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꽝!
사방에 울리는 폭음.
풍신현의 주먹과 귀령대주의 검끝이 허공에서 부딪치며 만들어낸 소리였다.
첫합의 결과는 대등.
두 사람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꽝!
멀리서 터진 폭음은 나군천의 귀에도 들릴 정도로 컸다.
그 소리에 나군천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폭음이 났다는 건 고수들 간의 충돌이 있었다는 뜻. 근원지가 자신이 아닌 이상 풍신현 아니면 가백현 쪽에서 난 것이 분명했다.
자존심 상하는 문제.
물론 생사가 오가는 전장에서 그런 것을 따진다는 것이 어찌 보면 어처구니없는 일이긴 하지만 무인으로서 자존심 상하지 않으면 그것도 또 이상한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나군천의 도가 더욱 묵직하게 주변을 휩쓸었다.
부웅!
쩌억!
나군천의 도에 군마성 무인의 목이 날아갔다.
적 하나를 쓰러뜨렸지만 나군천의 얼굴은 더욱 찌푸려지기만 했다.
“이런 잔챙이들이나 상대하려고 온 것이 아닌데.”
중얼거림을 들은 것일까? 그의 앞에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군마성 수석장로 여상이었다.
“오랜만이오.”
“죽은 줄 알았는데.”
여상의 등장이 나군천은 당혹스러우면서도 반갑기도 한 듯했다.
“일전에 관상쟁이가 그리 쉬이 죽을 목숨은 아니라 하더이다.”
여상의 대답에 나군천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한쪽에 쓰러져 있는 군마성 무인의 옷에 도에 묻은 피를 쓱 닦아내었다.
“뭐, 그때 죽지 않아 아쉽기는 하지만. 후우…….”
피를 닦아낸 나군천이 심호흡을 한 차례 하고는 여상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이번에는 제대로 죽여주지.”
“후후. 나 문주 목숨부터 걱정하는 게 좋을 게요.”
여상이 검을 늘어뜨리며 답했다.
서로 죽이겠다고 노려보는 시선이 허공에서 뜨겁게 얽혔다.
풍신현이 귀령대주와 살벌한 일전을 벌이고 있고 나군천이 여상과 재회한 그때.
가백현이 이끄는 은남도문 무인들이 밀물처럼 군마성 진영을 향해 달려들었다.
군마성이 합산도문을 집어삼키기 전까지 그들의 위력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것처럼 은남도문 역시 이번 싸움이 시작되고 처음으로 제대로 된 전력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선두에 선 가백현이 도에 진기를 잔뜩 불어 넣었다. 그리고는 속도를 더욱 올리며 도를 휘둘렀다.
서거걱.
단순히 수평으로 한 번 휘두른 것에 불과했지만 그의 도는 순식간에 군마성 무인 세 명의 목을 베어버렸다.
그것이 신호가 되어 군마성 무인들과 은남도문 무인들이 한데 뒤엉켰다.
여기저기서 기합성과 금속성, 그리고 비명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난전.
그 속에서 가백현은 종횡무진 주변을 날아다녔다.
오랜만의 실전이 가져다주는 흥분이 그의 발걸음을 더욱 가볍게 만들고 있었다.
그의 도가 또 한 번 춤을 췄다.
“억!”
그때마다 군마성 무인들은 단말마 이상의 비명을 지르지 못했다.
‘억!’ 소리 한 번.
그 이상 길게 늘어지는 비명 소리는 적어도 가백현의 도에 목숨을 잃은 자에게서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가백현이 도를 멈추었다.
자신의 앞에 나선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딱 봐도 고수. 하지만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까지 들게 만드는 존재는 아니었다.
“장로급인가?”
“그렇소.”
군마성 이 장로가 가백현의 앞에 나섰다. 평온해 보이는 표정에 하얀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묶지 않은 산발한 머리카락이 신비감마저 만들어내는 인물이었다.
“재밌겠군.”
가백현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밀려오는 흥분에 몸이 살짝 떨리기도 했다.
비무가 아닌 실전에서 실로 오랜만에 만나는 고수. 어쩌면 자신의 실력을 다 보일 수 있을지도 모를 고수의 등장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일찍 죽지 마라. 그럼 죽어서도 편히 눈감지 못하게 저주를 퍼부을 테니.”
그렇게 말한 가백현이 천천히, 하지만 힘 있는 발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군마성과 은남도문의 싸움은 고착화되어 가고 있었다.
첫 충돌 때에는 양쪽 모두에게 제법 피해가 있었지만 지금은 손실보다는 현상 유지에 가까울 정도로 공방이 일고 있었다.
그 와중에 귀령대주를 상대하고 있는 풍신현과 여상을 상대하는 나군천, 그리고 이 장로를 상대하는 가백현 만이 치열한 사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제법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들의 싸움은 끝날 줄 몰랐고, 그런 상황이 계속되다 보니 이제는 즐기고 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그렇지만 어쨌든 끝장을 봐야 하는 싸움인 만큼 그들의 대결도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그러던 그때.
예상외의 변수가 등장했다.
언제나 변수는 존재한다고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등장한 변수는 변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큰, 거대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느릿느릿하게 전장에 당도한 그 변수는 잠시 난전이 벌어지고 있는 눈앞의 상황을 응시했다.
그러기를 잠시.
그가 가볍게 바닥을 한 번 굴렀다.
쿠르르릉!
거대한 소음과 함께 지진이라 느낄 정도의 진동이 전장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 거대한 기운에 군마성의 무인들과 은남도문의 무인들, 심지어 막바지에 이른 싸움을 펼치고 있던 풍신현과 나군천, 가백현도 동작을 멈추고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옆에 서기종을 대동한 군마성주가 서 있었다.
지금껏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미지의 존재.
군마성주가 드디어 나타난 것이다.
***
군마성주의 등장.
누구도 그를 본 적이 없지만 풍기는 기도만으로도 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가백현도 군마성주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그의 등장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가백현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기분 좋은 떨림이 아니었다. 처음 출진할 때의 흥분 섞인 떨림도 아니었다.
약간의 두려움이 가져다주는 그런 떨림이었다.
사도련에서 자신이 최고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리고 누구와 붙어도 지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그런데 처음 보는 군마성주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머리는 아니라고 하는데 몸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것이 가백현은 기분이 나빴다.
직접 부딪쳐 보지 않은 상대에게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 그건 이미 진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버러지 같은 놈들.”
군마성주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고 그 뒤를 서기종이 따랐다.
군마성주는 그냥 걸었다.
그리고 전장에 가까워올수록 은남도문의 무사들은 숨이 턱 막혀왔다.
그만큼 군마성주가 주는 위압감은 상당했다.
모두가 숨죽였다.
전장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단 한 사람의 등장이 수백의 움직임을 멈춰 세운 것이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던 군마성주가 어느 순간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노부가 지금 몹시 기분이 좋지 않다.”
나직한 그의 목소리는 신기하게도 넓은 전장에 있는 모두의 귀에 또렷이 들렸다.
“하지만 넓은 마음으로 아량을 베풀려 한다. 지금 당장 모두 돌아가라. 너희에게 좀 더 살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니 따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군마성주의 말에 은남도문 무사들은 머뭇거렸다.
비록 군마성주의 위압감에 싸우기를 멈췄다고는 하지만 가백현의 명령이 있기 전 함부로 전장을 이탈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가백현이 군마성 이 장로를 지나쳐 군마성주가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군마성주에게 다가가는 가백현은 점차 안정을 찾고 있었다.
잠시 동안 밀려오는 두려움이 몸이 떨렸다고는 하나 사도련을 이끌어온 저력이 있는 만큼 이내 자신을 다스렸다.
가백현은 당당하게 군마성주에게 다가가 마주보고 섰다.
“군마성주?”
“그렇다. 보아하니 가백현이라는 놈인 모양이구나.”
자신을 하대하는 군마성주의 말에 가백현의 눈썹이 한 차례 꿈틀거렸다.
“그래도 제일 낫다는 놈이 이 정도라니. 사도련을 너무 높게 평가한 것인가?”
가백현의 표정 변화를 읽은 군마성주가 조롱하듯 말했다. 그것은 아직까지 사도련을 제대로 무너뜨리지 못한 군마성에 일침을 가하려는 의미이기도 했다.
“높게 평가한 만큼 군마성은 여기서 끝이오.”
가백현이 화를 누르며 말했다. 군마성주를 똑바로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더욱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하하하하하!”
군마성주가 대소를 터뜨렸다. 그에 가백현의 얼굴이 종잇장 구겨지듯 일그러졌다.
웃음을 멈춘 군마성주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리고는 차가운 눈빛으로 가백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가소롭구나. 마음 같아서는 당장 네놈의 목을 따고 싶지만 내가 내뱉은 말이니 기회를 주겠다. 지금 당장 물러가거라. 몰살당하고 싶지 않다면.”
“따보시지!”
가백현이 도를 휘두르며 군마성주와의 거리를 좁혀갔다. 하지만 군마성주는 미소를 지은 채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뒤에서 다른 이가 재빠르게 움직였다.
쩌엉-!
묵직한 소음이 주변에 퍼져 나갔다.
가백현의 도를 막은 것은 다름 아닌 군마성주의 뒤에 서 있던 서기종이었다.
“물러서시지요.”
가백현의 도를 막은 서기종이 표정의 변화 없이 중얼거렸다.
반면 가백현은 내심 놀란 상태였다.
군마성주에게만 집중했지 그의 뒤쪽에 서 있는 서기종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런 그가 비록 모든 힘을 다 실은 건 아니라지만 자신의 공격을 그 짧은 시간에 다가와 막아낸 것에 놀라고 있었다.
하지만 최대한 그런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차분하게 서기종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드리는 기회입니다. 문도들을 생각하신다면 지금 물러나시지요.”
서기종의 한마디에 순간 가백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얼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군마성주와 마주한 순간 문도들에 대한 생각은 까맣게 잊고 있던 그였다.
오직 강한 상대를 앞에 두고 거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문주라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
하지만 또 무인으로서 당연한 모습이기도 했다.
지금 이 순간 가백현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물러날 것인가.
아니면 지금 이 자리에서 끝을 볼 것인가.
이길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모두 이 자리에서 몰살당할 것인가.
스윽.
결국 가백현은 도를 거둬들이고 물러섰다. 일단은 문주 입장에서 문도들을 먼저 생각한 것이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가백현이 물러서자 서기종도 검을 거두며 물러섰다. 그러자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군마성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닷새를 주겠다. 그사이에 도망을 가든 문파 안에 틀어 박혀 공성 준비를 하든 마음대로 해보거라. 닷새다.”
군마성주의 말을 뒤로하고 가백현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입에서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지만 후퇴 명령이나 다름없는 발걸음이었다.
그렇게 한 사람의 등장으로 싸움이 일단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