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말은 그리 했지만 군마성주는 서기종의 마음을 헤아려 속도를 조금 높였다. 말이 조금이지 여느 무림인들이 이동하는 속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 말은 애초 예정보다 군마성주가 은남도문에 더 일찍 도착할 것이라는 뜻이고, 사도련의 운명을 가를 싸움이 머지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
사기가 오른 은남도문은 전투 준비에 한창이었다.
아직 군마성 진영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지만 다들 직감적으로 곧 전투가 벌어질 것이라는 걸 느끼고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저들과 도를 섞을 수 있을 정도로 준비가 된 은남도문 무인들은 가백현의 명이 떨어지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무인들의 그런 마음을 가백현이라고 모르지 않았다.
직접 보지 않고도, 대화를 나눠보지 않고도 그들의 기백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집무실에서 창밖을 내려다보던 가백현은 조용히 서 있는 풍신현에게 물었다.
“지금이 적기 아닐까?”
“적기라 할 수 있지요. 조금 더 늦으면 힘들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렇겠지. 저들이 전열을 재정비하면 그만큼 견고해질 테니.”
“그렇습니다.”
풍신현의 대답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가백현이 입을 열었다.
“나 문주 좀 불러주게.”
가백현과 나군천은 진지한 표정으로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중요한 전투를 앞둔 만큼 두 사람에게서는 그간의 감정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저들이 진을 치고 있는 곳은 근처에 몸을 숨길 곳이 많지 않아. 활용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이 없다고 봐야겠지.”
“어차피 전면전이다. 초반 기세 싸움에서 밀리지 않는 것이 관건이겠지.”
나군천의 말에 가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틈을 만들 수 없을까?”
“음…….”
가백현의 물음에 나군천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하는 말의 의도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처음은 처음이니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고. 지금은 턱도 없을 거다.”
“확실히 성공 확률이 줄어들긴 했겠지. 하지만…….”
“하지만?”
“양동작전을 쓰면 좀 더 수월할 것 같은데.”
“우리가 인원을 두 개 조로 나눌 수 있는 정도가 아닌 건 잘 알고 있을 텐데.”
나군천이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에 가백현이 옅은 미소를 띤 채 손가락을 한 차례 튕겼다.
그러자 집무실 문이 열리며 풍신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와 달리 무복을 입고 있는 그의 모습에 나군천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낯설겠지. 후후.”
그런 나군천의 표정이 재미있다는 듯 가백현이 웃음을 흘렸다.
“은남도문의 군사가 고강한 무공을 지녔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당연하지. 은남도문 내에서도 아는 사람은 나 한 명인데.”
“허허.”
나군천이 허탈하다는 듯 웃었다. 왠지 모르게 속은 기분이었다.
“풍신현은 은남도문의 군사이자 비밀호위대의 대주이기도 하지. 이 정도면 양동작전을 펼치기에 적절하지 않겠나?”
“충분하겠지.”
나군천이 곧바로 대답했다. 나군천은 지금껏 한 번도 풍신현이 무공을 익혔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겨우 일류급에 도달한 수준에 불과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 다 반월도문의 문주인 자신의 눈을 속인 채 실력을 감추고 있었던 것이라면 도움이 되고도 남을 것이 분명했다.
“좋아. 오늘 바로 시작하지. 시간은… 해시 초가 좋겠군.”
“굳이 밤일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이제는 밤에 가나 낮에 가나 기습이 성립이 안 될 텐데. 반월도문과 비밀호위대는 양쪽에서 적들의 시선을 끌어 정면으로 치고 들어갈 본진의 숨통을 틔워주기만 하면 돼. 그런 다음 양쪽 다 본진에 합류하고.”
가백현의 말처럼 이제 기습이라는 것은 통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만큼 은남도문을 지켜보는 눈도 더 강화했을 것이고 기습에 대한 대비도 철저히 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굳이 야간에 전투를 치를 필요는 없었다.
“그럼 준비를 마치고 내일 정오에 움직이는 거로 하지.”
나군천의 말에 가백현과 풍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정이 결정되고 나군천은 반월도문 무인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반월도문이 온전할 때에는 워낙 인원이 많으니 모든 무사를 한자리에 불러 모은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적당한 공간만 있으면 모두가 한자리에 모일 수 있을 정도로 인원이 줄은 상태였다.
머릿수는 적지만 그들 한 명, 한 명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반월도문이 자리 잡고 사도련의 일익으로 성장한 이후 가장 큰 위기를 겪고도 지금까지 살아남은, 운과 실력을 두루 겸비한 무인들이었다.
“곧 끝장을 보러 가게 될 거다.”
반월도문 무인들을 앞에 앉혀 놓고 나군천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감히 문주 앞에서 앉아 있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이번 일을 겪으면서 나군천과 무인들 사이에 있던 높은 벽도 많이 허물어진 상태였다.
끝장을 보러 갈 것이라는 나군천의 말에 반월도문 무인들의 기세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여러 차례 부딪치고 살아남았으니 저놈들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없을 거라 생각한다.”
“물론입니다!”
무인 한 명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에 옅은 미소를 지은 나군천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수많은 동료를 잃었다. 그리고 이번 싸움이 끝나면 지금 옆에 앉아 있는 동료를 또다시 잃을 수도 있다. 그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 다들 뼈저리게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엄숙해졌다. 그 고통과 슬픔을 겪으며 지금까지 온 그들이기에 더욱 그랬다.
“그 슬픔을 또다시 겪지 않으려면. 아니, 최소화하려면 죽기 살기로 도를 휘둘러라. 나 하나가 일당백의 기백을 발휘한다면 가능할 것이다.”
“예!”
나군천의 말에 반월도문 무인들이 기세 충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자!”
나군천을 선두로 반월도문 무인들이 출진했다.
그 시각 풍신현도 비밀 호위대 무인들과 함께 출진했다.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자만심이 보이거나 하지는 않는 모습이었다.
그들도 적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었으며 한순간의 방심과 자만이 얼마나 큰 화를 불러오는지 잘 알고 있었다.
가백현을 은밀히 호위하는 그들이라면 실력은 물론이고 어느 상황에서도 선을 넘지 않는 정신력 또한 그 누구보다 뛰어나야 하며 어려서부터 그렇게 성장해 온 존재들이었다.
서로 다른 분위기의 두 무리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은남도문을 나섰다.
***
반월도문과 비밀호위대의 출진 소식은 곧장 귀령대주의 귀에도 전달되었다.
그들의 머릿수를 보고받은 귀령대주는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나군천과 풍신현이 이끄는 그들의 실력을 무시하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백주대낮에 적은 숫자의 병력만 출진했다는 사실이 의심스러웠다.
‘뭔가 더 있겠지.’
귀령대주는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자신들의 우위에 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절대적 사실.
“다들 준비하라. 적이다.”
귀령대주의 명령에 군마성 진영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반월도문과 비밀호위대가 출진하고 반 시진 정도가 지난 시각. 은남도문의 거대한 정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다시 열렸다.
문이 열리고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가백현이었다.
군마성의 사도련 침공이 시작되고 처음으로 전투에 나서는 그의 모습에서는 비장함과 함께 약간의 흥분마저 보이고 있었다.
“공기가 다르군.”
가백현이 옅은 미소를 지은 채 중얼거렸다.
매일 은남도문 안에서만 지내다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공기를 마시니 온몸의 신경이 살아나는 것 같았다.
문주의 자리에 앉고 평화가 지속되면서 몸은 편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항상 이런 상황을 그리워했던 가백현이었다.
결국 그도 천상 무인이었다.
“가자! 전속력으로 달린다! 싹 쓸어버리자!”
“와아아!”
가백현이 선두에서 달리자 은남도문 무인들도 우렁찬 함성과 함께 엄청난 기백을 뿜어내며 뒤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은남도문에서 제법 많은 수의 병력이 쏟아져 나왔다고 합니다!”
척후의 보고를 들은 귀령대주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전면전을 치를 생각이군. 뒤는 생각하지 않아. 이렇게 나오면 곤란한데…….”
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면전이 벌어져 사도련을 전멸 시킨다 하더라도 제법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덤비는데 안 받아줄 수는 없지. 전투다. 한 놈도 살려두지 말도록.”
“공격입니다!”
귀령대주의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또 다른 척후의 다급한 보고가 이어졌다.
나군천과 풍신현이 서로 다른 곳에서 공격을 감행한 것이었다.
“잔머리 좀 굴리는군.”
그렇게 중얼거린 귀령대주가 사나운 표정을 지은 채 검을 들고 발걸음을 옮겼다.
나군천이 이끄는 반월도문 무인들은 자신의 안위는 생각지 않고 도를 휘둘렀다.
어차피 죽을 각오로 뛰어든 이상 눈앞의 적을 베어 넘기는 것만 생각할 뿐이었다.
잔뜩 독이 오른 눈빛.
살기가 가득 담긴 도.
그런 그들의 공격에 괴물 같기만 했던 군마성 무인들도 하나둘 씩 쓰러져 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군마성이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니었다. 갑작스런 공격이었지만 일전의 경험 때문인지 곧바로 사태를 수습하고 반월도문 무인들의 상대하고 있었다.
지난번 공격만큼 수월할 것이라 생각지는 않았지만 예상 외로 더 빡빡한 상황에 나군천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원래 이 정도였지.’
한 번의 기습 성공.
큰 피해를 입힌 것은 아니라 하나 충분한 자신감을 얻는 효과를 얻은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 자신감 때문에 원래 그들의 실력을 잠시나마 잊고 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군마성의 방어벽은 제법 견고했고 반격은 날카로웠다.
‘뭐하는 거냐, 가백현!’
이를 악물고 도를 휘두르며 나군천은 정면을 맡은 가백현을 떠올렸다.
반대편에서 풍신현이 이끄는 비밀 호위대가 고군분투하고는 있다고 하나 정면을 맡은 가백현이 제때 합류하지 않는다면 양쪽 다 각개격파당하고 말 것이 분명했다.
“버텨라! 그리고 쓰러뜨려라!”
나군천이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치며 눈앞의 군마성 무인 한 명을 두 동강 내었다.
반면 풍신현의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실상 그의 실력이라면 문파의 문도 한 명을 쓰러뜨리는 데 주먹질 한 번이면 충분했다.
하지만 군마성의 무인들은 확실히 달랐다.
그의 주먹질 한 번에 쓰러지기는커녕 피한 후 반격을 하기도 하고 몇 번의 공격에야 겨우 쓰러지기도 했다.
그런 상황이 익숙지 않을 수 있으나 풍신현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표정 변화 없이 주먹을 휘두를 뿐이었다.
자신들을 이끄는 수장이 그런 모습을 보이니 그 뒤를 따르는 비밀호위대 역시 상대의 대응에 전혀 동요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때의 쥐새끼로군.”
풍신현의 앞에 귀령대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납게 구겨진 그의 표정에서 지금 그의 심경을 읽을 수가 있었다.
“후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던 풍신현이 그런 귀령대주를 바라보며 실소를 흘렸다.
자신을 비웃는 것 같은 풍신현의 모습에 귀령대주의 눈썹이 한 차례 꿈틀거렸다.
“그대인가? 천중도문의 종 문주를 의식불명으로 만들었다는 자가?”
“그렇다.”
귀령대주가 금세 침착함을 되찾으며 대답했다.
“먼저들 가도록.”
풍신현의 명령에 비밀호위대가 적들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비밀호위대가 자리를 피하고 군마성 무인들 역시 두 사람 가까이 접근하지 않았다.
비밀호위대도 그렇고 군마성 무인들도 그렇고 각각 귀령대주와 풍신현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제대로 한 판 뜨겠어.”
풍신현이 들뜬 목소리로 말하며 천천히 몸을 풀었다. 어깨를 슬슬 돌리기도 하고 주먹을 쥐었다 펴기도 하면서.
그 모습에 귀령대주 역시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돌리면서 예열을 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보았다.
둘 중 하나는 죽어야만 싸움이 끝날 것이란 사실을 안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목숨을 잃는 이가 자신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시작 전부터 지고 들어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것은 전체의 사기 문제이기도 했지만 그 전에 충분히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 만한 실력을 가진 고수들의 자존심 문제였다.
몸을 풀던 두 사람이 동시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파박!
팟!
그러더니 순식간에 기수식도 취하지 않고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