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종무헌이 죽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은 생각보다 빠르게 퍼져 나가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위력을 보인 군마성주의 손에 백 명이 넘는 천중도문의 정예 대부분이 목숨을 잃거나 심각한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물론 거기에는 종무헌을 이김으로써 자신감을 얻은 서기종의 역할도 한몫했다.
사실 서기종은 군마성주를 다시 만나 힘을 얻은 후에도 군마성과 자신이 함께한다는 사실과 백룡문에서 상천과 함께 했던 시간 사이에서 고뇌하는 시간이 많았다.
과연 자신이 지금 이 순간 걷고 있는 길이 옳은 길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종무헌을 쓰러뜨린 순간 사라져 버렸다.
죽은 줄 알았던 사부와 재회했으며 무인으로써 항상 꿈꿔오던 강한 힘을 얻었다.
그 모든 것들이 현재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판단력을 흐려놓았고 그저 조금 더 이 시간과 상황을 누리고 싶다는 강한 욕망을 키워놓았다.
군마성주와 서기종 두 사람의 손에 천중도문의 무인들이 모두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군마성주의 으름장에 마을 사람들 모두 이곳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함구함으로써 사도련의 일익이라던 종무헌은 그렇게 쓸쓸한 최후를 맞게 되었다.
***
상천과 화룡, 녹엽과 낭호는 백룡문을 떠난 지 열흘 만에 소양현에 도착했다.
네 사람은 마을에 도착했을 때부터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에게서는 낯선 사람들이 나타났을 때 보이는 반응 외에 특별한 점을 찾지 못했다.
“이상하군. 분위기가 이상해.”
“그러게. 뭔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낭호의 말에 녹엽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대답했다.
“천천히 알아보기로 하고 일단 어디 가서 식사라도 합시다. 정오도 지났는데.”
“그러자고.”
상천의 말에 녹엽이 자진해서 앞장서 식사를 할 객잔을 찾기 시작했다.
잠시 후 네 사람이 찾아 들어간 객잔은 공교롭게도 며칠 전 군마성주와 서기종이 매일 같이 식사를 하던 그곳이었다.
객잔 주인은 며칠 만에 또다시 검을 찬 무림인이 찾아오자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그들을 맞았다.
“무엇을 드릴까요?”
“교자하고 소면으로 준비해 주시오.”
“네. 알겠습니다.”
간단한 주문을 받은 객잔 주인이 서둘러 주방으로 들어갔다.
“확실히 이상하긴 하네요.”
객잔에 들어오면서부터 주변을 살핀 화룡이 말했다.
그녀의 말처럼 객잔에 있는 사람들이 상천 일행을 힐끗힐끗 쳐다보고 있었다.
낯선 사람을 신기하게, 혹은 경계심을 담아 바라본다기보다는 마치 그들에게 겁을 먹고 눈치를 보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러게. 음식이 나오거든 주인에게 몇 가지 좀 물어야겠소.”
궁금하면 물어보면 될 일. 상천의 말에 네 사람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곳에서 은남도문까지는 못해도 이십 일은 걸릴 겁니다. 잠을 줄여가며 속도를 높인다면 보름 정도로 단축시킬 수는 있겠지만 보름이면 무슨 사단이 나도 충분히 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지금까지도 저들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으니 우리가 도착하기 전까지 이 상태가 지속되길 바라는 수밖에 없겠지.”
네 사람의 힘이 얼마나 도움이 되겠느냐마는 작은 힘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달려가는 입장에서는 그 전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현 상황에 대한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기다리는 사이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주인장, 뭐 좀 물어봅….”
객잔 주인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는 서둘러 음식만 내려놓은 채 자리를 피했다.
“음?”
그런 객잔 주인의 반응에 의아해하는 찰나, 한쪽 구석에서 불안한 눈빛으로 자신들을 슬쩍슬쩍 쳐다보고 있는 점소이가 화룡의 눈에 띄었다.
“저 아이한테 한번 물어볼까요?”
화룡의 말에 모두가 음식을 먹다 말고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상천 일행의 시선이 자신 쪽으로 향하자 점소이는 다급히 자리를 피했다.
“반응을 보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건 확실한 것 같네요.”
“우리를 보고 저리 불안해할 정도면 이곳에서 제법 큰 싸움이 있었던 건 아닌가 싶소. 낯선 이가 아닌 무림인에 대한 경계인 거지.”
“하지만 마을에서 어떤 싸움의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어요.”
화룡의 대답에 상천도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마을에 들어서면서 이상한 느낌은 받았지만, 그 어떤 싸움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당연한 것이 마을 사람들이 서둘러 그 흔적을 없앴기 때문이었다.
마을 사람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에게 지독한 공포를 안겨주었던 그 흔적을 하루라도 빨리 지워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회피하고자 하는 본능에서 나온 행동이 결과적으로 군마성주를 도운 셈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 이곳에서의 싸움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그렇긴 하지만…….”
화룡의 말에 녹엽이 뭔가 말을 이으려 했지만 이내 입을 다물었다.
녹엽의 머릿속에서도 정확하지 않은 추측만 무분별하게 떠다닐 뿐이었다.
“무의미하지 않소.”
잠시 뭔가 생각하던 상천이 화룡의 말에 반박하고 나섰다.
그에 세 사람은 상천의 말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것도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지만… 만약 이곳에서 싸운 이들이 천중도문이라면?”
“하지만 천중도문은 문주가 쓰러진 상황이에요. 아직 회복했다는 소문도 돌지 않았고요. 그런 상황에서 섣불리 움직였을 리가 없어요.”
“소문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퍼져 나가야 하는 법이요. 세상 모든 일이 소문으로 번질 리도 없고. 만약 천중도문의 문주가 정신을 차렸고 은남도문으로 향하는 중이었다면?”
“그게 사실이라면 이곳에서 싸움이 벌어졌을 수도 있겠군.”
낭호가 상천의 말을 받았다. 그에 상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이곳은 귀주성과 광서성으로 이어지는 관도의 시작점이오. 반대로 말하면 광서성의 천중도문이 은남도문으로 향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지점이라는 뜻이지.”
“그렇다면 적의 일부가 이곳에서 그들을 기다렸다는 뜻일까요?”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보오.”
“하지만 나타날지 나타나지 않을지 모를 천중도문을 대비해 전력을 나눈다? 만약 그러다가 은남도문 쪽에서 대대적인 공격을 가한다면?”
녹엽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하지만 이어진 상천의 어투는 단호했다.
“지금까지의 행보로 봐서는 저들이 은남도문을 상대하고도 남을 충분한 위력을 가졌으니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그만큼 자신감이 크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일정 부분 피해를 입었다고는 하나 천중도문이 은남도문에 힘을 보태기 위해 가고 있을 수도 있겠군요.”
화룡의 말에 상천이 진중한 얼굴로 답했다.
“부디 그러길 바라고 있소.”
“그 말은 천중도문의 지원군이 은남도문에 당도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뜻인가요?”
“…….”
상천은 그렇다 아니다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침묵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무리 적이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일부만으로 천중도문을, 그것도 정예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낭호도 침착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하지만 상천의 생각은 그 이상으로 머물러 있었다.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겠지. 만약…….”
“만약?”
녹엽이 말끝을 흐리는 상천을 재촉했다.
“이 싸움에 군마성주가 있었다면?”
이어진 상천의 말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지금껏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군마성주.
만약 그가 나타났다면 상천의 말처럼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훨씬 컸다.
“지금까지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군마성주가 설마…….”
아닐 거라 믿고 싶은 것인지 진짜 믿고 있는 것인지 모를 말을 내뱉었다.
“나라면 모습을 드러냈을 것이오. 저들의 목적은 중원이고 은남도문은 중원으로 향하는 교두보나 다름이 없소.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도 사도련을 인정해 주는데 그런 사도련을 장악하고 거점을 마련한다는 것은 중원 진출의 시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런 중요한 순간에 군마성주가 함께하지 않을 이유도 없겠지.”
상천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다시 모습을 드러낸 군마성의 위력은 널리 퍼진 상태.
그들을 이끌고 있는 군마성의 성주라면 그 실력이 얼마나 대단할지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그렇게 서로의 추측을 가지고 토론을 하는 사이 주문한 음식은 모두 식어 있었다.
하지만 먹어야 하기에 꾸역꾸역 입에 밀어 넣은 네 사람은 잠시 몸을 쉬게 할 생각으로 자리를 옮겼다.
***
단단히 채비를 마친 나군천은 날이 아직 어두워지지 않았음에도 수하들을 이끌고 은남도문을 나섰다.
기습 작전을 펼치기에는 어두운 것이 훨씬 나았다.
나군천 역시 그것을 모르지는 않을 터.
하지만 어차피 적들도 은남도문의 상황을 훤히 꿰뚫고 있으니 어둡든 밝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나군천은 서두르지 않았다.
수하들을 데리고 천천히 적진을 향해 가고 있었다.
어차피 은남도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자신들의 행보는 적들의 귀에 모두 들어가고 있을 터.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어느 시점에 어떻게 공격을 가해야 효율적으로 적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가 하는 부분이었다.
겉으로는 느긋했지만 나군천의 머리는 굉장히 복잡하고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나군천과 반월도문 무사들을 은남도문 밖으로 내보낸 가백현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창밖을 내다보는 가백현의 얼굴에 그런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비록 나군천과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하나 선의의 경쟁을 펼쳐온 입장에서 그만 혼자 사지로 내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처소에서 잠시 동안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가백현이 무언가 결심한 듯 밖으로 나갔다.
드넓은 대전에 단 두 사람만 있었다.
한 사람은 가백현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풍신현이었다. 평소와 달리 풍신현은 가벼운 무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다들 준비는 됐나?”
“물론입니다.”
풍신현이 가벼운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어딘지 모르게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전면에 나서서는 안 된다. 최대한 은밀하게. 반월도문의 숨통을 틔워주는 역할이다. 괜히 전면에 나서서 나군천의 기분을 상하게 할 필요는 없다.”
“그 정도로 괜찮겠습니까?”
“충분하다. 그 정도면 나군천이 활개 치기 딱 좋은 조건이지.”
비록 문파를 뒤로하고 피신해 온 패장이라고는 하지만 가백현은 나군천을 믿었다.
문주로서도 그렇고 무인으로서도 나군천은 나무랄 곳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이 두 번의 실패를 용납할 리 없었다.
“어둠이 내려앉을 시간이다. 출진하라.”
“네! 다녀오겠습니다.”
힘차게 대답한 풍신현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포권을 취한 후 대전을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