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그 말 한마디가 가져온 파장은 상당했다. 천중도문의 문도들이 동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종무헌마저도 미세하게 몸이 떨릴 정도였으니 다른 이들의 동요가 심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자신들의 앞을 막아섰을 때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의 입에서 정체를 듣고 나니 종무헌은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넘을 수 있을 것인가?’
이미 한 번 패한 적이 있는 종무헌이었다. ‘그자도 이기지 못했는데 과연 군마성주를 이길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전투 준비!”
종무헌의 외침에 천중도문의 무사들이 일제히 도를 쥐었다. 소수를 상대로 다수가 밀어 붙이는 것이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상대는 군마성주이기에.
그때, 서기종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천중도문의 문주께서는 저와 한번 붙어 보시지요.”
서기종의 말에 종무헌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그대는 누구지?”
“제자입니다.”
서기종의 대답에 종무헌의 얼굴이 구겨졌다. 아무리 군마성의 힘이 강하다고는 하나 자신보다 어려보이는 군마성주의 제자가 자신을 도발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저를 이기신다면 천중도문이 가는 길을 막지 않겠습니다.”
이어진 서기종의 말에 종무헌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서기종은 진심으로 한 말이었지만 종무헌에게 그 말은 도발로 들릴 뿐이었다.
“좋다. 네놈을 죽이고 군마성주의 목도 쳐내겠다.”
종무헌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그러자 수석 장로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다가와 말했다.
“침착하셔야 합니다.”
“알고 있다. 난 과오를 되풀이하는 머저리가 아니다.”
그렇게 대답한 종무헌이 도를 쥐고 앞으로 나갔다.
“덤벼라.”
종무헌의 말에 서기종은 침을 한 번 삼켰다. 꿈에도 그려본 적 없는 지금의 상황. 서기종은 조금씩 흥분되기 시작했다.
‘빠르고 날카롭다. 제법 경험도 있는 것 같군. 그냥 애송이가 아니었어.’
종무헌이 서기종의 검을 피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자신의 목숨을 거두려는 검이 눈앞에서 춤을 추고 있는데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서기종의 공격이 큰 위협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가벼워.’
종무헌이 진기를 끌어 올렸다.
한껏 진기를 머금은 종무헌의 도가 묵직하게 허공을 갈랐다.
우웅!
그와 함께 서기종의 검이 진동했다. 그 역시 검에 잔뜩 진기를 불어 넣은 상태였다.
꽈릉!
검과 도가 아닌 서로의 진기가 충돌하며 우렁찬 비명을 질었다. 손이 얼얼할 정도의 충격이 전해졌지만 두 사람 모두 자신의 병기를 놓치지는 않았다.
‘제법이군.’
종무헌의 두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와 동시에 묵직한 도를 사용하는 무인답지 않은 부드럽고 가벼운 보법이 펼쳐졌다.
‘온다.’
서기종이 검을 고쳐 잡았다.
종무헌의 다리가 어지럽게 움직이며 자신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현혹되지 말자. 어깨. 어깨를 본다.’
서기종은 종무헌의 다리가 아닌 어깨를 보았다.
거리가 지척에 이르렀건만 그의 어깨는 아직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지금!’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종무헌의 어깨가 움직였고, 서기종은 재빨리 보법을 받으며 검을 뻗었다.
쩡!
“쳇!”
종무헌이 입맛을 다시며 다시 거리를 벌렸다.
나름 회심의 일격이라 생각했건만 서기종은 어렵게 그의 공격을 무마시켰다.
전체적인 싸움의 양상도 그러했다.
종무헌이 전체적인 흐름을 주도하고 있었고 서기종은 그것을 받아내는 데 급급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방적으로 서기종이 밀리는 양상도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종무헌에게 유리한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서기종은 무리하지 않았다.
버티면서 상대의 패를 읽어내는 데 주력했다. 종무헌이 수많은 공격들이 파생된다지만 어쨌든 근간은 그가 익히고 있는 도법에 있었다.
그것을 읽어낼 수 있다면 승기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게다가 급한 쪽은 종무헌.
시간이 길어질수록 결국 유리한 쪽은 서기종이었다.
꽝!
종무헌의 공격이 더욱 묵직해졌다.
어지간한 힘으로는 그의 공격을 받아내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번 공격도 막아내자 종무헌의 서기종의 속내를 읽을 수 있었다. 비록 죽을 고비를 넘겼다지만 그는 천중도문의 문주이자 강호 무림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무인이었다.
‘버틴다 이거지? 그럼 더 이상 못 버티게 해주마.’
종무헌이 더욱 진기를 끌어올렸다.
진기를 머금은 종무헌의 도가 태산이라도 가를 듯 위력적으로 꿈틀대기 시작했다.
‘피해야 한다.’
서기종이 다급히 보법을 밟았다.
하지만 종무헌은 그를 놔줄 마음이 없었다.
종무헌이 신묘한 보법을 밟으며 서기종의 움직임을 따라붙었다. 마치 그가 어떻게 움직일지 알고 있다는 듯 정확히 방향을 예측한 움직임이었다.
‘끝이다, 이놈!’
끈질기게 따라붙은 끝에 서기종의 움직임을 잡아낸 종무헌이 회심의 일격을 던졌다.
금방이라도 서기종의 몸이 반 토막 날 것 같은 상황.
하지만 서기종의 표정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스륵.
마치 귀신의 움직임처럼 서기종의 몸이 흐릿하게 흩날렸다.
완벽하게 그의 그림자를 붙잡았다 생각했던 종무헌의 두 눈은 허무하게 허공을 가르는 도의 끝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어디, 어디냐!’
하지만 종무헌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뜨끔 하는 느낌과 함께 고개를 살짝 숙인 종무헌은 자신의 목을 관통하여 앞으로 삐져나와 있는 검 끝을 볼 수 있었다.
서걱.
서기종이 검을 뽑음과 동시에 서기종의 목이 몸통과 분리되어 바닥에 나뒹굴었다.
작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
말 그대로 충격적인 상황이었다.
그 누구도 지금의 상황을 예측한 사람은 없었다. 마지막에 종무헌이 일격을 날릴 때에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수석장로는 주먹을 불끈 쥐었으며 천중도문의 무사들은 하늘을 찌를 듯 사기가 올라 당장이라도 군마성주에게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군마성주만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띤 채 가만히 서 있었다. 그의 미소는 마치 너무 일찍 축배를 드는 천중도문 무리를 향한 비웃음 같아 보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미처 제대로 보지 못한 순간에 종무헌의 목이 바닥에 떨어졌다.
충격에 휩싸인 천중도문의 무사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문주가 죽은 상황. 그 누구도 지금의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군마성주는 대견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피가 떨어지는 검을 늘어뜨리고 서 있는 서기종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수고했다. 강해졌구나.”
강해졌구나 라는 한마디를 듣는 순간 서기종은 온몸의 털이 삐쭉 서는 느낌을 받았다.
‘강… 하다? 내가 이겼어?’
서기종 자신도 지금의 상황을 쉽게 인지하지 못했다.
군마성주의 말을 들은 후에야 조금씩 자신이 이겼다는 사실이 와 닿기 시작했다.
그런 서기종을 뒤로하고 군마성주가 천중도문의 무리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단 한 놈도. 살아서 도망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그의 서슬 퍼런 한마디에 천중도문 무리에는 죽음의 공포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
처음 적들이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을 때에는 의아함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안도감과 함께 편안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 시간이 점차 길어지자 은남도문 입장에서는 점점 더 부담스럽고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공격이 이뤄질지 모르는 상황.
은남도문에서는 정보력을 총동원해 적들의 동태를 살핌과 동시에 언제든 전투를 치를 수 있는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동물은 참으로 간사하여 아무 일 없는 평범한 나날들이 지속되면 거기에 안주하게 마련.
은남도문이라고 다를 것이 없었다.
가백현이 자신의 처소에서 창밖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반면 그의 처소를 찾아 찻잔을 기울이고 있는 나군천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가 문주답지 않군.”
나군천의 말에 가백현이 인상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에 나군천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가백현 하면 언제나 여유만만하고 자신감 넘치는 사람 아니던가? 그런데 지금 보니 그 모습이 다 거짓이었나 싶군.”
“헛소리.”
가백현이 짧게 대답하고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도대체 지금 무엇을 고민하는지 모르겠군.”
“무슨 소리지?”
가백현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나군천은 동요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적이 움직이지 않으면 움직이게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그걸 모르는 병신 같은 놈도 있던가?”
“그런데 왜 이러고 있는 거지?”
나군천의 물음에 가백현이 답답하다는 듯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저놈들은 우리가 정찰을 보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는 것도 다 알고 있어. 그런데도 꿈쩍을 않고 있는 거지. 도통 무슨 꿍꿍이인지…….”
“하하하하!”
가백현의 대답에 나군천이 대소를 터뜨렸다. 그에 가백현은 화가 난 듯 인상을 구겼다.
“내가 알던 가백현은 죽었군. 우물 안에서나 내가 최고라고 외쳐댔지, 우물 밖의 존재 앞에서는 납작 엎드린 개구리에 불과했어.”
“뭐라?”
가백현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하지만 나군천은 입을 다물지 않았다.
“생각해 봐. 정찰병이 기웃거린다고 해서 간지럽기나 하겠나? 저들이 움직이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지. 자네라면 그런 거에 눈 하나 깜짝 하겠는가?”
나군천의 물음에 가백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상대의 반응을 이끌어 내려면 좀 더 강하게 건드려야지.”
“직접 부딪쳐 본 자네가 더 잘 알겠지. 적들은 강하다. 섣불리 달려들어서는 안 돼.”
“잘 알지. 죽을 뻔했으니. 하지만 모든 공격이 정면 대결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네만 그럴 순 없어.”
“왜지?”
“전력을 보존해야 하는 판국에 잃을 수는 없다.”
최후의 결전이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가백현이 내릴 수 있는 결정의 폭은 상당히 좁았다.
“내가 가겠다.”
“자네가?”
“그래. 내가.”
나군천의 말에 가백현은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가백현이 본 나군천의 눈은 이미 결심을 굳힌 모습이었다.
“살아남은 반월도문의 전력은 정예가 아닌 거로 아는데. 아,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폄하하는 건 아니네.”
“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나군천의 단호한 어투에 가백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어차피 반월도문 무사들을 데리고 일을 치르겠다는 얘기니 내가 반대할 이유도, 권한도 없겠지. 우리가 도울 일은?”
“우리가 나가면 문이나 굳게 걸어 잠그라고. 적들의 머릿수는 최대한 많이 줄여보겠다.”
그렇게 말한 나군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마 지금 가려는 건가?”
“물론. 이미 준비는 다 끝났네.”
그렇게 말한 나군천이 가백현의 처소를 나서려다가 말고 서찰 한 장을 건네며 말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백룡문주가 오면 이 서찰을 전해주게.”
“그가… 돌아올 거라 믿는가?”
가백현의 물음에 나군천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물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