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월검제-130화 (130/141)

#130화.

풍신현이 비밀호위대 대원들을 이끌고 은밀히 은남도문을 나선 시간.

나군천은 수하들을 데리고 적진과 멀지 않은 곳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달빛이 밝군.”

나군천이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은밀하게 일을 처리해야 하는 입장에서 달빛이 밝은 것은 치명적인 장애가 될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지.”

달이 밝은 것은 인력(人力)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노릇. 나군천은 동요하지 않고 턱 밑으로 내려놓았던 복면을 눈 밑까지 치켜 올렸다.

“가자. 한 놈이라도 더 죽이고 가는 거다.”

그 말에 반월도문 무사들도 복면을 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복면을 착용한 것을 확인한 나군천이 선두에 서서 움직였다.

“죽기 좋은 날이군.”

앞서 달리며 나군천이 중얼거렸다.

같은 시간.

풍신현과 가백현의 비밀호위대는 나군천과는 반대 지점에 있었다. 역시나 검은 무복을 입고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그들에게서는 나군천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여유가 느껴졌다.

“달이 밝군.”

풍신현도 너무나 밝은 달에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반월도문은?”

“움직인 듯합니다.”

“그래? 그럼 우리도 슬슬 활동 개시해야겠지. 다들 준비됐나?”

풍신현의 물음에 대원들은 대답대신 눈빛을 빛냈다.

“은밀하고 빠르게. 그리고.…….”

잠시 말끝을 흐린 풍신현이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잔인하게 간다.”

파밧!

그 말과 함께 풍신현과 대원들이 땅을 박찼다.

서걱! 서걱!

“큭!”

“컥!”

“허억!”

나군천과 반월도문 무사들은 말없이 앞으로 달려 나가며 닥치는 대로 적들을 베어 넘겼다.

그들이 은남도문을 빠져 나온 것도 알고 있었고 야습을 하기에는 달이 밝다는 점이 군마성 진영에 약간의 방심을 가져왔고 나군천이 그 틈을 제대로 파고들어 제법 효과를 보고 있었다.

아직 대주급 이상의 무인들은 나서지 않은 상황.

그들이 나타나 앞길을 막기 전에 한 명이라도 더 머릿수를 줄이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상하군.’

적들을 향해 도를 휘두르면서도 나군천은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야습이라고는 하지만 급습한 지 일각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순식간에 적진은 혼란에 빠졌고 이 정도 혼란이라면 대주급 이상의 무인들이 나타나 전열을 정비해야 했다.

헌데 군마성 무인 스무 명 이상이 쓰러진 상황에서도 그들 중 한 명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위험해.’

나군천은 직감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도를 휘두르던 자리에 멈춰 선 나군천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와 함께 온 반월도문의 무사들은 지난 패배로 인한 분노와 지금 상황의 승리에 도취되어 점점 더 적진 깊숙이 들어가고 있었다.

‘함정일 수 있다.’

“모두 빠져나간다!”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군마성 무사를 향해 도를 휘두르며 나군천이 수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나군천은 지금 이 상황이 함정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어느 정도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자신들을 적진 깊숙이 몰아넣는다면 한 번에 몰살당할 수 있었다.

군마성은 충분히 그 정도 힘이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들 앞에 대주급 이상의 실력자들이 나타나지 않은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풍신현을 중심으로 한 비밀호위대 때문이었다.

은밀하게 적진에 파고든 그들은 나군천과 반월도문 무사들의 움직임에 호흡을 맞추며 뒤에서 그들이 수월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었다.

기습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주급 이상이 움직였지만 그들의 앞을 막아선 것은 풍신현과 비밀호위대였다.

그 덕분에 나군천과 반월도문 무사들은 생각보다 손쉽게 제법 많은 숫자의 적을 도륙할 수 있었다.

그것을 모르는 나군천은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후퇴를 명령한 것이었다.

나군천의 명령에 반월도문 무사들은 아쉬움을 삼킨 채 빠르게 흩어지며 적진에서 빠져나왔다.

우드득!

풍신현의 양손이 군마성 대주 한 명의 목을 비틀어 꺾었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뒤에서 당한 기습에 목숨을 잃었다.

[대주님, 반월도문이 후퇴했습니다.]

그때 들려온 수하의 전음에 풍신현이 고개를 한 차례 갸웃거렸다.

“이 정도 지원을 해주었으면 좀 더 많은 적들을 칠 줄 알았는데… 나 문주. 신중한 사람이군.”

그렇게 중얼거린 풍신현이 무복에 묻은 핏물을 살짝 털어내고는 복면을 벗었다.

“역시 이런 건 쓸 게 못 되는군. 갑갑해.”

벗은 복면을 움켜 쥔 풍신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돌아간다.”

그와 동시에 풍신현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연기가 흩어지듯 사라졌다.

***

“다녀왔습니다.”

“오래 걸리진 않았군.”

자지 않고 기다리고 있던 가백현은 돌아와 인사하는 풍신현을 한 번 훑어보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크게 다치거나 하진 않은 듯했다.

“어렵진 않았습니다.”

“후후.”

풍신현의 대답에 가백현이 실소를 흘렸다. 사도련을 초토화시키고 은남도문 앞에 버티고 서 있는 군마성을 상대로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가백현 입장에서 풍신현의 그런 배포와 자신감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은남도문 내에서 풍신현이 비밀호위대 대주라는 것을 아무도 모르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자신의 기척을 감추고 은밀하게 움직이는 데에는 가히 최고라 할 수 있었다.

그런 그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짧은 시간의 기습은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 문주는?”

“적당히 치고 빠졌습니다.”

“그래?”

“예. 좀 더 칠 줄 알았는데 중간에 빠졌습니다. 덕분에 오랜만의 여흥을 놓쳤습니다.”

오랜만의 전투라 미처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풍신현의 모습에 가백현은 가볍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

“고생했을 테니 가서 쉬게. 여흥은… 조만간 지겹게 느끼게 될 테니.”

“알겠습니다.”

풍신현이 돌아가고 나서도 가백현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

동이 텄다.

일각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군마성이 입은 피해는 약 마흔 명 정도였다.

전체 전력에 비하면 크지 않은 숫자일 수 있었지만 생각보다 큰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거기에는 풍신현과 비밀수호대의 역할이 컸다.

그들의 손에 목숨을 잃은 대주급 이상 고수의 숫자만 다섯 명이었다. 만약 풍신현과 비밀수호대가 나군천과 같은 목적으로 적진에 뛰어들었다면 더 많은 숫자가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리적인 타격도 생각보다 컸지만 정신적인 부분에서의 타격이 더 컸다.

첫 번째 이유는 야습을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 피해를 입었다는 점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나군천과 반월도문이 은남도문을 빠져나온 것은 알고 있었지만 풍신현과 비밀호위대의 행보는 전혀 몰랐기 때문이었다. 세 번째 이유는 그럼에도 아직까지 군마성에서는 풍신현과 비밀호위대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은남도문의 부대라는 것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군마성 진영이 약간의 혼란에 빠져 있던 그때, 뒤늦게 반월도문의 비밀통로에서 빠져나온 귀령대주를 비롯한 군마성의 나머지 병력이 합류했다.

좀 더 빨리 합류할 수도 있었지만 비밀통로 안에서의 전투로 귀령대주는 물론이고 많은 이들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상태였기에 합류가 늦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수석장로는 나군천의 도에 목숨까지 잃은 상황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본진에 합류해 간밤의 야습 소식을 들은 귀령대주는 분노와 함께 짙은 아쉬움을 드러냈다.

조금만 더 빨랐으면 이런 일을 겪지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과 군마성이라는 이름을 걸고 있음에도 야습에 이 정도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에서 오는 분노였다.

하지만 그런 분노와 아쉬움에 오래 잡혀 있을 시간이 없었다.

군마성주가 오고 있는 상황.

그가 도착하기 전까지 사태를 수습하고 분위기를 다잡아 놓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었다.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귀령대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진에 합류하자마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사태 수습에 심혈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

아무리 군마성주라 하여도 천중도문의 정예를 상대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그의 몸에 난 상처들은 고작 생채기 수준에 불과했지만 만약 서기종이 곁에서 거들지 않았다면 버거웠을 것이었다.

그 덕에 사도련은 최악으로 치달을지 모를 상황을 조금이나마 미룰 수 있었다.

한편, 군마성주가 나섰을 것으로 추측한 상천 일행은 은남도문으로 향하는 속도를 높였다. 비록 추측에 불과한 일이지만 적어도 가능성을 알려 대비를 하는 것과 아무 대비도 하지 못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운이 좋아 군마성주의 존재를 눈으로 확인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렇게 되면 오히려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어쨌든 지금은 아무 생각 하지 않고 은남도문에 도착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상천 일행은 부지런히 발걸음을 재촉했다.

***

단 한 번의 기습 작전이 군마성에 큰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들의 긴장감과 경계심을 높여주는 역할을 했다. 이것은 분명 사도련에게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작용한 부분도 분명 있었다.

적어도 적들에 대한 공포심을 줄이고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올리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하여도 전면전이 벌어지면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는 상황인 것은 분명했다. 게다가 군마성주가 합류하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는 변수도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정한 변수는 존재 자체를 알고 있는 군마성주가 아닌 아직 존재가 드러나지 않은 서기종이었다.

종무헌을 쓰러뜨린 서기종의 힘.

비록 그가 사도련의 문주들 중 가장 떨어지는 실력을 가진 이라고는 하지만 일문의 문주를 이길 정도의 경지라면 단순한 변수가 아니라 이 싸움의 승패를 좌우할 결정적인 변수가 될 수 있었다.

군마성주와 동행하고 있는 서기종은 점차 조급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직접 몸으로 확인했기 때문인지 서둘러 군마성 진영에 합류하고 싶은 마음이 커져만 갔다.

그곳은 전장. 그리고 상대는 사도련의 최고라는 은남도문.

좀 더 강한 상대를 갈구하는 마음이 서기종으로 하여금 더딘 속도를 못 견디게 만들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챈 군마성주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조급한 게냐?”

최대한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있던 서기종은 단번에 군마성주가 자신의 마음을 읽어내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조급하겠지. 강한 힘을 맛본 이가 계속해서 그것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하지만 그것에 너무 빠지면 되레 독이 되는 법. 힘에 취하는 걸 항상 경계해야 하느니라.”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내 제자이니 잘하리라 믿는다.”

군마성주의 목소리에는 서기종에 대한 굳은 믿음이 묻어 있었다. 서기종 역시 그 믿음에 부합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굉장히 간사한 법.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 한구석에서는 지난 세월 그가 겪었던 것들과 맞물려 힘에 대한 갈망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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