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월검제-123화 (123/141)

#123화.

감으로 방향을 잡고 달리던 상천의 시야에 적들의 모습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통증이 심해 정신이 아득해지는 상황 속에서도 상천은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삼류 문파의 삼류 검법이던 단월검이 과거 중원 무림을 어둡게 만들었던 군마성의 무인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삼류 보법이던 천유보는 또 어떤가.

매끄럽게 펼쳐지는 그의 움직임을 제대로 쫓는 사람이 없었다.

말 그대로 껍데기만 있던 무공이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적을 쓰러뜨리는 상천의 시야에 가릉은 없었다.

비호와 화룡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 의미는 아직 두 사람이 살아 있다는 뜻이라 생각한 상천은 적들을 그들과 떨어뜨려 놓는 것이 더 낫겠다는 판단에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디 살아 있으시오!’

적들을 유인하며 상천이 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

“큭!”

그 순간을 떠올리던 상천이 인상을 찌푸렸다. 다친 늑골이 욱신거렸다.

가만히 있으면 통증이 심하지 않았지만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정신을 잃을 것만 같은 엄청난 통증이 전신을 휘감았다.

하지만 이대로 앉아서 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상천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

은남도문의 대전 안.

가백현은 풍신현과 단둘이 있었다. 넓은 대전에 두 사람만 있으니 횅한 느낌이 들었다.

“반월도문에서 피신한 인원은 어디쯤 왔지?”

“반나절쯤 후면 귀주와 호남의 경계에 접어들 겁니다.”

“봉황(鳳凰)현 쪽으로 들어오겠군. 준비는?”

“이미 마쳤습니다.”

풍신현의 대답에 가백현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반월도문에서의 참패를 접한 이후 그의 표정이 밝은 적이 없었다.

“적의 동향은?”

“아직까지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점령한 반월도문을 기점으로 재정비를 할 생각인 듯합니다.”

“자네가 생각하기에는 어떤가?”

“이길 수 있는 확률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그렇게 높지는 않습니다.”

풍신현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자존심 상하면서 위기의식을 느낄 수 있는 대답이었지만 가백현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 확률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지금으로써는.”

“지금으로써는이라……. 그럼 상황이 변하면 가능하다는 뜻이군. 자세히 말해보지.”

“군마성주가 나선다면 가능합니다.”

“군마성주가 나섰다는 것은 이 싸움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뜻하겠지.”

“그렇습니다.”

“그런데 뒤집을 수 있다?”

“제아무리 준비를 잘하고 나왔다 한들 우두머리가 쓰러지면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나 군마성처럼 재기를 노리고 모습을 드러낸 상황에서는 더더욱.”

풍신현의 대답에 가백현이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대전 바깥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군마성주를 쓰러뜨린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순식간에 전세를 뒤집을 수 있겠지.”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을 높임과 동시에 저들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입니다.”

“자네는 내가 군마성주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문주님이시니.”

풍신현의 대답에는 강한 믿음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하된 입장에서 문주에 대한 믿음에 기인한 것일 뿐,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군마성주가 누구이며 그의 실력은 어느 정도 되는지 아무런 정보가 없기 때문이었다.

“군마성주가 나서도 문제, 나서지 않아도 문제로군.”

그렇게 중얼거린 가백현이 뒷짐을 진 채 대전 밖 은남도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긴 했지만 아직까지 은남도문은 평화로웠다.

하지만 이것도 얼마나 갈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경계 지역의 감시는 강화했겠지?”

“물론입니다.”

풍신현의 대답에 고개를 한 차례 끄덕인 가백현이 가만히 중얼거렸다.

“이제 최후의 싸움만 남은건가…….”

은남도문 입장에서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싸움이, 군마성 입장에서는 시작이 될지도 모를 싸움이 머지않았다.

상천은 성치 않은 몸으로 비호와 화룡을 찾아 다녔다.

하지만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 알 길이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통증이 계속되어 휴식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멈칫.

한참을 달리던 상천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흔적!’

상천의 눈에 띈 것은 보법의 흔적이었다.

바닥에 어지럽게 찍혀 있는 흔적으로 보아 상당히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던 것으로 보였다.

보법의 흔적뿐만 아니라 곳곳에 혈흔도 있었다.

‘멀지 않다.’

상천이 급하게 지면을 박찼다. 늑골에서 전해져 오는 통증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상천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반 시진 가까이 쉬지 않고 달렸다.

중간중간에 보이는 혈흔을 따라 이동하던 상천이 다시 한 번 걸음을 멈추었다.

마지막 혈흔이 이어진 곳은 여경(余慶)현 부근에 있는 작은 산이었다.

이곳까지 오면서 싸운 흔적은 보았지만 시체는 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가릉의 것이든 두 사람의 것이든 둘 중 하나는 눈앞에 있는 산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상천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크지 않은 산처럼 보였지만 사람이 다니지 않는 야산이라 그런지 길이 험했다. 늑골을 다친 상황에서 험한 산길을 다니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평소 같았으면 쉽게 지나다녔을 산길도 지금은 힘들었다.

우뚝.

산속을 얼마나 헤매고 다녔을까.

상천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낯익은 사람 한 명이 있었다.

분명 화룡의 뒷모습. 그녀는 누군가를 품에 안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화룡.”

상천의 부름에도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흐느끼는 듯 어깨만 간간이 들썩이고 있을 뿐이었다.

상천이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제야 그녀가 품에 안고 있던 사람이 싸늘하게 변한 비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상천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주변을 살폈다.

이내 한쪽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는 가릉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화룡의 것으로 보이는 검이 가릉의 목에 그대로 꽂혀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품에 안겨 있는 비호의 몸에는 가슴부터 복부까지 사선으로 길고 큰 상처가 나 있었다.

어떻게 상황이 흘러갔는지 충분히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상천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옆에 서 있었다.

늑골에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지금 상황이 가져다주는 슬픔 때문에 오는 것인지 모를 아픔이 느껴졌다.

한참을 그렇게 서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자 말없이 흐느끼고 있던 화룡이 입을 열었다.

“저 대신 죽었어요.”

“…….”

“원래는 제가 죽었어야 하는 건데…….”

“미안하오.”

상천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최선이라 생각했지만 무모한 계획이었고, 두 사람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비밀통로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밖의 상황이 어떤지 모르면서 두 사람을 사지로 내몬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비밀통로를 나오기 전 두 사람의 몸에 생채기 하나 나지 않게 해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내 잘못이다.’

죄책감이 밀려왔다. 죽지 않았어야 할 사람이 죽었다.

그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었다.

“다행이에요. 문주님이 살아 계셔서.”

화룡의 그 말이 더 가슴 아팠다. 오랜 시간 함께 지내온 동료가 죽었다. 하지만 자신은 알고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슬픔을 뒤로하고 자신의 안위를 걱정했다.

그것이 상천에게 더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몸은 괜찮소?”

“전 괜찮아요.”

화룡이 조심스레 비호의 시신을 바닥에 눕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큰 상처는 없는 듯 했지만 얼굴에 피로가 가득해 보였다.

“일단은 강구까지 멀지 않으니 돌아갑시다.”

그렇게 말하며 상천이 비호의 시신을 안아 들었다. 얼음같이 차가운 그의 시신에 상천은 다시 한 번 가슴이 아팠다.

“괜찮으신 건가요?”

비호의 시신을 안아 든 상천이 땀을 흘리자 화룡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그에 살짝 미소를 지은 상천이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고 화룡도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있던 자리에는 가릉의 시신만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이었다.

***

호남성 봉황(鳳凰)현.

반월도문을 빠져나온 일행은 호남성에 들어서자 안도감을 느꼈다. 추격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제대로 쉬지 못하며 여기까지 왔기에 느끼는 안도감은 더 컸다.

살았다는 안도감. 그리고 살 수 있겠다는 안도감이었다.

그것은 나군천도 마찬가지였다.

몸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긴장한 채로 무리를 해왔던 그였기에 호남성으로 넘어오자 탁 풀려 버렸다.

긴장이 풀리면서 정신도 몽롱해지고 곳곳에서 울리는 통증을 견디기가 어려워졌다.

지금까지 오는 동안 제왕무적대주에게 거의 업히다시피 해서 오긴 했지만 그 역시도 나군천에게는 무리가 되는 상황이었다.

나군천이 눈에 띄게 안 좋아지자 하신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그런 그에게 나군천은 손을 들어 괜찮다는 표현을 해 보였다. 하지만 낯빛은 여전히 창백했다.

나군천의 그런 상태를 고현이라고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었다.

하지만 내색은 하지 않고 있었다.

지금 당장 어떻게 해줄 수 있는 방법도 없었고, 이대로 상태가 더 안 좋아진다면 은남도문의 입장에서는 나쁠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왔군.”

나군천의 상태를 모른 척하던 고현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 한 무리의 무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에서 왔지?”

“수석장로님을 뵙습니다. 원릉(沅陵)지부에서 나왔습니다.”

“본산은 문제없나?”

“예. 없습니다. 수석장로님을 비롯해 반월도문에서 오는 분들을 안전하게 모시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원릉지부에서 온 무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고현이 나군천 쪽을 한 번 바라보고는 말했다.

“반월도문의 문주님께서 지금 많이 안 좋으시네. 일단 편히 가실 수 있도록 마차부터 준비하도록.”

“예. 서둘러 준비하겠습니다.”

절도 있게 대답한 무사가 수하들을 시켜 서둘러 마차를 준비하라 일렀다.

그것을 본 고현이 나군천에게 다가갔다.

“힘드실 텐데 잠시 앉아 쉬시지요. 곧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마차를 타고 일단 근처 지부에 가서 간단하게나마 치료를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고맙소.”

나군천이 짧게 대답했다. 무미건조한 그의 대답에 고현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지부에서 온 무사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한숨 돌릴 수 있는 건가?’

은남도문의 영역에 들어왔고, 호위하기 위해 인근 지부에서 병력도 왔으니 마음을 놓아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은남도문에 가면 또 어떤 힘든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표면적으로 적은 외부에 있었지만 내부라고 해서 적이 없으란 법은 없었다.

‘범의 아가리로 들어가는 것만 아니길…….’

하신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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