력은 없을 테니 걱정 말고 앞만 보거라.”

군마성주의 말에 귀령대주가 슬쩍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옅은 미소만 짓고 있는 군마성주의 얼굴에 머물던 그의 시선이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서 있는 서기종에게 닿았다.

‘실력이 상당한 모양이군.’

군마성주가 옛 제자와 다시 재회했다는 소식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은남도문을 무너뜨리고 나면 본진을 움직일 게다. 닷새 후에 확실히 처리하도록 하고.”

“물론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한 군마성주가 서기종을 바라보았다.

“가백현 그놈. 한번 부딪쳐 보니 어떻더냐?”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서기종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단 한 번의 충돌로 알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네가 맡아라. 그놈은.”

“…….”

군마성주의 말에 서기종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시 그와 재회한 이후 한 번도 대답을 안 한 적이 없던 서기종이었기에 군마성주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왜 대답이 없느냐?”

“사부님께 부탁이 있습니다.”

“그래. 말해보아라.”

“제가 꼭 한번 상대해 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의지가 담긴 그의 말에 군마성주도 호기심 섞인 눈빛으로 서기종을 바라보았다.

“백룡문주입니다.”

서기종의 대답에 군마성주의 표정이 실망으로 바뀌었다.

“백룡문주라니. 네가 있던 곳의 그 새파란 애송이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군마성주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백룡문. 서기종이 그곳에 있지 않았다면 죽을 때까지 알지 못했을 문파였다.

하물며 그곳의 문주가 강하면 얼마나 강하겠는가.

비록 장세진이 백룡문주에게 목숨을 잃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장세진이 스스로 자멸한 탓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작 상대해 보고 싶은 자가 백룡문주라니.

“왜 하필 그지?”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이겨본 적이 없다?”

“그렇습니다.”

“허허.”

군마성주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다는 것은 자신과 재회하기 전의 일일 터. 지금의 서기종이라면 백룡문주 정도는 쉽게 이길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는 군마성주였다.

그것을 서기종이 모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럼에도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며 제자가 굉장히 감상적이라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백룡문주가 제가 아는 그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그때, 귀령대주가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가장 최근에 상천과 마주한 이가 바로 그였다.

“그는 충분히 강합니다.”

귀령대주의 말에 군마성주의 눈빛이 바뀌었다. 귀령대주는 군마성 내에서도 자신이 인정하는 고수. 그런 그가 강함을 인정했다는 것은 객관적인 실력이 상당하다는 뜻이었다.

“그 정도란 말이더냐?”

“강합니다.”

“지금 어디 있지?”

“반월도문의 비밀통로를 빠져나갔고 가릉이 그 뒤를 쫓은 것으로 압니다.”

“살아 있을 확률은?”

“오 할 이상입니다.”

“음…….”

가릉을 상대로 살아남을 확률이 오 할 이상이라는 것은 지금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으로 생각해도 무방하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살아 있다 한들 멀쩡하지는 않을 게다. 그 짧은 시간 안에 몸을 회복했다 하여도 남은 닷새 안에 나타날지도 의문이고. 일단은 닷새 후를 생각하거라. 사도련을 장악하고 중원 진출의 거점을 마련한 후에 그를 찾아라. 그땐 말리지 않으마.”

“…알겠습니다.”

군마성주의 말에 서기종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하지만 서기종은 닷새 후 이곳에서 상천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

전원 퇴각한 후의 은남도문.

군마성 진영과 마찬가지로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분위기도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는 점이었다.

초반 분위기는 좋았지만 결국 군마성주가 나타나기 직전까지 제법 큰 피해를 입은 은남도문이었다.

전력은 약해졌고 적의 전력은 월등히 높아졌으니 분위기가 무겁지 않을 리 없었다.

그것은 비단 문도들만의 분위기는 아니었다.

밤늦은 시간임에도 잠을 청하지 않고 있는 가백현과 나군천, 풍신현의 분위기 역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누구 하나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심지어 군마성주 앞에서 당당한 모습을 보였던 가백현까지도 지금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군마성주가 준 닷새라는 기간이 굉장히 무겁게 세 사람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은남도문은 사도련의 최후의 보루.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었다.

사실 고민을 할 것도 없었다.

죽더라도 싸우다 죽는 것이 정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세 사람은 고민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것이 머릿속에 확실히 자리 잡지 못한 까닭이었다.

공성인가 정면 대결인가.

군마성주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의 이런 상황을 알고 있을 것이 분명함에도 요지부동인 구파에 도움을 청할 것인가.

뚜렷한 돌파구가 보이질 않았다.

닷새 동안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듯한 이 무력감.

어쩌면 그것 때문에 이러고 있는지도 몰랐다.

“후…….”

침묵을 깨는 긴 한숨. 가백현의 것이었다.

한숨을 쉬지는 않았지만 나군천이나 풍신현 모두 같은 심정이었다.

“들어가겠습니다.”

그때 반월도문 무인들의 상태를 살피고 온 하신이 들어왔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나군천의 옆에 자리한 하신이 물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구파에 도움을 청하시지요.”

하신이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무당파에서 요청을 받아들이고 곧장 출발한다 한들 닷새 안에 이곳에 당도하기란 불가능했다.

“최대한 버티면 됩니다. 굳게 문을 걸어 잠그고 구파의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는 게 최선입니다.”

하신의 생각은 확고했다. 그리고 실상 그것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만약 구파가 자신들의 요청을 거절하기라도 한다면 전멸할 위험이 가장 큰 방법이기도 했다.

“문도들은?”

“목숨을 잃은 이는 몇 있습니다만 살아남은 이 중 큰 부상을 당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신의 대답에 나군천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를 하신의 보고에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여기에 모여서 신의 한수가 떠오를 리 만무하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서 쉬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가백현이 입을 열었다.

그에 무슨 말을 하려는 듯하던 나군천이 다시 입을 다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백현이 느끼고 있는 감정의 크기가 자신이 느낀 것보다 몇 배는 더 클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이겨내는 것은 어디까지나 가백현 본인의 몫.

이럴 때에는 자리를 피해주는 것이 옳았다.

“쉬게.”

나군천과 하신이 먼저 자리를 떴다. 그리고 잠시 더 곁을 지키고 있던 풍신현도 가백현의 손짓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가 떠나고 홀로 남은 집무실에서 가백현은 고뇌에 빠졌다.

다음 날 아침.

늦은 시간에 그대로 집무실에서 잠들었지만 가백현은 동이 트기 직전에 눈을 떴다. 숙면을 취할 수 있을 리가 없는 상태였다.

“기침하셨습니까.”

“들어오게.”

풍신현의 목소리에 가백현이 반쯤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풍신현의 얼굴에도 피로가 가득 묻어났다. 그 역시도 간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까닭이었다.

“구파에 도움을 청하시지요.”

밤새 골똘히 생각한 끝에 나온 결론이었다. 처음에는 하신이 무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쉽게 할 수 있다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상황에 더욱 적절한 판단을 냉철하게 내릴 수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풍신현 역시 최대한 감정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장고를 거듭했고 그 끝에 내린 결론이 이것이었다.

“그들이 요청을 거절한다면? 거절하지 않아도 도착할 때까지 버틸 수 있는 방법은?”

“남은 나흘 동안 짜내면 됩니다.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전서구를 띄우는 것이 우선입니다.”

어제와 달리 눈에 띄게 나약해진 것 같은 모습을 보이는 가백현을 다잡기 위해서인지 풍신현은 더욱 강한 어조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이미 띄웠네.”

그때 나군천이 가백현의 집무실로 들어오며 말했다. 그에 가백현과 풍신현이 크게 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보내려고 했던 것 아닌가? 그렇다면 말 그대로 한시라도 빨리 보내는 게 좋으니까.”

“언제 보내셨습니까?”

“한 시진 전에. 조금 있으면 무당에 당도하겠군.”

“하…….”

나군천의 말에 가백현이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 군사도 부르게. 대책 회의 좀 해야지.”

가백현의 이어진 말에 나군천이 씩 웃으며 집무실을 나섰다.

네 사람은 열띤 회의를 했다.

전날의 무거운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이길 수 있는 방법, 지원군이 오기까지 버틸 수 있는 방법을 최대한 짜냈다.

***

“거의 다 온 건가?”

상천 일행이 은남도문 인근에 도착한 것은 군마성주가 준 기한의 마지막 날 저녁이었다.

상천은 큰 전투가 머지않았다는 것을 직감했다.

상천뿐만 아니라 함께하고 있는 모두가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은남도문에 가까워올수록 숨 막히는 위화감이 온몸을 짓눌렀기 때문이었다.

“금방이라도 뭔가 터질 것 같네요.”

화룡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하나도 이상할 것 없는 주변 풍경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평범한 풍경도 평범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상천은 괜히 조급한 마음이 생겼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이지만 한시라도 빨리 은남도문에 도착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 혼자라면 가능하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상천이 슬쩍 일행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의 실력으로 상천의 속도를 쫓아오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낭호와 녹엽은 처음부터 따라오기가 벅찰 것이고 화룡은 그나마 조금 쫓아오다가 이내 멀어질 것이 분명했다.

잠시 고민하던 상천은 일단은 그들과 속도를 맞춰 이동하기로 했다.

자신의 불길함이 어긋나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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