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월검제-124화 (124/141)

#124화.

그들이 무사히 호남성에 들어섰을 무렵.

비호의 시신을 안아 든 상천과 화룡은 백룡문에 거의 다다른 상태였다. 백룡문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상천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화룡이 비호의 시신을 자신이 들고 가겠다고 했지만 상천은 고개를 저었다.

별것 아닌 일이지만 이렇게 해야 비호에게 미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힘들어하는 상천을 보는 화룡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상천이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것은 전혀 상천이 미안해할 일이 아니었다.

만약 비밀통로에서 나오기 전 상천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절대로 나가지 않겠다고 버텼다면 버틸 수 있었다. 반대는 했지만 결국 그의 뜻에 따른 것은 상천의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닌 자신들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

게다가 무림이라는 곳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목숨을 잃을지 모를 곳이다.

비호가 죽은 것은 분명 가슴 아픈 일이었다.

특히 화룡은 자신을 구하다가 죽은 비호의 시신을 보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상천을 원망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스스로 한 선택이었고, 무림에서는 너무나 당연하고 빈번히 발생하는 상황이며 자칫하면 둘 다 죽을지도 모를 상황에서 나온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기 때문이었다.

‘나이에 비해 어른스럽기는 하지만 아직 어려. 뭐, 경험이 해결해 주겠지.’

화룡이 자신보다 앞서 걸어가는 상천의 등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걷던 상천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어느새 주변은 굉장히 낯익은 풍경으로 바뀌어 있었다.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화룡이 정면을 바라보았고, 그녀의 시선에 백룡문이라 적힌 현판이 또렷이 보였다.

“도착했네요.”

그녀의 말에 상천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어려운 길을 돌아 오랜만에 돌아왔기 때문에 느낌이 새로운 모양이었다.

“다행이 그 이후로 적들이 왔다 가지는 않았던 모양이에요.”

“아무래도.”

상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다. 적들이 온통 반월도문 함락에 치중한 덕을 봤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없겠죠?”

“없소. 다들 그곳에 있겠지. 그리로 갑시다.”

그렇게 말한 상천이 힘겹게 발걸음을 떼었다. 화룡이 보지 못하게 등을 돌린 채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화룡은 말없이 상천의 뒤를 따랐다.

반월도문이 함락되었다는 소문은 이미 귀주성 전체에 퍼진 상태였다. 그리고 당연히 피신해 있는 백룡문 사람들의 귀에도 그 소문이 들어간 상태였다.

상천과 비호, 화룡이 반월도문에 지원을 간 상황이기 때문에 소문을 들은 이후로 세 사람 걱정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잘 지경이었다. 특히 공혜는 상천이 어떻게 되지는 않았을지 하는 걱정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며 지내고 있었다.

장여진도 공혜만큼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녀 못지않게 걱정하고 있었다. 다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장여진은 상천에 대한 굳은 믿음도 마음 한켠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 정도였다.

그렇게 다들 걱정과 불안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 상천과 화룡이 돌아왔다.

비호의 시신을 안고서.

비호의 시신을 가운데 두고 모든 사람이 동그랗게 모여 섰다. 하나같이 표정은 어두웠다.

상천과 화룡이 돌아왔다는 기쁨도 잠시.

비호의 시신 앞에서 모두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거대한 문파인 합산도문에서 생활하다가 백룡문 같은 곳에 와서 지내면서도 언제나 밝은 모습만 보였던 그였다.

게다가 흔쾌히 상천을 문주로 받들겠다고 다짐하고 그에 맞게 행동하던 그였다.

누구나 그를 마음에 들어 했고, 든든하게 생각했고 가족처럼 생각했다. 그런 그가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왔을 때의 충격은 상당했다.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어린아이들마저도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서 형은 어디 갔습니까?”

기나긴 침묵을 깨고 상천이 물었다. 그러자 녹엽과 낭호는 잠시 시선을 맞추었다. 그러다가 낭호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실종입니다.”

“예?”

낭호의 대답에 상천이 깜짝 놀랐다. 실종이라니.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잠시 나갔다 오겠다고 했는데… 그 이후로 계속해서 찾아봤지만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낭호의 대답에 상천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동안 많이 의지했던 사람 중 한 명인 서기종이 실종이라니.

‘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상천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의문이 어지럽게 떠올랐다.

“저희도 답답합니다. 문주님.”

녹엽이 짧게 한마디 했다. 서기종과 친했던 녹엽이다. 그런 그도 속으로는 엄청 답답해하고 있었다.

“후…….”

상천이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서 금 간 늑골에서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그것이 미약하게 느껴질 만큼 충격적이었다.

“후우… 후우…….”

상천의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다친 상태에서 무리를 한 데다가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몸 상태가 더 안 좋아진 까닭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괜찮아요?”

장여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상천에게 다가가려던 공혜는 그 모습을 보며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문주님 몸이 안 좋으세요. 그런데 그동안 무리를 하셔서…….”

화룡의 말에 낭호와 녹엽이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 짧은 시간 동안 상천의 안색은 많이 안 좋아져 있었다.

“얼른 들어가서 좀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비호의 시신은…….”

“저희가 알아서 수습하겠습니다. 일단 쉬십시오.”

상천은 비호의 시신 수습이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 있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마음과 달리 정신은 점점 아득해지고 있었다.

마치 얼른 쉬라는 것처럼.

결국 상천은 녹엽과 낭호의 부축을 받아 급하게 만들어놓은 자리에 몸을 뉘였다.

상천은 자리에 눕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정오가 지나서야 상천이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뜨니 지붕이 보여 상천은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한참을 생각하다가 전날의 일을 떠올렸다.

“돌아왔구나.”

상천이 낮게 읊조렸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오랜만에 이렇게 편하게 누웠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지난 일이 전부 꿈같이 느껴졌다.

“일어났네요?”

상천의 상태를 살피러 들어온 장여진이 멀뚱히 눈을 뜨고 있는 그를 보며 말했다.

“내가 오래 잤소?”

“일곱 시진 정도는 잔 거 같네요.”

“후…….”

상천이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장여진이 그 옆에 앉으며 물었다.

“몸은 좀 어때요?”

“괜찮소.”

그렇게 대답한 상천이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가만히 누워 있을 때에는 괜찮던 늑골에서 또다시 지독한 통증이 몰려왔다. 그러자 진기가 빠르게 늑골 쪽으로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냥 누워 있어요. 많이 아플 텐데. 당분간은 그냥 쉬는 게 좋아요.”

“끄응.”

장여진의 말에도 상천이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상체를 일으켜 앉기만 했는데도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였다.

늑골에 금이 간 상태로 무리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족히 한 달은 조심해야 할 정도로 상태가 심해져 있는 상황이었다.

만약 계속해서 진기가 움직이며 통증을 완화해 주지 않았다면 진작 혼절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비호의 시신은?”

“어제 화장을 했어요. 뼛가루는 화룡이 뿌리러 갔어요.”

“혼자?”

“네. 함께 가려고 했는데 혼자 가겠다고 하더군요.”

장여진의 말에 상천은 마음이 무거웠다. 여전히 자신의 탓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아 있어요. 아무래도 누군가가 죽는다는 걸 처음 경험하는 거니까요.”

그녀의 말에 상천이 슬쩍 문 쪽을 바라보더니 힘겹게 몸을 움직였다. 그러자 장여진이 서둘러 그를 부축했다.

장여진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 선 상천은 곧장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잠시 심호흡을 하며 통증이 가라앉기를 기다린 상천은 조심스레 밖으로 나갔다.

바깥의 모습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지만 다들 목소리도 작고 표정도 어두웠다.

장여진의 부축을 받아 밖으로 나온 상천을 본 배동삼이 가장 먼저 달려와 그의 상태를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어쭈?”

예전 같았으면 ‘형, 괜찮아?’라고 물었을 배동삼이 깍듯하게 자신을 대하자 상천이 옅은 미소와 함께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런 자신이 어색한지 배동삼도 약간 민망해하는 듯했다.

“괜찮아요?”

어느새 다가온 공혜가 걱정스런 표정을 하고는 물었다. 그녀의 큰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듯했다.

“괜찮아.”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지은 상천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동삼, 실력은 좀 늘었나?”

“많이 늘었어요.”

상천의 질문에 배동삼 대신 여소정이 대답했다. 상천이 없는 동안 여소정이 그의 수련을 봐주고 대련도 해준 덕분에 실력이 상당히 늘어 있었다.

“신경 써줘서 고맙소.”

“별말씀을요.”

상천의 말에 여소정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내가 직접 상대하면서 실력 좀 보고 싶은데 그건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네. 나중에 보면 정말 깜짝 놀라실 겁니다.”

계속해서 자신에게 극존대를 하는 배동삼을 보며 상천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 말투, 안 쓰면 안 되겠어?”

“안 됩니다.”

이번에도 대답은 배동삼이 아닌 낭호가 했다. 녹엽과 함께 저잣거리에 나가 바깥 소식을 알아보고 돌아오던 찰나였다.

“빡빡하군.”

“이게 문파입니다. 이 정도 기강도 안 서면…….”

“아아. 알았소. 고생 많았겠다, 동삼아.”

상천이 낭호의 말을 끊으며 배동삼에게 한마디 건네자 그는 작게 한숨 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서 형에 대한 소식은 여전히 들리는 게 없소?”

“들릴 소식이었으면 진작 들렸을 것이고, 연락하려고 마음먹었으면 진작 했을 겝니다. 빌어먹을.”

녹엽이 낮게 욕을 내뱉었다. 그것을 낭호가 못마땅하다는 듯 바라보았지만 녹엽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서기종이 사라지고 가장 마음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 녹엽이었다. 처음에는 배신감이 가장 컸다. 이렇게 훌쩍 사라져 버리다니. 적어도 자신에게는 무언가 언질이라도 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 사단이 난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괜찮을 것이란 생각과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수시로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후…….”

상천도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알 길이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반월도문이나 은남도문 쪽 소식은 들리는 것이 없습니까?”

“없습니다. 실질적으로 사도련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은남도문을 상대하는 일이니 적들도 전열을 재정비하려는 듯합니다.”

낭호의 대답에 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맹주가 쓰러진 천중도문 보다는 반월도문의 잔여 전력이 합류한 은남도문을 상대하려면 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것이었다.

“다들 괜찮나 모르겠군.”

상천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자신에게 뒤를 부탁하고 적들을 막기 위해 통로에 남은 나군천을 비롯해 다른 사람들의 안위가 걱정이 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상천이 갑자기 피식 웃었다. 그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왜 그러는지 영문을 몰라 빤히 상천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뭐 좀 먹죠. 배고픕니다.”

“알았어요. 잠깐만 기다려요.”

배고프다는 상천의 말에 공혜가 서둘러 식사 준비를 위해 움직였다. 병목과 배동삼도 그녀를 돕겠다며 함께 자리를 비웠다.

“다들 저 좀 봅시다.”

그렇게 말한 상천이 천막 안으로 천천히 걸어갔고, 그를 따라 낭호와 녹엽, 장여진과 여소정이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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