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월검제-125화 (125/141)

#125화.

천막 안으로 들어간 그들은 동그랗게 모여 앉아 상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다시 백룡문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안 그래도 그런 얘기를 얼마 전부터 하고 있었습니다.”

상천의 말에 낭호가 대답했다. 적들이 은남도문에 집중하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피해 있을 이유가 없었다. 물론 사도련이 무너진다면 또 한 번 피해야 할 상황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었다.

“그럼 오후에 바로 채비를 하는 것으로 합시다.”

“화룡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요.”

이른 아침에 비호의 뼛가루를 모아 어디론가 떠난 화룡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이대로 그냥 떠나 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상천은 아닐 거라 믿고 있었다.

설령 진짜로 떠났다 해도 상천으로서는 그녀를 탓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라 생각했다.

“채비를 다 할 때까지 오지 않는다면 서신을 남겨놓는 거로 하고. 돌아온다면 백룡문으로 찾아오겠지.”

상천의 말에 다들 이견을 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돌아가면 다시는 이곳으로 오는 일은 없을 겁니다. 죽더라도 그곳에서 죽을 것이고 살더라도 그곳에서 살 겁니다. 우리가 있을 곳은 그곳이니까.”

큰 싸움을 치르고 나군천을 보며 상천이 느낀 것이 있었다. 문파를 버리고 피하는 것에 치욕스러운 감정을 느껴야 하며 그만큼 아파해야 한다는 것을.

지금까지는 문도들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백룡문을 떠나 피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문도들 못지않게 문파도 반드시 지켜야 할 뿌리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상천이었다.

“다들 식사하세요!”

금세 한 상 뚝딱 차린 공혜가 식사를 안으로 들이며 말했다. 짧은 대화를 나눈 그들은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여 간소하지만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비호의 뼛가루를 근처 산속에 푸린 화룡은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분명 굉장히 슬픈데 눈물은 나지 않았다. 너무 눈물이 나지 않아 스스로 너무 야속하기까지 했다.

“잘 가라. 다시 태어나면 이 빌어먹을 무림에 몸담지 말고.”

화룡이 비호의 뼛가루 뿌린 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주변을 둘러보니 벌써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얼마나 있었던 거야…….”

자신이 이곳에 얼마나 있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멍하니 있었던 화룡이 서둘러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상천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을 때, 자신만 빼놓고 이사 갔다며 뾰로통해진 그녀였다.

***

문주가 쓰러졌을 뿐 전력은 고스란히 남았다 할 수 있는 천중도문은 예상 밖으로 아비규환이었다.

장로들은 서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바빴고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정사청은 답답하기만 했다. 평소에는 몰랐던 문주의 존재감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그였다.

그러는 와중에 반월도문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군천을 비롯해 남은 반월도문의 전력이 은남도문 쪽으로 합류했다는 소식이었다.

사도련 중 두 곳에 무너진 상황.

이렇게 되자 정사청도 현 상황을 냉정하게 보고 타개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급박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생각만 했을 뿐 구체적인 방법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소모적인 논쟁을 하고 있는 장로들을 보고 있자면 입 밖으로 어떤 이야기도 꺼낼 엄두가 나질 않았다.

오늘도 한바탕 장로들의 고성을 듣고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온 정사청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 정도였다.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우며 작게 고개를 저은 정사청은 밖에서 들려온 다급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수하의 다급한 목소리에 정사청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슨 일이냐!”

“문주님께서!”

수하의 입에서 ‘문주’라는 단어가 들리자 정사청은 반사적으로 몸을 튕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주님께서 왜!”

“정신을 차리셨습니다!”

“하…….”

종무헌이 정신을 차렸다는 소식에 정사청은 다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밀려오는 안도감에 다리가 풀려 버린 탓이었다.

종무헌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문파 내의 현 상황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장로들도 이 소식을 들었겠지?”

“아닙니다.”

수하의 대답에 정사청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수하를 바라보았다.

“왜?”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군사님만 조용히 모셔오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래? 알았다. 나가봐.”

수하가 나가고 잠시 의자에 앉아 있던 정사청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종무헌의 침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종무헌은 눈을 뜬 채로 가만히 누워 있었다.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초점이 흐렸다.

부상을 입고 오랜 시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던 이유도 있겠지만 최고의 자리에 오른 무인으로서 그날의 뼈아픈 패배가 마음 깊숙한 곳을 괴롭히고 있었다.

“문주님.”

자신을 찾아온 정사청의 목소리에 종무헌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왔는가.”

“예. 몸은 좀 어떠십니까?”

“생각보다는 괜찮아. 꽤 오래 누워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렇습니다.”

“고생 많았겠군.”

“아닙니다.”

아니라 대답하는 정사청을 힐끗 쳐다본 종무헌이 실소를 흘렸다.

천중도문 안에 있는 사람 중 종무헌만큼 장로들을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자신이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동안 그들이 어떤 모습을 보였을지는 보고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사이에서 정사청이 굉장히 힘들었을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장로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저만 따로 부르셨습니까?”

정사청의 물음에 종무헌이 살짝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는 그를 가까이 다가오게 한 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생각해 보니 짜증이 치밀어서 말이야. 내가 죽느니 사느니 하고 있을 때에는 자기들 밥그릇 키우려고 별짓을 다하다가 내가 깨어났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꼬랑지 치는 개새끼 마냥 아부를 떨겠지. 그런 것들이 이제는 너무 지겨워. 당분간은 그 얼굴들 보기가 싫어서 말이지.”

종무헌의 말에 정사청이 실소를 머금었다. 뭔가 거창한 이유가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 외로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현재 상황은 어떤가?”

이어진 종무헌의 물음에 정사청은 웃음기를 거두고 말했다.

“좋지 않습니다. 현재…….”

정사청은 그간 있었던 상황을 소상히 종무헌에게 전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의 표정은 점차 찌푸려지고 있었다.

“우리 천중도문이 개무시당하고 있단 말이군. 그런데도 장로들은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는 거고.”

종무헌의 목소리에 약간의 노기가 묻어 나왔다. 정사청은 그 옆에서 묵묵히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장로들 면상을 좀 더 일찍 봐야겠군. 군사.”

“예.”

“한 시진 후에 전부 다 대전으로 모이라 이르도록. 그전까지 내 침소로 찾아오는 일 없도록 만들고.”

“알겠습니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몸을 움직이기에는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종무헌의 완강한 명령에 정사청은 만류하지 못하고 그대로 명을 받들었다.

한 시진 후.

장로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대전에 모여 있었다. 종무헌이 깨어났다는 소식에 기쁜 마음도 들었지만 그가 누워 있는 동안 자신들이 한 행동이 있기에 괜히 제 발 저리는 모양새였다.

끼이익

대전의 문이 열리고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종무헌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까지 움직이는 데 불편한 점이 많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이제 막 정신을 차린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태연했다.

장로들 사이를 지나 태사의에 앉은 종무헌은 말없이 장로들을 훑었다. 긴장한 듯한 그들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종무헌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군마성 놈들이 은남도문으로 향하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장로 중 누군가가 재빨리 대답했다. 그쪽으로 잠시 시선을 던진 종무헌이 좀 더 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반월도문을 밟고 은남도문으로 향하고 있는데 우리 천중도문은 쳐다도 안 보고 있다지?”

종무헌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차린 장로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개무시도 이런 개무시가 없는 상황인데 누구 하나 분해하는 것 같지도 않고 배에 살만 찌우고 있다니.”

“그, 그것이 문주님께서 의식이 없는 상황인지라…….”

수석장로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변명은 오히려 종무헌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할 뿐이었다.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 건가!”

결국 종무헌의 입에서 분노에 찬 일갈이 터져 나왔다.

“이런 한심한 작자들을 장로라고 앉혀 놓은 내 불찰이군. 장로들은 계속해서 배불리기에 매진하도록. 군사.”

“예.”

“지금 즉시 대주들 전부 다 내 집무실로 모이라 이르도록. 내가 직접 그들에게 명령을 하달할 것이니.”

“아, 알겠습니다.”

종무헌의 말에 장로들이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 말은 장로들의 권한을 박탈하겠다는 뜻. 그만큼 종무헌의 분노가 크다는 뜻이었다.

“이러니 사도련 내에서도, 군마성 저 밟아 죽일 놈들도 우릴 개무시하는 것이다.”

그렇게 말한 종무헌이 성큼성큼 대전을 벗어났다. 그가 사라진 후에도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물렀다.

5장. 군마성주

어느 정도 몸을 회복한 상천은 은남도문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아직 몸이 완전하지 않은 상황에서 떠나려 하는 상천이 걱정스러웠지만 장여진과 공혜는 만류하지 못했다.

만류한다고 해서 들을 상천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채비를 모두 마친 상천은 작은 짐을 들쳐메고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배동삼과 병목을 비롯한 백룡문도들이 상천을 배웅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던 상천의 시선이 어느 한곳에 머물렀다.

그곳에는 함께 떠나려는 듯 채비를 마친 화룡과 낭호, 녹엽이 서 있었다.

상천은 작게 한숨을 쉰 뒤 그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화룡은 그렇다 쳐도 두 사람은 왜 이리 고집이오?”

“뭐, 좀이 쑤셔서…….”

녹엽이 말을 얼버무리며 씨익 웃었다. 하지만 상천은 여전히 얼굴을 펴지 못했다.

적을 직접 상대해 본 입장에서 녹엽과 낭호의 실력으로는 그들을 상대하기 어려웠다. 상천 자신의 실력이 훨씬 더 뛰어나다면 모르겠지만 녹엽과 낭호까지 지켜주기는 어려웠다.

“가면 죽소.”

“무림 어디를 가나 죽습니다.”

낭호가 짧게 대답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후우…….”

몇 마디 말로 꺾을 수 없는 고집이라는 걸 알기에 상천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화룡의 손에 시선이 닿았다.

그녀의 양손에는 각각 검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그 검. 비호의 검이오?”

“네. 맞아요.”

화룡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상천이 그녀에게 물었다.

“비호의 검. 내가 써도 괜찮겠소?”

상천의 물음에 화룡이 잠시 그의 눈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내밀었다.

“비호도 좋아할 거예요.”

“고맙소.”

비호의 검을 받아 든 상천은 장여진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그녀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상천은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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