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장 소저. 내가 장 소저를 처음 만났을 때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아시오?”
“무슨…….”
상천의 물음에 장여진은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장 소저는 여자지만 당당하고 거침없고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었소. 의욕도 넘쳤고. 그것을 보며 대단하다고 생각했었지.”
상천의 말에 장여진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장 소저에게서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소. 물론 합산도문의 일로 많이 힘들었을 테니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장 소저가 다시 예전처럼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모습을 되찾았으면 하오. 이제는 어엿한 백룡문의 사람 아니오? 객식구가 아닌 진짜 식구.”
상천의 말에 장여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고개를 들었다.
“녹엽과 낭호가 따라 나서겠다고 저리 고집을 피우니 문파를 단도리 할 사람은 장 소저와 여 소저 뿐이오. 비록 제대로 문파의 체계가 갖춰지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의 경험이라면 잘해낼 것이라 믿소.”
“알겠습니다.”
여소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녀의 대답에 만족스런 표정을 지은 상천은 마지막으로 공혜의 앞에 섰다.
“혜야. 표정 좀 풀어. 응?”
상천의 다정한 말투에 공혜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를 상천이 가만히 안아 주었다.
“오라버니가 혜한테는 미안한 게 참 많아. 지금도 많이 미안하고. 이번에 갔다가 돌아오면 그때 제대로 사과 할게. 그러니까 돌아올 때까지 잘 지내고 있어. 알겠지?”
“응.”
공혜가 억지로 울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그런 그녀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준 상천은 화룡과 녹엽, 낭호와 함께 정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녀올게.”
그렇게 말한 상천이 세 사람과 함께 점차 백룡문에서 멀어져 갔다.
그런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백룡문 사람들의 얼굴에는 근심 걱정이 가득했다. 하지만 예전처럼 마냥 불안해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모두 무사히 돌아올 거라는 믿음이 담겨 있었다.
***
은남도문에 도착한 나군천은 가백현과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사태가 심각하건만 가백현의 표정에서는 전혀 조급함이나 불안감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나군천은 답답하고 화가 났다.
‘몸으로 느끼질 못하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감이 넘치는 것인가.’
나군천은 부디 후자이길 바라고 있었다. 비록 가백현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을지라도.
“몸이 많이 상했군, 나문주.”
“내가 이 정도인데 적들은 어땠을까.”
나군천의 대답에 가백현이 작게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향긋한 차향이 두 사람 사이의 싸늘한 기운을 상쇄하기라도 하듯 은은하게 퍼지고 있었다.
“듣자 하니 백룡문주라는 자가 제법 큰 역할을 했다고 들었는데. 보이지 않는 것 같군.”
“어디 있는지 모르네. 적들을 유인한 것까지가 내가 아는 전부지.”
“그렇다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른다는 뜻이군. 아깝군. 젊은 인재가 그렇게…….”
가백현의 말에 나군천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사람 목숨을 그렇게 단정 짓듯 말하면 안 되지. 멀쩡히 돌아올 것이라 믿고 있네.”
“허허. 그렇게 예민하게 받아들일 것까지야. 자네가 그리도 강하게 믿을 정도라면 대단한 인물이긴 한 모양이군.”
“경험만 쌓이면 나나 자네보다 나을지도.”
나군천의 말에 가백현의 한쪽 눈썹이 움찔거렸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큰 표정의 변화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작은 움직임을 놓치지 않은 나군천은 속으로 후련함을 느끼고 있었다.
“궁금하군. 정말 자네 말처럼 살아 돌아왔으면 좋겠네. 그래야 나도 직접 한 번 볼 기회가 생기지.”
그렇게 말하며 가백현이 단숨에 찻잔을 비웠다.
‘가백현… 네놈의 그 기고만장한 모습도 얼마 가지 못할 것이다.’
나군천이 가백현의 모습에 속으로 생각하며 역시 찻잔을 비웠다.
반월도문의 잔여 병력이 은남도문에 도착한지 닷새가 흘렀지만 군마성 쪽에서는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침없이 치고 나올 것 같은 기세를 보였지만 지금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잠잠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황이 썩 좋은 것은 아니었다.
이런 상황이 길어질수록 심리적으로 쫓기는 쪽은 열세에 놓인 사도련 쪽이었다.
몸은 휴식을 취할 수 있지만 정신적으로 받는 피로도는 조금도 해소되지 않고 더욱 쌓여만 가고 있었다.
군마성이 은남도문을 치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이유는 세작으로부터 천중도문의 종무헌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는 첩보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종무헌이 의식을 잃고 쓰러진 상황이라면 천중도문은 쉽게 움직일 수 없었겠지만 그가 의식을 찾았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었다.
구심점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
그것은 언제든 먹을 수 있는 음식과 힘들게 먹어야만 하는 음식의 차이와 같았다.
두 번째 이유는 군마성주의 행보였다.
직접 은남도문과 부딪쳐야 하는 입장에 있는 군마성의 무인들 입장에서는 기세를 올려 치고나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군마성주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신이 합류하기 전까지는 은남도문과의 충돌을 자제하라는 명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게다가 어디쯤 왔는지 모르겠지만 합류도 늦어지고 있어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점을 제외한다면 단 한 명이지만 군마성주의 합류는 그 어떤 최정예 부대의 합류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기에 더없이 좋은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잠시 숨고르기에 들어간 군마성.
그렇게 며칠의 시간이라도 번 것이 사도련에게 득이 될지 독이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
종무헌은 철저히 장로들의 의견을 배재한 채 정사청과 의논하여 계획을 수립해 갔다. 문파의 자존심만 내세우기보다는 지금까지 들어온 정보를 바탕으로 냉정하게 적과 천중도문의 격차를 파악했다.
문주의 입장에서 자신들이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피해를 최소화하고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냉정하고 신중하게 판단을 내리다 보니 늦은 밤까지 머리를 맞대고 있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렇게 며칠을 밤늦게까지 고민한 결과는 하나였다.
“정면으로 붙어서는 이길 확률이 전무합니다.”
“후…….”
정사청의 말에 종무헌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도련 내에서 최고는 아니라지만 나름대로 자부심을 갖고 일궈온 천중도문이었다.
그런데 적과 싸워 이길 확률이 전무하다니.
“그런 적들과 싸워 살아남은 것이로군. 나문주는.”
“그렇습니다.”
종무헌의 말에 정사청이 짧게 대답했다. 비록 경쟁을 하는 사이이긴 하지만 나군천이라는 무인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답은 기습밖에 없겠군.”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습니다. 내부에 세작이 있을 수 있고 현재 적들의 위치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알아보는 데 얼마나 걸리겠나?”
“세작을 골라내는 것이라면…….”
“아니. 적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 얼마나 걸리겠냐는 말이다.”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은남도문의 영역에 든 것은 확실하니까요.”
“세작은?”
“시간이 좀 걸릴 듯합니다.”
작심하고 숨어 있는 세작을 찾아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이 몇 시지?”
“축시가 좀 지났습니다. 좀 쉬시겠습니까?”
“아니. 반 시진 내로 장로들을 전부 불러 모아. 그들의 실망스런 모습을 만회할 기회를 주겠어.”
그렇게 말한 종무헌은 집무실을 나서 곧장 대전으로 향했다.
종무헌의 갑작스런 부름을 받은 장로들은 부랴부랴 대전에 모였다. 자다 깬 장로들도 여럿 있는 듯했다.
“상황이 이런데 속편하게 잠은 오는 모양이군.”
종무헌이 못마땅하다는 듯 장로들에게 한마디 던졌다. 이번에도 장로들은 별말 못하고 있었지만 못마땅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기분들 나쁜 모양이군. 좋아. 그럼 만회할 기회를 주지. 정확히 열두 시진 주겠다. 문파 내에 있는 모든 세작을 색출해 내도록.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다.”
그렇게 말한 종무헌이 대전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역시 대전을 나온 장로들이 분주하게 문파 내를 휘젓고 다니기 시작했다.
***
세상은 어지러운데 날씨는 화창하기만 했다.
녹음이 푸른 풍경을 뒤로하고 한가롭게 거니는 두 사람이 있었다.
“천중도문의 종무헌이 정신을 차렸다는구나.”
뒷짐을 진 채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으며 군마성주가 말했다. 그 뒤를 따르는 서기종은 그저 그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꽃을 피우려 하니 날파리가 꼬이기 시작하는구나. 벌이 날아들어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곧 벌과 나비가 찾아들 것입니다.”
“그렇겠지. 그래도 꼬이는 날파리는 쫓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말한 군마성주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서기종을 바라보았다.
“가자꾸나. 날파리 쫓으러.”
군마성주의 말에 서기종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
하루가 지났다.
전날과 같은 시간이 다가오자 장로들이 하나둘씩 대전에 모이기 시작했다. 꼬박 하루 동안 종무헌의 명을 수행했기 때문인지 다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약속한 시간이 되고 대전으로 종무헌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그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다들 모였는가?”
“예!”
장로들이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장로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종무헌은 자신 없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는 오 장로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오 장로.”
“예.”
“몇 명이나 찾았지?”
“죄송합니다. 찾지 못했습니다.”
오 장로는 질책 들을 각오를 한 듯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러자 몇몇 장로가 술렁이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정작 종무헌은 오 장로의 대답에 질책은 하지 않고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석 장로는 어떻소?”
“죄송합니다.”
수석 장로 역시 오 장로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였다. 그에 이번에는 종무헌의 눈썹이 한 번 움찔거렸다.
“육 장로는?”
“저도…….”
“뭐라?”
종무헌의 목소리에 약간의 노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장로들의 얼굴에 긴장한 표정이 피어올랐다.
“그럼 세작을 잡아낸 장로가 있나?”
종무헌의 물음에 이 장로와 삼 장로가 앞으로 나섰다. 두 사람이 동시에 앞으로 나서자 종무헌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이 장로와 삼 장로는 각각 몇 명이나 잡아냈지?”
“전 세 명입니다.”
“저도 세 명입니다.”
이 장로와 삼 장로가 고개를 숙이며 각각 대답했다. 그러자 종무헌이 태사의에 기대어 앉아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그렇단 말이지?”
“예.”
이 장로가 자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에 잠시 동안 두 사람을 내려다보던 종무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뒷짐을 진 채 천천히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